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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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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다람




아무도 없는 트랙 위로 빠른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소리는 뛰어가는 선수의 뒤꿈치를 잡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들렸다. 정말로 소리보다 빠르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인지점을 통과하고 선배이자, 코치인 세영이 웃으면서 다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신기록이야, 세계 신기록. 올림픽에서 이대로만 달려주면 걱정 없겠다.”

세영은 후배의 놀라운 발전을 감탄하며 말했다.

“요즘 결승점에 다다르면 빛 같은 게 보여요.”

다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건 네가 너무 빨라서 그런 거야. 나중엔 빛도 잡겠다.”

세영은 놀리듯이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하지만 다하는 진지했다. 실제로 다하가 전속력으로 트랙을 질주할 때면 그녀의 눈에는 멀리서 공간을 잘라낸 듯한 가는 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보였다. 처음에 그 빛을 보았을 때는 단순히 무리한 연습의 피로로 인한 환시인 줄 알았다. 그다음에 보였을 땐 엔돌핀 자극에 의한 시신경의 오작동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모두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빛이었다.

그 빛을 보였던 날 이후로 다하의 기록은 놀랍도록 단축되었다. 처음엔 한국 여자 단거리 신기록, 다음은 세계 여자 단거리 신기록이었다. 성격이 급한 몇몇의 사람들은 어쩌면 세계 최초로 여자 신기록이 남자 신기록을 추월하는 것이 아니냐는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들의 호들갑이 영 틀린 것은 아닌 것이 조금 전 세영이가 체크한 기록에 따르면 이미 다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었다. 때문에 빛이 보인다는 다하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인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정작 다하 본인은 그 기록에 전연 관심이 없었다. 다하의 관심은 오로지 그 빛이었다. 빛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것이 다하의 목표였다. 신기록은 그 목표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본인의 기록에 세계의 매스컴이 놀랐을 때에도 다하는 부족함만을 느끼고 있었다. 갈증,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빛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 부지런히 연습했다. 다하의 육체는 오로지 달리기 위해 발달해나갔다. 다리의 근육 섬유는 더욱 촘촘해졌고 총성을 듣는 청각 세포는 뇌를 거치지도 않고 온몸의 근육으로 퍼졌다.

달리기 위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빨라질수록 빛도 점점 더 뚜렷해져 갔다.

세영과 재는 비공식 기록이 남자 단거리 선수 신기록을 뛰어넘던 날 다하는 거의 빛에 닿을 뻔했다. 세영은 자신이 잰 숫자를 의심했고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자 이내 경외감으로 다하를 쳐다보았다.


총성이 울리기 전 객석은 곧 열기와 광기로 뒤바뀔 극도의 차가움으로 덮여있었다. 런던 올림픽 경기장 트랙 위에 다른 선수와 나란히 서 자세를 취한 다하의 심장은 거의 멈춘 것처럼 느리게 뛰고 있었다. 피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고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오늘은 무엇인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혈류를 타고 온몸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었다.

‘탕’

마침내 총성이 울리고 트랙 위에 선수들은 달렸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뛰어나가는 다하와 비교하면 그들은 마치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승선의 테이프가 풀리고 모두 세계의 기념비적인 장면이 될 순간을 위해 경기장 좌석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러나 박수갈채의 주인공이어야 할 다하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하가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 빛이 짧게 반짝였던 것을 세영만이 보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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