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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편집숍을 준비하고 있어 함께 벤치마킹 차, 홍대에 있는 공간들을 둘러보러 갔다. 모던하면서도 촌스러운 느낌이 나는, 다 부서져 나가는 경성 카페 느낌의 편집숍이 컨셉이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홍대에 그런 곳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설사 있다고 해도, 모던하면서도 촌스러운 느낌으로 망해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인은 컨셉에 대해 렌치로 조일 대로 조인 듯한 풀리지 않는 확신이 있었다.
HK몰의 팝업 매장과 모바일 프렌즈 숍을 들렀다. 특별히 대단한 건 없어 보였다. 고무장갑으로 만든 변신 로봇 피규어를 파는 가게가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이게 제일 나은 것 같다고 의견을 말했지만 지인 취향에는 맞지 않은 듯했다.
결국 벤치마킹 투어는 도심 속 나들이로 끝났다. 해마 라면을 저녁으로 먹고 지인과 헤어졌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다, 오랜만에 나온 홍대인데 옷이라도 사가기로 결정했다. 홍대는 과거 명동이 그랬듯, SPA 브랜드의 격전지가 되어 있었고, 나는 어딘가 얼빠진 차림으로 베이직하면서도 트렌디한 옷을 찾으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마음에 드는 옷은 없었다. 정확히는 나를 예쁘게 입어줄 옷은 없었다, 예쁜 옷도 나를 입으면 못난 옷이 되어 있었다. 옷이 보내주는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 세상에, 옷 따위한테도 차이다니. 상심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천 쪼가리 하나에 비참해지는 꼴을 피팅룸에서 보기 힘겨워 모두 반납하고 매장을 나왔다.
날이 저물었고 딱히 할 일도 없어 지하철로 향했다. 몇 걸음 더 가니 지면이 흔들릴 정도로 큰 베이스 소리가 들리는 건물이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은 고개를 돌리게 할 만큼 우렁찼다. P_POP_P라는 간판이 입구에 걸려 있었는데, 원래 건물에 달린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면도기 회사가 팝업 매장으로 주류 시음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컨셉은 항공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위스키, 와인, 맥주, 사케를 마시러 다니는 것이었다. 면도기와 술, 항공기가 하나로 묶일 줄은 몰랐지만, 사람들이 줄지어 입장 대기하는 걸 보니 홍보 효과는 있어 보였다.
직업병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음악 때문이지 어느새 앱을 설치하고 회원 가입을 완료해 직원에게 인증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세계 지도와 함께 직원은 토큰을 하나 주었다. 술 한 잔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교환권이었다.
나야 술을 마시지 않으니, 맥주 코너로 가 무알콜 맥주를 주문했다. 다양한 무알콜 맥주가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핑따오 피치밖에 없었다. 핑따오 피치는 정확히 3%로 부족할 때의 맛이었다. 경제적인 맛이라, 나쁘진 않았다.
얼음이 담긴 복숭아맛 논알콜 맥주를 한 손에 든 채로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주류 별 매대는 주황색 라인의 간판으로 통일성은 지키면서도 국가 특징이 드러나는 소품을 이용해, 여행이라는 컨셉을 잘 살리고 있었다.
특히 거대한 화선지에 한국, 중국, 일본의 화풍이 교차되며 이어지는 산수도는 작품이었다. -물론 AI가 그린 것일 테지만, 그 아래에는 동동주, 고량주, 사케가 사이좋게 놓여 있었다. 알코올에는 국경도 다툼도 슬픔도 없다더니. 대학에서 트랜스내셔널리즘 강의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싶었다.
알코올이 오른 탓인지-논알콜이지만 0.00001%가 함유되어 있었다, 음악이 더 흥겹게 들렸다. 메인 스테이지로 가니 중앙에 비니를 쓴 디제이가 민첩하게 손을 움직이며 풍부한 바이브를 만들었다. 이런 디에이의 열정에 비해 관중들의 움직임은 해초와 비슷했다. 입식 원형 테이블에서 감자튀김을 먹는 커플만 게처럼 두 팔을 올려 깔딱깔딱 댈 뿐, 누구 하나 율동을 보이진 않았다.
세계 정상급 디제이가 거리 파티에서 디제잉을 하는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일말의 미동도 하지 않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아래에는 저기 있는 사람들은 송장이냐 라는 댓글이 있었다. 여기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상태였다. 물론 나도 송장 무리에 속해 있어 할 말은 없었다.
컵에는 얼음만 남았고, 물을 채우러 가장 가까운 멕시코로 갔다. 멕시코 매대는 오프렌다스로 꾸며져 있었다. 직원은 해골 분장을 하고 제대로 망자의 날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물을 받고 마시려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내 손을 잡았다. 그 바람에 물을 반쯤 바닥에 쏟고 말았다. 나는 적당히 불쾌한 티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혀를 길게 내밀고 사라졌다. 나쁜 기분이 들었다. 모욕당한 것 때문이 아니라, 여자의 혀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길었기 때문이었다.
남은 물을 모두 마시고 컵을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나가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손가락으로 중앙홀 왼쪽 끝을 가리켰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출구로 다가갔다. 출구로 가는 쪽 벽면에는 커다란 거울이 설치된 포토존이 있었다. 그래도 온 김에 인스타에 올린 사진은 찍어야지.
폰을 꺼내 거울을 향해 카메라를 켰다. 그러나 카메라 속으로 보이는 건 이곳이 아니었다. 내 뒤로 모든 집기와 장비, 매대가 불타고 있었고, 두 팔을 들고 있던 커플은 머리가 파인 채로 다리를 들고 있었다. 시체처럼 시들시들했던 사람들이 난봉꾼처럼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다. 디제이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머리에 촉수가 달린 거대한 도마뱀이 되어 있었다.
와 AR 기술이 이 정도였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건 혁신이었다. 오늘 벤치마킹 최대 수확은 이거다.
각이 잘 나왔다. 사람들이 사지를 던지며 주고받았고, 어떤 사람 등에서는 날개가 튀어나오더니 잠자리가 되어 공중에 날아올랐다. 잘 꾸며진 광란이 잘 드러나게 각을 옮기며 여러 장 찍었다. 인스타에 포스팅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AR은 현장에 적용되어 있었다.
아까 내 손목을 잡았던 여자가 멀리서 혀를 내게로 뻗었다. 뱀처럼 튀어나온 혀가 내 목을 물었다. 필사적으로 혀를 꼬집어 간신히 풀려났다. 음악 소리는 더욱 커져갔고, 말 그대로 심장이 터질 정도로 강한 베이스음이 몸을 양쪽에서 후려쳤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출구라고 표시된 곳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았지만 닫혀있었다. 다른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디제이가 촉수를 돌리며 그루브를 타다 기다란 촉수를 모아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사람, 아니 사람이었던 것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백팩을 방패처럼 들고는 미식축구를 하듯 사이사이로 피해 달렸다. 불길이 몸에 옮겨 붙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만약 지옥이 존재하고, 지옥이 불구덩이라면, 죽어도 지옥에 가선 안 된다. 그러나 지옥은 여기에 있었다.
입식 테이블을 모두 쓰러뜨려 녀석들의 진로를 막았다. 몇몇이 걸려 넘어져 굴렀다. 그 틈을 타 입구를 찾아서 돌아갔다. 하지만 입구로 가는 진입로는 이미 거대한 구더기들로 막혀 있었다.
옷이 모두 불타고 맨살이 다 드러났다. 검게 탄 팔다리에선 연기가 가시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서있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포기하지 말자.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건물이 소방법을 따르고 있다면 어딘가엔 소화기가 있을 것이다. 기억해 내자. 쉽게 보이는 위치에 있었을 거야. 그래야 비상시 쓸 수 있으니까. 눈을 뜨고 샅샅이 살폈다. 그때 디제이 박스 아래에 놓인 소화기가 보였다.
그것들을 향해 가방에 있던 소지품을 하나씩 던지면서, 디제이 박스로 뛰었다. 다이빙하듯 소화기 앞에서 엎어졌다. 소화기를 품에 끌어안고 안전핀을 풀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호스로 분말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불길은 그대로였고, 그것들은 달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은 나도 참을 수 없었다. 소화기를 디제이 머리로 던졌다. 촉수 도마뱀 머리는 푸딩처럼 으깨졌다. 디제이 박스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 머리 없는 육체에게는 주먹을 거미 다리를 한 몸뚱이에게는 발길질을 주었다.
고통이 희열이 되어가고 있었다. 눈알이 녹아 사라질 때까지 나는 팔다리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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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의사가 있었다. 병원이었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진짜 깨져 있을 수도 있었다.
“제가 살아 있나요. 그,”
나는 망설이다 말했다.
“지옥불이랑, 괴물들은...해치웠나요?”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드시지. 혈중 알코올 농도가 거의 0.4%였어요. 거의 죽다 살아나신 겁니다.”
“무슨 소리세요. 전 논알콜이었어요!”
작작 좀 해라 이것아 하는 표정으로 의사가 나를 바라보았다.
몇 가지 반응 테스트를 하고 나서 의사는 떠났다. 팔도 다리도 멀쩡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0.00001%로 사람이 실신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화장실로 가 세수라도 해야 정신이 깰 것 같았다. 일어나 수액 걸이를 끌고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 간호사 한 명이 있었다.
“혹시 화장실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간호사가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촉수가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