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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죽음 교육 과정

by 설다람

수천 개의 모니터가 있고 각종 수치를 나타내는 기기와 수많은 서류로 둘러싸인 공간에 ㅈ와 ㅍ가 의자에 앉아 분류번호 72113-81-67829331의 상태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봐 상실에 대한 민감성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아주 좋아 지난주에 기르던 개를 떠나보낸 후로 정상 궤도로 복귀시켰어 이대로라면 남은 376,680시간 동안 문제없을 것 같아! 불편한 행복에 대한 순응 수치는 좀 어때?”

“지난주에 기르던 개가 떠나버려서 수치가 많이 내려갔지만 이건 3년 후에 있을 편백나무숲 속 우연한 만남에서 두 배로 돌아올 테니 큰 상관은 없어. 다행히 이 친구는 모의 죽음 훈련에도 별다른 거부가 없는 것 같아.”

“이번이 몇 번째 모의 죽음 훈련이지?”

“어디 보자 태어난 이후로 970191569518306째 훈련이야 평균적으로 매일 밤 수면 중 421822421529722번씩 반복하고 있어, 훈련 중 에러는 31번, 실패 횟수는 120161874756567이고 훈련 완수 횟수는 850029694761708야.”

“순한 타입이군. 순조로워, 이 친구 참 마음에 들어! 황홀경 경험과 자잘한 패배,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좌절감, 그 외 기타 요소도 차근차근 맞춰 가면 되겠군.”

“너무 느긋하지 말라구! ㅈ! 저번에 그러다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상태로 분류번호 59413-44-13132372를 보내버린 거 기억 안 나? 그때 얼마나 우리가 혼났는지 벌써 잊은 거야? 위원회의 자비로운 판정으로 우린 여기에 배정 받았어. 종일 따분한 식물인간을 맡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내가 위원회에 연줄만 없었으면 우린 아마 그냥 앉아서 식물인간을 지켜보며 가만히 기계처럼 테스트기 버튼만 정해진 타이밍에 맞춰 눌러대고 있었을 거야.”

“ ㅍ 나의 파트너가 되어줘서 고마워. 너의 연줄과 너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해!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그러니 부디 나를 버리지는 말아줘 앞으로는 잘할게”

ㅈ은 킬킬대며 웃어대었다.

“여하튼 너무 풀어있지는 마. 교육 시간에 배웠잖아, 죽음 교육 첫 번째-”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알고 있어도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지만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

ㅈ는 ㅍ의 말을 받아 ‘죽음 교육 명심할 것’ 1장 1절을 외웠다.

“나는 네가 1등으로 죽음 교육 과정을 수료한 걸 믿고 너에게 파트너를 신청한 거야. 근데 설마 이런 날라리일 줄이야.”

“난 네가 날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쉽군. 잠깐 모의 죽음 훈련에서 녀석의 지난주에 죽은 세인트 버나드를 또 죽이고 있잖아.”

“응 그게 정석이지. 강한 상실 직후에 상실 경험을 중심으로 반복한다. 벌써 까먹은 거야?”

“음 이 부분은 빼줘.”

“안돼, 그렇게 하면 오늘 중 원래 궤도로 올린 상실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고 말 거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네가 멋대로 행동해서 징계받은 거잖아!”

ㅍ는 ㅈ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ㅈ는 여전히 느긋하고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이 세인트 버나드를 죽이는 과정을 모의 죽음 훈련에서 빼버렸다. ㅍ는 ㅈ의 행동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유가 뭐야?”

ㅍ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ㅈ을 쏘아대며 말했다.

“아무런 이유 없어.”

ㅈ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동정 때문이야? 훈련소에서 배운 ‘감정 배제의 원칙’ 기억 안 나? 넌 이 친구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는 거라고!”

“동정? 아냐, 아냐 전혀 아니지. 난 그저 보고 싶을 뿐이야. 이 친구가 ‘ ’에 대한 준비 없이 ‘ ’을 마주쳤을 때를. 얼마나 ‘ ’ 할까 참 가련하기도 해라.”

“이런 놈을 파트너로 선택한 내가 미쳤지. 이번 건이 끝나고 나면 상부에 제대로 보고할 거야. 정말이니까 각오해.”

ㅈ는 ㅍ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분류번호 72113-81-67829331의 모의 죽음 훈련 영상을 바라보았다. 수천 개의 모니터에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분류번호 72113-81-67829331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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