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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약속의 교차로

by 설다람


한 무리의 소년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외길로 난 도로를 따라 사라졌다. 나는 그들의 소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방금 도착한 나는 이 모든 장면이 생경했다. 누군가 여기에 있었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망연히 그들이 사라진 도로를 보고 있었을 때 뒤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선 이런 일이 흔해요.”

뒤를 돌아보니 하얀 머리에 눈엔 붕대를 감은 소년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 말뜻을 헤아리지 못해 반문했다.

“어떤 일을 말하는 거지.”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이요.”

“네 친구들을 말하는 거니”

나는 소년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걔네들은 제 친구였을 때보다 제 친구가 아니었을 때가 훨씬 길었거든요. 음, 걔네들이 자신을 제 친구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를 한다면 제 친구라고 말할게요.”

붕대를 감은 소년은 소침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소년이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했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니?”

“그런 적은 없어요. 걔네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면 가게는 문을 닫거든요. 사실 어디를 가나 걔네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없어요. 그 친구들은 어느 곳에서나 반가운 존재가 아니거든요. 뭐, 그렇다고 걔네들이 나쁜 애들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같이 있으면 왠지 불편한 손님들. 그래서 가게들은 그 녀석들이 오기 전에 문을 닫는 거예요.”

“그럼 네 친구들은 언제쯤 돌아오는 거지?”

“그건 모르겠어요. ‘드뷔시’에 갔다가 카페 ‘창고’로 가겠죠? 그런 다음엔 ‘라르고’에 갔다가

쇳대‘에 들릴 거예요. 하지만 아마 으레 그랬던 것처럼 어디에도 가지 못 하고 돌아올 거예요. 그게 언제인지 모르지만 돌아온다는 건 확실해요. 언제나 그래 왔거든요.“

소년은 어딘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아저씨는 어디에 갔다가 여기에 오신 거죠?”

“나도 비슷해.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내가 폰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지. ‘뭐 기다리면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나는 근처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렸어. ‘어지러운 발자국의 함성’이라는 책이었어. 꽤 재밌는 책이었지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 다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가 오지 않는 거야. 내겐 시계도 없어서 약속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조차 없었어. 어쩔 수 없이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정하고 길을 돌아서 나왔지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집은 보이지 않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난 내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어. 난감했지. 누가 내 머리를 룰렛을 돌리듯 돌려댄 것 같았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여기에 도착하고 말았지. 여기가 혹시 약속의 교차로니?”

“네, 여기가 약속의 교차로예요.”

“넌 어디에서 온 거니?”

“전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어요.”

“그래?”

나는 소년에게 해줄 마땅한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어쭙잖은 말을 내뱉기 전에 소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여기가 처음인 사람은 항상 제게 그런 걸 묻곤 해요. 하지만 제겐 별 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저도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소년은 약간 불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감한 부분을 괜히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해졌다. 나는 소년에게서 고개를 돌려 언제쯤 이곳을 떠나야 하는지 고민했다.

무심결에 시계를 차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소매를 걷어 시계가 있어야할 손목을 쳐다보았다. 시계가 없는 왼쪽 손목은 왠지 평소보다 야위어 보였다. 지금쯤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조금 더 기다렸어야 했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너무도 성급하게 귀환을 결정한 건 아닐까. 아니다. 애초에 폰을 집에다 두고 나온 것부터 일이 틀어졌던 것이다. 친구가 오지 않은 것은 친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번에 웃옷 주머니를 뒤적거려 가지고 있지도 않은 폰을 찾아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도 나왔으면 좋으련만 하는 미련만이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눈에 붕대를 감은 소년은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와 침묵, 그리고 소년은 기다란 벤치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생각에 집중했다. 소년은 더욱 불안에 떨었고 침묵은 더욱 깊어졌고 나는 심각해졌다. 벤치는 길어졌다. 나와 소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고 고개를 돌려보니 소년의 모습은 하나 점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소년에게 거기 있냐고 소리쳐 물었다. 희미하게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벤치에서 일어나 소년에게로 걸어갔지만 벤치는 이미 너무도 길어져 있었다.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또 한 번 손목시계가 없는 손목을 쳐다보았다. 시계 대신 시간이 손목에 채워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목을 털어보았지만 그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소년이랑 무슨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 졌지만 벤치 끝의 소년은 내게로 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녀석은 불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고개를 저으며 약속 시간에 대한 미련을 접으려 했을 때 멀리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있냐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금 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맑고 투명하게 울리는 ‘지금 가고 있는 중’이라는 소리에 흠뻑 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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