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편집실

실수

by 설다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실수와 미미한 오류는 몹시도 복잡한 이유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방금 전 김 과장에게 커피를 흘린 별 것 없는 실수의 까닭 역시 매우 복잡했다. 그녀, 김나윤 씨는 어떻게 해서 커피를 김 과장에게 흘리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린 먼저 그녀의 출생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것이 마땅한 출발점이겠지만 지면이 부족하므로 그녀의 실수의 골격을 이루는 대부분의 사실을 생략하고, 실수를 완성시킨 마지막 벽돌 한 장, 즉 그녀의 어제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어제, 김나윤 씨의 아침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고 그녀의 업무 수행 역시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 김나윤 씨는 작업(무슨 종류의 작업이었을까?)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영화가 그녀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게 된 것은 그녀가 정리하던 서류 첫 페이지 중 일곱 번째 줄에 적혀 있었던 ‘그 이유로 현재 우리는’라는 문장과 열세 번째 페이지 중 다섯 번째 줄에 적혀 있었던 ‘변할 수 없으며’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무의식 중에 두 구절의 친밀성을 확인하고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무수히 반복했다. 그 반복의 결과가 앞서 언급했던 영화, ‘ 너를 낯설게 만드는 열 가지 이유’,였다.

사실 그녀가 떠올렸던 것은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영화의 장면, 그것도 장면 속에 매우 사사로운 역할을 했던 한 송이의 꽃이 담긴 꽃병이었다. 탁한 하얀색에 끝에는 살짝 분홍빛이 감도는 그 한 송이의 꽃의 색깔을, 그녀는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꽃이 완전한 흰색도 완전한 분홍색도 아닌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 중에서 탁한 하얀 꽃잎은 그녀에게 오래된 연인을 떠올리는 것 같은 아련함마저 주었다. 그녀는 나중에 일이 끝나면 비슷한 꽃을 사서 집으로 돌아갈까‘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획이 그렇듯 그 계획은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쓸모없는 계획을 처리했다. 그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의 구매 의사는 김 과장이 부르는 소리에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잘려나가고 말았다.

문제는 그녀의 점심이었다. 그녀, 김나윤 씨는 친한 동료 이기쁨 씨와 한기조 씨와 함께 회사를 나와 근처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우거지 된장국을 주문했다. 한기조 씨는 최근에 나온 영화 ‘최근에 나온 영화’를 주말에 보러 가지 않겠냐고 이기쁨 씨에게 넌지시 물었지만 이기쁨 씨의 대답은 ‘선약이 있어서요.’였다. 김나윤 씨는 한기조 씨의 시도가 썩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재 이기쁨 씨에게는 연정의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경리부의 최 씨였다. 그는 훤칠한 키에 자상한 성격으로 많은 회사 여사원들의 연모의 대상이 되었다. 김나윤 씨는 최 씨에 한참 못 미치는 한기조 씨가 공연히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기조 씨의 일이 왠지 남 일처럼 여겨지지가 않았다. 그녀 또한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강렬한 연애, 결혼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까하는 정도의 바람은 있었다. 한기조 씨의 실패는 어느새 자신의 실패처럼 보였다. 바보 같은 녀석.

이 지극히 작은 사건은 김나윤 씨의 정렬되어있었던 생각 정리함을 쓰러뜨리기에 충분했다. 머릿속에서 종이 바람이 휘몰아쳤다. 점심 이후에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연애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흰머리에 홀로 늙어 TV를 끄고 잠드는 노인의 모습까지 다다랐다. 그녀는 망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실패해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서류 더미가 유일한 그녀의 상대였다. 그녀는 잠재적 결혼 대상자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 보았다. 대학 동기 정민이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그럼 민철이는? 민철이는 너무 바람기가 심하다. 녀석은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쪽에서도 그렇게 마뜩잖고. 홍식 선배? 아냐 이미 결혼했잖아. 혜린이가 저번에 소개해줬던 그 사람? 아냐 너무 고지식해. ㄱ은? ㄴ은?

없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키보드로 중국 진출 마케팅 기획안을 다듬으면서 글자와 글자 사이의 빈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녀의 배우자가 있었다. 희고 간결한 어조로 그녀에게 서둘러 기획안을 마무리해라고 그는 재촉했다.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뛰어넘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녀는 ‘이러한 관점에서’라는 짧은 구절을 적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결국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도 기획안을 써야 했다.

집에 돌아와 기획안을 끝낸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3시였다. 출근까지 4시간이 남았다. 4시간. 그녀는 침대에 누워 알람을 맞추었다. 4시간 뒤에 알람이 울리면 그녀는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야 한다. 침대에 누운 그녀는 마지막으로 미래의 배우자를 떠올려 보았다. 천장에 비친 그는 여전히 희고 건조한 목소리로 어서 잠에 들라고 말했다. 그녀, 김나윤 씨는 조소했다. 애초에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았잖아. 그녀는 잠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아침이었고 그녀는 눈을 뜬 채 만 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했다. 지하철에 올랐고 회사에 도착했다. 피곤을 씻어 내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뽑아서 자신의 자리로 향했고 그때 그녀는 김 과장에게 커피를 흘려버린 것이다. 김 과장은 그녀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결코 괜찮지 않았다. 사실 김 과장이 어떻게 반응했든 그건 그녀에게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커피를 흘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일진이 좋지 않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죽음 교육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