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착서

언제는 뭐 좋았나

by 설다람



픽가드가 상할 대로 상한 기타, 팝 필터, 앰프, 믹서. 케이블, 오디오 인터페이스, 용도를 알 수 없는 페달들, 그리고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 마이크.


서람이가 핀란드에 가면서 맡기고 간 물건들이었다. 분명히 6개월 뒤에 돌아온다고 했었다. 핀란드에서 운명의 짝을 만나기 전까진.


‘가지든지, 팔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퍽이나 고맙게도, 녀석은 사람 좋게 말했다.


나야, 음악이란 건 1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파는 쪽을 택했다. 살 때의 가격을 모르니, 시세보다 조금 낮은 가격에 파는 일에, 조금도 억울함을 느끼지 않았다. 모델명을 검색하면 어느 정도 알 수는 있겠지만, 그것마저 귀찮았다.

양파마켓에 올려두자마자, 광고 그대로, 구매 연락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삭줍기 나온 주민들 덕에 일주일 만에 반을 처리할 수 있었다. 나머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로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짬 처리로 용돈을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행히 양파 향에 취해, 손에 잡히는 대로 갖다 팔기 전에, 서람의 물건은 모두 해치웠다.


마이크 하나만 빼고.


녹슨 철제 곽 상장에 담겨 있는 직사각형 마이크는 사선으로 크게 흠집이 나있었다. 모델명은 DA-3113, 제조사는 베이비도넛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연히 모르는 회사였다. 동그란 로고 아래에는 Seo Ram라고 프린팅 되어 있었다.

찾아보니, 생산 연도가 1998년인 구닥다리에, 팔리던 시기에도 그리 비싼 물건은 아니었다. 어느 후기에는 입문자용으로 막 쓰기 좋은 평도 있었다. 깊은 스크래치가 난 이유도 알 만 했다.

아낄 필요가 없는 물건인 것이다. 서람이는 이것 외에도 쓸모없는 것들에게 소중한 자취 공간을 내주었다. 그날 그린 그림은 그날 버리는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연재하던 웹툰 원고를 종이 박스에 담아 분리수거함에 집어넣는 걸 보고, 서람이는 자기가 갖겠다고 했다.

‘못 줘.’

‘왜, 버릴 거라며.’

‘버릴 거니까, 못 준다고.’

서람이 원고를 잡았고, 내가 당겼다. 종이가 서람이 손이 베였고, 원고에 피가 떨어졌다. 황갈색 피였다. 내 눈은 붉은색을 보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왜 고집을 부려,’

미안함 마음에 성을 내자, 서람이는 말없이 가장자리가 피로 젖은 원고를 가져갔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있었다 해도, 소용없었다.


언젠가 서람이의 집에 갔을 때, 그때 원고를 편철해둔 것을 보았다. 조심히 빼내 녀석 모르게, 안에 다 사인을 해두었다. 혹시나 그 작품이 떠서, 얼룩 묻은 원고라도 값을 후하게 쳐줄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나름대로의 선심이었다.

아직도 무력한 선심이지만.



마이크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은, ‘영원한, 그 초식의 세계’ 1부를 마무리 짓고 나서였다. 재앙처럼 시작된, 초식 생명체들의 습격으로부터 숲을 지키는 잎사귀 술사들의 사투를 그린, 다소 따분한 소재의 만화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재 초기부터 악플이 넝쿨처럼 달렸다. 감사하게도 매번 욕을 오지게 먹는 덕분에 하차율은 낮았다. 욕도 봐야지 하니까. 물론 안 보고도 욕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여러모로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부류들이다.

담당 편집자는 늘 내 정신 상태를 걱정했다. 안색이 나쁘세요. 언제는 뭐 좋았나요. 제 뜻은 더 나쁘다고요.


그래, 언제는 뭐 좋았을까.


마이크 사겠다는 사람이 나온 것만으로도, 일상의 덮개가 살짝 뜬 기분이었다. 원고가 얼마나 하루를 갉아먹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주는 포인트였다.


철제 상자에서 마이크를 꺼내 전등에 비춰보았다. 혹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흠이 있나 보려고. 여전히 사용감이 정신 나간 상태였다. 올린 게시글을 보았다. 흉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찍은 사진들이 제대로 올라가 있었다.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이런 상태인지 몰랐다고 딴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언제 시간 되세요.]

[금요일 오후 7시요.]

[네, 그때 한성 역 1번 출구에서 뵙겠습니다.]

[네.]


감귤나비님과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물건만 넘기고 돌아올 거라 후드만 입고 나왔는데, 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리고 꼭 이럴 때면 온다는 사람이 늦곤 했다.

서람이를 저격하고 하는 말은 아니다. 녀석은 더 심하니까. 정시성은 고양이나 줘버린 탓에, 본인도 꽤나 손해보고 살았다. 정작 당사자는 손해에 무감각했지만, 옆에서 보는 입장으로서는, 속이 타들어 갔다.

고등학교 3년의 마침표를 찍을 논술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고사장 가는 데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서람인 집에서, 오디오 앰프로, 아침 기상곡을 마저 듣고 가겠다고 했다. 결과는 연착으로 시험장 입구도 가지 못했다.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 녀석은 마치 자식을 기다리던 부모처럼 나를 데리러 왔다. 보자마자 핀잔을 눈사태처럼 부었지만, 다음 기회가 있겠지라며, 녀석은 헤드폰을 꼈다.


다행히 감귤나비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15분밖에 안 늦었으니까.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차가 신나게 막히더라고요.”

어두운 청보라, 그러니까 아마도 체리색일, 스포츠카를 끌고 온 감귤나비님은 창을 내리고,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남자는, 항공점퍼에 검은 갈색, 실제로는 선홍빛일,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딱 봐도, 요란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네.”

당연히 차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한 나는, 감귤나비님이 자리에 앉아서 팔을 내미는 제스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손바닥을 흔들어 자신에게 넘기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때 뒤에서 차가 욕하듯 거칠게 경적을 뱉어댔다. 서람이 종종 소음 폭력이라 부르던 행위였다.

“어서 타요!”

감귤나비님이 조수석 문을 열고, 다그치듯 말했다. 마치 내가 이 모든 소란의 책임자라도 되는 듯.

분명히 부끄러워야 할 사람은 당신인데, 왜 내가 민망하냐고.

신경질적으로 삑삑거리는 소리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타버리고 말았다. 안전벨트를 채 매기도 전에, 차가 튀어나갔다. 제로백이 분명 5초 대일 것이다.


“미안하게 됐어.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감귤나비님이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돌리는 자세가 남달랐다.

이제 어딘가 차를 세워서 마이크를 볼 차례였다. 그런데 차는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근처에 차를 댈 생각이 없었는지, 어느새 차는 고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설마 납치? 나 따위를.

드라이브 기분이라도 내려는 듯, 감귤나비님은 오디오를 틀었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참다랑어 같은 사운드의 음악이 나왔다. 서람이가 한 음악과 비슷한 계열이었다. 이 장르를 뭐라 부르는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

중학생 때, 방과 후 활동으로 기타 수업을 서람과 함께 들었었다. 그때 녀석은 집에서 녹음해온 이른바 ‘자작곡’을 들려주었다. 씹다만 껌 같았다.

‘별로야?’

‘별로’라는 말도 사치스러울 듯.‘

서람이는 눈을 야렸다. 새끼, 자존심은 있어 가지구.

잘 치지도 못하면서 녀석은 꾸준했다. 불행히도 매일같이 연습해도 실력이 그다지 느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만 연습하거나, 그냥 재능이 없거나, 비효율적으로 연습하거나 셋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셋 다였을 수도 있겠다. 워낙 재주 없고, 성실하게 영악한 애니까.

“기타 소리가 특이하지?”

이제는 아예 아들한테 말하는 투였다.

“네, 별똥별 같은 느낌이네요.”

“이 톤 살린다고 고생 좀 했지.”

“감귤나비님이 치셨나요.”

“그래, 혈기 넘칠 때였지. 전체 사운드는 어떠니?”

“좋은 것 같아요.”

남자가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끝이야?”

그것 말고 뭘 더 말할 수 있을까.

감귤나비님의 전조등 같은 기타음이 사라지고, 여자 보컬이 나왔다. 지금까지 12분이 전주였구나. 여자 목소리는 탁한 구름 같았다. 낮게 깔리는 중저음을 듣고 있으니, 여름날 그늘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컬이 정말, 매력적이네요.”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감상평이 나왔다.

그 말에 감귤나비님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미소 지었다.

“장난 아니지.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까. 지금 보컬, 이 마이크로 녹음한 거야.”

그게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감귤나비님은 속삭이듯 말했다.

“계속 들어봐, 익숙한 목소리일 테니.”

과연 그랬다. 듣다 보니, 비슷한 음색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누구 목소리지? 어디서 들어봤는데.

도로와 음악은 강물을 따라 휘감으며 이어졌다. 늦은 저녁, 어둠이 물의 표면에 조각지어 담기는 광경이, 볼 만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줄 만한 드라이브 데이트 코스였다. 이 코스를 중고 물품 거래에서 만난 생판 모르는 남자와 함께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억울할 뿐이었다.

감귤나비님은 우리가 거래 중이었다는 사실을, 내게 13만 원을 입금해주고, 본인은 마이크를 챙기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원래 우리 밴드 보컬은 형편없었어. 한 곡을 부르고 나면, 걸레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불러댔거든. 그날도 그랬어. 그러니까. 보컬이 바뀌었던 날 말이야.”

감귤나비님은 히죽이며 말했다.

“우리 보컬이 고음을 내다, 위산을 토하고 쓰러졌다. 우리는 연주에 집중하느라 그것도 몰랐지. 보컬이 사라졌단 걸 알아챘을 때, 스테이지 아래에 있던 여자가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어.

노래라곤, 찬송가 말고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어 보이는 여자였지. 그런데, 웬걸. 그 여잔 맹수였어.”

곡이 차츰 고조되어갔다.

“첫눈에, 그래 첫눈에 반했어. 세기를 바꿀 퍼포먼스였거든. 오버하는 거 같지. 네가 봤으면, 내가 하는 말이 호들갑 떠는 게 아니란 걸 온몸으로 알 수 있었을 거야.

그걸 숨기고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바로 달려가, 같이하자고 했지. 같이 살자고도 했어.”

그 말을 하며, 감귤나비님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모르겠지만,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표정을 짓는 듯했다. 영화배우가 되려다 실패한 삼촌이 곧잘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특히 월드 스타로 성장한 대학 동기 이예리나와 썸 탔던 얘기를 할 때는, 익살에 아련함까지 묻어 나왔다.

그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졸업을 하고 보니, 내 신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교 탑 급인 애와 사귀었던 나날을 신주단지 모시듯 기억하고 있으니. 그때 참 좋았는데.

이 아저씨도 비슷한 기분이겠지.

“우린 죽여줬어. 이 싸구려 마이크로 명작이 탄생했던 건, 오직 네 엄마 덕이란다.”

“네?”

갑자기, 남의 엄마를 들먹여? 이건 못 참지.

“저기, 그만 말씀하시고, 차 세워서 물건 보신 다음에 거래 끝내죠.”

“그래, 고마워. 이 마이크를 올려줘서. 그 스크래치는 마지막 곡 녹음 끝내고 환호하다 떨어뜨려 생긴 거야. 잊을 수 없지. 얼마나 기뻤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SeoRam은 내가 새긴 거였지. ‘서쪽 바람’

그게 네 이름이 될 줄 누가 알았겠지. 하여간 네 엄마는 그 이름을 밀었어. 내가 이겼다면, 네 이름은 율리시스가 되었을 거야.”


그제야, 난 이 모든 게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람이 아버지는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죄송하지만, 아버님.”

“죄송할 게 뭐가 있니, 내가 더 미안하지.”

“그게 아니라,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서람이 아버지는 의아해했다.

“이거 제 친구 거에요. 아마도 아버님 아드님은 걔인 것 같은데...”

“걘 그럼 어딨어?”

“핀란드에요.”

“그럼 내 아내는?”

“반교동으로 이사 가셨어요.”

“그걸 왜 지금 말해!”

서람이 아버지가 버럭 했다. 성격 한번 화끈하시네.

아버님이 세계관 완성하시기 전까진, 저도 상황 파악이 안 됐어요.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변했고, 서람이 아버지가 차를 가까운 대로변에 세웠다. 13만 원을 송금하고, 감귤나비님, 아니 서람이 아버지는 그대로 사라졌다. 차 안에서 울리던 음악이 향기처럼 남아있었다.


서람이에게 전화로 네 아버지를 만났다고 알려주었다. 나누었던 이야기도 그대로 전해주었다. 녀석이 들었어야 할 말이니까.

서람이 본인도 엄마가 락 밴드 보컬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밴드명이랑 곡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나도 몰랐다. 음악을 틀어준 건 감귤나비님이니.

서람이가 알려드렸는지, 서람이 어머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혹시 서람이 아버지 연락처를 알 수 있겠냐고. 나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감귤나비님은 이미 탈퇴한 상태였다. 그 소식을 전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한 숨소리는, 묵직했다.


[작가님, 작가님! 2부 첫 화부터 반응이 장난 아니에요. 밤길 조심하세요!]


서람아, 행복하렴.

현실은 내가 지킬게.

귀국하면,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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