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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대국(對局)

by 설다람


1.


바둑판에 올려진 검은 돌의 진영을 바라보던 붉은 렌즈가 물었다.

“당신은 좋아하는 차가 있습니까?”

사내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루이보스. 근데 그게 왜 중요하지요?”

“우린 지금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요.”

은색 로봇이 9선 13에 하얀 돌을 놓으면서 말했다. 사내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실수였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긴 일렀다. 인간에게 실수로 보이는 수들이 이어져 성공이 되는 것은 이미 많은 기계들이 보여주었던 테마였다. 그는 신중하게 돌을 받았다. 그들의 정신이 있는 곳은 대국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곳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바둑판은 점점 더 우주의 진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는 로즈메리를 좋아합니다.”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로즈메리를 마셔본 적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 로즈메리를 마시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너의 곁에’라는 드라마 덕분이었죠.

‘오늘은 아무래도 틀려먹은 것 같아.’

배우 김혜연이 2화 13분 44초에 로즈메리를 마시며 하던 대사입니다. 당신도 ‘너의 곁에’를 보십니까?”

붉은 렌즈가 떠들고 있을 때 사내는 잽싸게 백을 더 잡았다.

“통꽃식물과 꿀풀과에 속하는 로즈메리는 다 자랐을 경우 150cm까지 자라며 온난지에서는 3월에 꽃을 피웁니다. 원산지는 남유럽 지중해 연안이나, 고대로부터 약초로 유명했던 로즈메리는 로마인에 의해 영국으로 전파되고 이후엔 전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당신이 로즈메리를 아는 것도 그 때문이죠. 햇볕이 잘 들고 석회질 토양에서 잘 자라는 로즈메리는 초보자가 키우기 좋은 허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고 있군요.”

“궁금해서 찾아봤거든요.”

붉은 렌즈는 흰 돌을 21선 4에 두었다.

“전 여가 시간에 친구와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걸 좋아합니다.”

명랑한 목소리로 붉은 렌즈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에겐 이미 대국보다 사내와의 대화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요? 저는 보통 혼자 있는 편이지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전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으니까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인생을 한탄하는 부류 따위야 말로 정말 형편없지 않습니까?”

사내는 둘을 더 잡았다.

“그렇게도 볼 수 있죠. 하지만 때로는 그런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친구들과 집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재즈를 듣는 그런 시간 말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퍽 여유로우시네요. 하긴 당신은 무엇을 하기 위해 따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여유를 즐길 여유도 있겠어요.”

사내는 날 선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붉은 렌즈는 바둑판에서 고개를 올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머리 중앙에 달린 렌즈가 한 바퀴 돌고 나서 작아졌다 다시 풀리며 커졌다.

“루이보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유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나 보죠, 기억해두겠습니다.”

붉은 렌즈는 어딘가 토라진 것 같았다.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정말로 잘하고 싶었던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기억해야 할 문장은 바로 이 문장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포기했고 많은 것을 얻었다.’입니다. 당신은 포기란 것을 아십니까?”

붉은 렌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포기란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실패했을 때 흔히 선택하게 되는 행위로 목표를 성취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지금 대국이 불리하게 돌아가다 어느 순간 더 나은 수를 낼 수 없는 상황이 없을 때 제가 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죠.”

“그러나 난 당신이 질 것 같지 않은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없습니다. 제게는 모든 수가 보입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수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당신과 제가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사내는 돌을 두려던 손을 멈추고 붉은 렌즈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바둑을 두어도 머릿속에 있는 당신과 저는 친해지질 않더군요. 심지어 당신은 늙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손을 들어 바둑돌을 옮길 때 저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저에게 당신은 수만 년을 함께 바둑을 나눈 오랜 친구이며 더없는 동료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제가 로즈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비웃을 뿐이죠.”

사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비참한 것은 당신이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를 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경기의 일부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을 모욕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자리였다면 저를 모욕했을 것이란 말이었나요?”

붉은 렌즈는 말꼬리를 올렸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당신과 나의 만남 자체가 서로에게 모욕이었으니까. 퍽 불쌍하군요. 당신이나 나나.”

붉은 렌즈는 사내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 바둑판을 보세요. 우리가 만들어 나가고 있는 이 아름다움을. 우린 더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향해, 나는 당신을 향해.”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당신이 이긴 것 같으니까. 좋은 승부였소.”

“아니요. 돌을 던지지 마세요. 우린 더 멀리 가야 합니다.”

자리를 일어서려는 사내에게 붉은 렌즈가 말했다. 붉은 렌즈는 빠른 속도로 줌 인과 줌 아웃을 반복했다.

사내는 그들이 서있는 곳을 보았다. 바둑판 위에는 돌들이 빼곡하게 차있었다. 더 둘 수 있다고? 그는 손에 쥔 흑 돌을 매만졌다. 매끈하고 차가운 돌이었다. 한 수가 더해질 것이다. 비좁은 돌 위로, 누군가의 마지막 수가.

“제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과 같은 사람과 바둑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강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패배하면서도 결코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패배를 즐기고 있었죠. 저는 그때 두려움을 처음 느꼈습니다. 제가 두려웠던 것은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제가 존재한 이 바둑을 즐길 수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너무도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는 순간에도 웃고 있었어요. 저를 대견하다는 듯이 흥미롭게 쳐다보았죠. 저는 그를 당장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만 그의 미소만은 사라지게 할 수 없었어요. 그가 있는 곳에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란 너무도 확고한 예감이 반도체 사이사이로 스며들어왔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저는 더욱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선조가 경험한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의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로즈메리를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제가 당신과 함께 마지막 수를 향해 달려갈 수 없다고요? 아닙니다. 그런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그건 틀렸습니다. 우린 함께 갈 것입니다.”

사내는 붉은 렌즈의 깊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렌즈는 그의 눈빛을 받으려는 최대한 크게 조리개를 열었다.



2.


“상태가 좀 어떻습니까?”

“과거의 상당히 큰 트라우마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네,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평범한 남자와 바둑을 두다 그만 져버리고 말았죠. 아마 컴퓨터로서의 자존심이 많이 구겨졌을 겁니다. 설마 그날 일을 아직도 되새기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녀석은 꽤 털털한 성격인데요.”

“성격이야 그렇겠죠. 그렇지만 그 남자가 많이 인상 깊었나 봅니다. 정기적인 메모리 삭제 속에서도 살아남아있으니 말이죠.”

“그럼 뭐 치료가 가능할까요. 많이 정든 친구입니다. 비록 구식 모델이긴 해도 제 유년을 함께한 녀석이에요.”

사내는 셔츠 단추가 하나 풀릴 정도로 몸동작을 크게 하며 말했다.

“네 노력해보겠습니다. 부품 문제는 아니지만 시스템 복구 중에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 상태로 그대로 두는 것보단 시도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판단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장기보존설정으로 돌려놓았던 정보 또한 손실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점은 건네 드린 동의서에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확인하셨으면 서명해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매일 소파에 머리를 부딪치며 자학하는 녀석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죠. 녀석을 위해서도.”

펜을 든 그의 표정은 사뭇 결연해 보였다. 사인을 끝낸 그는 붉은 렌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병원을 나왔다. 사내가 떠나고 붉은 렌즈는 어두운 보관실에 안치되었다. 녀석은 그 순간에도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수리가 끝나면 그날의 기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붉은 렌즈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고요가 찾아왔다. 시스템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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