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착서

배드 와이 파이 커넥션

by 설다람

오후 7시 35분 대기실에 입장했다. 국선주선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사소한 말에 꼬투리 잡지 말 것, 반박하지 말 것, 아는 주제가 나왔다고 흥분해서 떠들지 말 것.

옷은 국선주선사가 이미 정해주었다. 흰 옥스퍼드 와이셔츠에 진청 색 자켓이었다. 스크린 미팅이니, 실제론 낡아 해진 진청 셔츠를 입고 있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이 열렸고, 앞에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무테를 쓴 여자가 나타났다. 국선주선사가 머리는 매만져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머리가 엉망이죠.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요.”

“괜찮아요. 완전히 까먹지는 않으셨잖아요.”

“보니까, 전화가 10통이나 와있더라고요. 그나저나 성함이...”

“유시오입니다.”

“네, 저는 이규랑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규랑은 정신이 다소 정리되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많이 바쁘셨나 봐요.”

“아뇨, 그냥. 왜 가끔 이유 없이 멍해질 때 있잖아요. 그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깼어요.”

“그럴 때 있죠. 저도 종종 그래요. 마감할 때나, 감사 준비할 때.”

“그럼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제일 중요한 건데.”

“큰일 안 나게 해야죠.”

진지하게 한 말인데, 규랑이 피식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처음이세요? 아, 제 말은 선 자리가 처음이냐는 뜻이었어요.”

“네.”

“저도예요.”

규랑은 말을 하고는, 눈을 멀리 돌렸다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사실 이번이 세 번째예요. 하자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둘러댔네요.”

사소한 고백을 하며, 규랑이 웃었다.

“하자 없어 보여요.”

“정말요?”

“정말요.”

규랑은 내 대답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헝클어진 머리 때문인지, 웃음기 가득한 표정 때문인지, 청량한 목소리 때문인지, 규랑은 사람을 편하게 했다.

“그럼 우리 한 번 더 만나요.”

규랑이 제안했다.

“그러죠. 어디서 뵐까요.”

“이번 주 목요일 저녁 8시 타이랄 어때요?”

“타이랄 온라인 말씀하신 건가요?”

타이랄 온라인은 17년 전에 출시되었던 오픈 월드 게임이었다. 높은 자유도로 게임의 혁신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리뉴얼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었다.

“네, 혹시 계정 없으세요?”

“아뇨, 있어요. 깨워야겠지만.”

마지막으로 타이랄에 접속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30분의 대화 시간이 모두 지났고, 창이 전환되었다. 스크린 앞에는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 대신 국선주선사가 떠있었다.


“고생 많았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저기 게임 아이디랑 만날 맵 위치를 안 알려줬는데. 어떻게 하죠.”

“걱정 마세요. 시오님 연락처를 전해드렸어요. 진짜 만나고 싶으면 연락할 거예요.”

국선주선사가 안심시켜주었다.

“기대는 하지 마세요.”

국선주선사가 희망을 처리해주었다.


출산장려법에 따라 서른이 넘으면 관계취약자로 분류되어, 주선 시스템에 등록되게 되어 있다. 시스템에 등록된 이후 관계연결회사를 통해 결합 시도를 하지 않으면, 고독세를 내게 된다. 관계연결회사의 주선비를 감당할 여유도 없고, 고독세를 낼 여유도 없는 사람들은, 국가주선 서비스를 이용한다.


지난 미팅이 국선주선사가 잡아준 첫 선 자리였다.


혼자인 사람은 승진에서도 불리했다.

넋 놓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월초라 처리할 건이 많지는 않았다. 심리라는 게, 모두 같아서 월말이 되어서야 여러 부서에서 폭탄 던지듯 전표를 투척한다.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신규 프로젝트 회계 처리 개선 방안이라도 검토하는 것이 낫다. 미리 미리 해두지 않으면, 결국 터지는 건 담당자니까.

내달부터 들어가는 리브랜딩 사업의 예산 계획을 보았다. 개발비에 비해 홍보비 비중이 지나치게 작았다. TF에 들어간 개발자들의 입김이 센 탓일 것이다. 이걸 다툼 없이, 소란 없이, 아쉬운 소리 안 나오게 변경해야 한다. 프로젝트 성공 여부는 TF에 달렸지만, 프로젝트의 실패 원인이 잘못된 예산 편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침부터 숫자를 눈으로 씹다 보니, 깜빡일 때, 뻐끔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눈이 건조해져 있었다. 피로감이 안구를 감싸 쥔 것 같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지만, 피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졸렸다. 나는 일어나 휴게실로 갔다. 탄산수를 머리에 붓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그러진 않겠지만, 그러면 조금은 상쾌해지지 않을까.


안에는 후배 로예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나를 본 로예가 반갑게 인사하고는 소파에 나를 앉혔다. 잘못 걸렸다. 로예에게 잡히면, 한 시간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로예에게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날은 하루를 버릴 각오를 해야 했다.


“리스트 등록까지 2년 남았다고, 경고장 날아온 거 있죠. 완전 킹받아가지고.”

주먹을 불끈 쥐고 로예가 성냈다.

“안 그래도 돈 없는데. 주선 비용까지 내게 생겼어요. 이러다 국선에 잡혀서 떨거지 처리 당하는 거 아닌가, 위기감이 장.난. 아니에요. 둘이 갖다 붙이면 저출생이 해결될 거라는 멍청한 생각은 대체 누가한 건지...”

신나게 열을 내던 로예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고 나를 보았다.

“선배가 떨거지란 얘기는 결코, 결코, 아니었어요.”

“알아, 계속해. 난 괜찮아.”

로예는 다시 입에 시동을 걸었다.

“이 나이 때면 급해진다더니, 남 말 아니게 됐네.

아니 글쎄 작년에, 고등학교 친구에, 대학교 동아리 선배, 전 직장 동료, 심지어 사촌 오빠한테서도 연락 왔다니까요?”

“사촌 오빠는 좀 심한데”

“뭐 자기는 양아들이니 피 문제는 상관 말라나. 미친 거지.”

“그게 피 문제인가.”

“그쵸. 역시 시오 선배는 말이 통해.”

“이건 내가 아니라도, 똑같은 생각일 걸.”

“여튼 망했어요.”

울상을 지으며, 로예가 커피를 들이켰다. 풍부한 표정에, 솔직한 표현, 가식 없는 태도, 로예의 이런 모습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했다. 미움 사기 좋은 행동을 해도, 밉지 않게 보이는 게 로예의 특별한 매력이었다.

로예의 전 남친이 새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얘기까지 듣고 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게도 더 피곤해졌지만, 조금은 가벼워졌다.

점심까지 그럭저럭 버텼고, 오후도 그럭저럭 버텼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빈 캔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시차를 쓴 로예가 먼저 퇴근하면서 응원을 해주고 갔다. 건성으로 파이팅을 외치자, 로예가 아예 손을 잡고 양팔을 들어 올렸다. 주변에서 킬킬거렸고, 나도 킬킬거렸다. 사탕껍질을 비비는 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여섯 시 정각, 컴퓨터 전원을 끄려는 것을 잘못해서 다시 시작을 누르고 말았다.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컴퓨터가 다시 부팅되는 것을 기다렸다. 업데이트가 걸렸다. 강제 종료하고 싶었지만, 벽돌이 되면, 답이 없었다. 97%에 두 시간 동안 걸려있다가 7분 뒤에 나머지 3%가 채워졌다. 컴퓨터를 제대로 끄고 나니, 사무실엔 혼자만 남아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로, 야근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헛헛해졌다.



집에 도착해 눕자,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맵 좌표와 아이디가 적힌 메시지였다.



12년 만에 타이랄로의 귀환이었다. 어렸을 때 지은 닉네임은 ‘우리중에최약체’였다. 계정을 삭제하고 다시 만들고 싶었지만, 계정을 삭제하면 10일 뒤에 재생성할 수 있었다. 한창 플레이할 때도, 그다지 열의가 대단하지는 않았던 터라 레벨도 낮았다. 옷도 가죽 갑옷으로 말 그대로 줘도 안 입는 아이템이었다. 현실에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에 게임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는데, 이쪽은 현실이건, 게임이건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마을을 벗어나, 약속 장소인 슈의 시계탑으로 갔다. 맵에서도 버려진 곳이라, 플레이어도, 몹도, NPC도 없었다.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라,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 던지는 것도 재밌었다. 근처에 있는 바위란 바위는 모두 한 번씩 들어보았다. 마지막 바위를 들고 점프하고 있을 때, 사자머리에 대도를 든 남자와 마주쳤다.

“일찍 오셨네요.”

규랑의 목소리였다. 닉네임은 ‘예영이가 최고야’였다. 그 쪽도 퍽 어린 시절에 지은 이름 같았다.

남자는 여유롭게 턱수염을 매만졌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안 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적응할 겸 일찍 들어왔어요.”

“돌도 던지시고요.”

“다 보고 계셨어요?”

사자머리는 칼을 휘두르며 춤을 췄다. 나도 따라 지팡이를 흔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뜻은 통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규랑이 키득거렸다. 사자머리는 불꽃을 토해내는 기술도 보여주었다. 한 차례 쇼가 끝나고 규랑이 말했다.

“아지마 폭포에 가보셨어요? 페나다 골짜기에 있어요.”

“아뇨, 아달 지역을 넘어가 본 적이 없어요. 가는 길에 몹들이 강해서.”

“그럼 뒤에 붙어서 따라와요. 가보면 놀랄 걸요.”

쾌활하게 규랑이 말했다.

라이딩 용으로 산악 들소 두 마리를 잡아다, 평야를 달리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지나고 길이 좁아졌다. 골렘이 나타났지만, 규랑의 사자머리에게는 발차기거리도 되지 않았다. 포효만으로도 골렘들은 기절 상태에 빠졌다.

바위산의 보스인 암석 드래곤을 물리치고, 마침내 아지마 폭포가 있는 절벽에 다다랐다.

아지마 폭포는, 장관이었다. 급류는 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날개를 치듯 천천히 회오리를 그리며 낙하했다. 폭우 치는 듯한 시원한 물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돌았다.

“어때요!”

규랑이 소리쳤다.

“아름답네요.”

“제가 장난 아니라고 했죠. 이리 와봐요. 더 멋진 거 보여줄게요.”

규랑이 내 손을 잡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쳤다.

“들어가면 위험해요.”

“시오 씨, 이 게임에서 제일 위험한 게 뭔지 아세요?”

“폭포?”

“아까 쓰러뜨렸던 암석 드래곤이에요. 물에 빠진다고, 안 죽어요.”

“그래도...”

내가 머뭇거리자 사자머리가 머리를 저었다. 그러다 똑바로 쳐다보더니, 냅다 끌어안고는 물로 뛰어들었다.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차갑지도 않았고, 물을 먹지도 않았다. 다시 숨을 쉬었고, 눈을 떴다.

나는 사자머리의 손을 잡고 회오리 한 가운데에 떠있었다. 폭포의 중심에서 보는 세계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현실에선 상상도 불가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키스해요!”

규랑이 외쳤다.

“네?”

“어차피 게임이에요. 이런 순간에 키스말고 할 게 더 있어요?”

“그래도...”

이번에도 규랑은 내 의견을 무시하고 얼굴을 들이댔다. 덥수룩한 수염의 사자머리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키스라기보다는 그냥 입술을 물어뜯는 것처럼 보였다.

긴 비행이 끝나고, 땅에 내려와 나무에 기대어 누웠다.

“커피 마실래요. 진짜 카페에서.”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커피가 안 받거든요. 차 마셔요. 분위기 좋은 데 알아요.”

사람을 들었다 놨다하기는. 규랑은 자신의 말이 지닌 권력을 아는 듯, 모르는 듯했다.


토요일 오전 10시로 시간을 정했다. 장소는 이따 문자로 주소를 찍어 보내주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스킬로 쇼를 하고, 게임에서 나왔다.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물을 마시고, 매트리스에 앉았을 때, 국선주선사에게서 페이스콜이 걸려왔다.

“시그널이 있었나요.”

교수가 수련의에게 환자상태를 묻는 것 같은 말투였다.

“키스는 했어요.”

자극하려는 말이었는데도, 국선주선사는 미동도 없었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급발진하지 마세요.”

“달리는 법도 몰라요.”

나름 농담이었는데, 국선주선사는 웃지도 않았다. 두 번째 만남 가이드라인을 설명하고 콜을 종료했다.




토요일 오전 9시 30분, 약속 시간보다 30분 이르게 카페에 도착했다. 거대한 한옥을 개량해 만든 전통 찻집이었다. 먼저 도착해서 안쪽에 앉아 있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저도 안쪽에 있어요’라고 답이 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복을 입은 여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스크린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먼저 갈아입었어요.”

카페는 장인이 지은 ‘진짜’ 한복을 손님에게 대여해줬다. 한복을 입고 인증샷을 남기는 건, 이 집을 방문하는 목적 중에 하나였다.

”저도 갈아입어야 하나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럼 이대로 입고 있을게요. 기다리셔야 하잖아요.”

”원래 그렇게 다른 사람 신경 써요?”

규랑은 나의 태도가 배려가 아니란 것을 한 번에 눈치챘다.

”폐 끼치기 싫으니까요.”

“져랑 비슷하네요.”

규랑이 웃었다.


계피차와 약과를 주문했다. 약과는 달지 않아 좋았다.

“여기선 저승새를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규랑이 마당 앞 나무에 앉은 하얀 새를 가리켰다. 종이로 접은 것처럼 각진 형태였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있었다. 날개 뼈가 2단으로 구부러져 있어, 비행 중에 배를 뒤집을 수 있다고 했다. 목이 꺾인 채로 하늘을 보고 나는 모습은 기괴했다. 저승새는 별명이고, 진짜 이름은

“메밀지빠귀네요.”

슬그머니 패를 내밀 듯, 아는 척을 해보았다.

“호밀지빠귀예요.”

규랑이 정정했다.

호밀지빠귀가 자리에서 날아올라 멀리로 사라졌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특유의 자세로 몸을 뒤트는 것이 보였다.

“박사 논문 주제가 호밀지빠귀를 활용해 고등동물 단성생식 유전자 알고리즘을 밝히는 거였어요. 덕분에 지겹게 봤죠. 가금류를 제외하고, 조류 중에서 단성생식을 하는 개체는 흔치 않아요. 그것도 유전적으로 건강한 후손을 생산해내는 사례로는 조류뿐만 아니라 척추동물에서도 거의 유일했죠.”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내용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특별한 호밀지빠귀였어요. 논문 심사가 끝날 때까지 죽지 않고 견뎌줬거든요. 그 다음해 땅에 묻어줬어요. 아마 저승가면 문 앞에서 저를 부리로 찍어 죽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규랑은 머리로 까딱이며 찍는 시늉을 했다.

자신의 동족 얘기를 하는 걸 눈치 챘는지, 저승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영상에서 보았던 그대로 목이 꺾인 채로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규랑은 저승새가 모습을 감춘 뒤에서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존재의 잔상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앞에서 계피차를 한 모금하고 있는 인간 종에게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무시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지우려 애썼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규랑은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태도에는 일말의 악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계피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약과를 집어먹을 수 있었다.

천천히 시간의 태엽을 감았다. 혼자로서 함께 있었지만, 함께라서 혼자일 수 있었다. 규랑도 같은 공기 속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지는,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테두리를 건드리지 않은 채로도, 충분히 아늑했다.


차를 마시고 나서, 밖으로 나와 개울을 따라 산책했다. 검은 티셔츠에 검은 슬랙스로 갈아입은 규랑은 엠티 온 대학생처럼 보였다. 나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아침에 면도를 해도 오후면 까슬까슬하게 털이 자랐다. 시간도 공평하진 않았다.

개울물이 맑아 바닥에 깔리 자갈들이 보였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규랑이 자리에 앉아 물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한쪽 어깨가 젖을 정도로 깊게 들어갔다. 잠시 후 규랑이 가재 한 마리를 쥐고 꺼냈다. 가재는 힘차게 집게를 흔들었다. 가재를 규랑이 내 코앞에 들이밀었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재밌는지, 규랑이 가재를 더 들이댔다. 가재 더듬이가 뺨을 그었을 때, 신음을 냈다. 그제야 규랑은 가재를 물에 다시 풀어주었다.

산책로 오른편에는 흑버드나무가 길과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흑버드나무 가지에는 녹색 눈이 박혀 있어, 낮에도 야광빛을 냈다. 빛이 강할수록 오래된 것이라, 규랑이 알려주었다. 자세히 보니, 비슷한 크기의 나무들이어도 밝기에 차이가 있었다. 중세 조선에서는 흑버드나무의 눈을 가지고 발전을 시도했다고 했다. ‘하지만 학자들이 알아낸 건,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선 적어도 삼만 개의 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어요. 그 정도면 그냥 장작을 태우는 게 효율적이죠.’


데이트는 12시 정각에 끝났다. 규랑이 맞춰둔 알람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12시면 연구노트를 정리하는 게 원래의 루틴이라고 했다. 루틴을 오늘 일정에서 삭제해두었다면 더 있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규랑은 아쉬워했다. 그러면 그냥 조금 더 같이 있으면 되지 않냐고 묻자, 이미 알아버린 이상 루틴을 배반할 수 없다고 했다. 내게는 더 이상 회유할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다음엔 전시 보러가요. 찾아둔 게 있어요!”

규랑은 루틴을 지키기 위해, 황급히 뛰어가다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네!”

나도 크게 소리쳐 대답했다.

이미 등을 보이고 다시 달려가는 규랑에게 그 소리는 작게 들렸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국선주선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잘 되어가고 계세요.”

“친해진 것 같아요. 남자로 보는 것 같진 않지만.”

“시오 씨는 어때요.”

“저는 남자로 보여요. 사자머리에 호쾌한 남자”


국선주선사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세 번째 만남까지 약속을 잡았다는 것을 확인한 주선자는 내가 진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규랑의 성향 정보를 정리해서 주겠다고 했다. 연결이 결렬될 시에는 오류 보고서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주선자는 줄 수는 있지만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거라고 주의를 줬다.


‘현재에 집중하세요.’


경고 같은 조언을 던지고 국선주선사는 통화를 종료했다.



친구와 잡았던 점심 약속이 파투나 오리알이 된 로예가 나를 밀면집으로 끌고 갔다. 로예가 팀에 들어왔을 때, 피해야 할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판이었다. 로예는 피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선배, 제 거 드셔보실래요.”

대답도 하지 않지 않았는데, 로예는 이미 비빔면을 앞접시에 덜어내 건넸다. 고맙다고 말하고 한 젓가락 했다. 야무진 맛이었다.

“저는요? 설마, 안 덜어주시는 거예요?”

로예가 요리조리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앞접시에 밀면을 덜어내 주었다. 배와 고기도 함께 올려주었다. 배를 한 입하고, 국물을 맛본 로예가 ‘캬’소리를 냈다. 광고를 찍어도 될 정도로 맛깔 나는 감탄사였다. 로예가 나를 빤히 보았다.

“왜, 바꿔죠?”

“아뇨, 노트에 적어둬야겠어요. 이 집은 무조건 밀면으로 가는 걸로.”

“밀면집인데, 당연하지.”

“그래도 꼭 오면 다른 거 먹고 싶어지더라니까요.”

교환한 앞접시를 비우고, 이제 각자의 그릇으로 돌아갔다.

“어때요. 처음 받으셨다는 분. 아직도 그 분이랑 진행 중이에요?”

“만나고는 있어.”

“그 애매한 태도는 뭐에요. 잘 안 맞아요?

“안 맞진 않아.”

로예는 내 태도가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간신배처럼 간보고 떠보고 막 그러시는 거 아니죠?”

“선 자리가 그런 거 하는 자리 아냐?”

“그래도 간보고 떠보면 기분 재수 없어요. 그러다 진짜 혼쭐나는 수가 있어요.”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정인지, 로예가 부르르 떨었다.

“내가 그러겠냐.”

“그럴 것 같으니까 일러주는 거예요!”

“고맙다.”

나는 주제를 돌리고 싶어, 새로 나온 영화 얘기를 꺼냈다. 로예는 영화광이었다. 제목만 말했는데, 주연 배우들의 필모와 감독의 연애사까지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로예는 엔터 쪽으로 갔어야 했다. 회계팀에 있기엔 너무 활기차고, 역동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함께 회사 주변을 걸었다. 날이 아릴 정도로 화창했다. 수업 째고 소풍가기 좋은 날씨라고 로예가 말했다. 그 뒤에는 수업 째고 세주도에 갔다가 조난당한 이야기가 나왔다. 로예는 안 겪어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로예는 내 인생에 훈수를 둬주고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밋밋하면 안 된다는 둥, 활동적인 취미가 있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둥, 로예 말만 들으면 내 삶은 정상레일에서 이탈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선이 끊긴 길을 달리고 있었다,


“너 지금 저주하는 거지.”

“이렇게 진심 어린 저주 들어본 적 있으세요.”

“원래 저주는 다 진심으로 하는 거야.”

그 말에 로예가 깔깔거렸다. 진심으로 한 얘기였는데. 진심이 아닌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 하늘 진짜 예뻐요.]

규랑이 투명한 하늘 사진을 보내왔다.

폰을 들고 하늘 사진을 찍었다.

[여기 하늘도 예뻐요.]


로예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뭐예요, 선배. 그 분? 뭐야 잘 되고 있잖아요.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뭐가 억울해.”

“저만 폐차 직전의 차 신세로 남겨졌잖아요.”

“사귀는 거 아냐.”

“그래도요. 아 그때 진짜 ‘시혁거세 프로젝트’가 성공했어야 하는데!”

로예가 기지개를 켜며 외쳤다.

‘시혁거세 프로젝트는 생물학적 부모 없는 아이를 대량 생산하는 연구로, 극단적인 순혈주의 과학자들이 제안한 인구절벽 해결책이었다.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유전자적으로 ‘전형적인 서국인’-그들이 판단하기에-을 생산해내자는 것이 옳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극우 중에 극우였던 전 정권은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시켰다. 희극적이게도 프로젝트는 세계 최초 생물학적 부모 없는 ‘S-어린이’를 성과로 공개하면서 무너졌다.

공개 직후 실험은 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았지만, 사실 확인 결과, 연구 총 책임자의 혼외자식으로 밝혀졌다. 아이는 숨겨야겠고, 결과는 내야하는 이중 압박 상황에 벌어진 촌극이었다. 결국 야심찼던 ‘시혁거세 프로젝트’는 조롱거리가 되어, 사회에서 퇴장 당했다. 다음 선거에서 정권 교체에 힘을 실어줬다는 점에서, 진보 세력은 ‘시혁거세 프로젝트’를 성공적인 ‘극우거세(去勢) 프로젝트’였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정부는 적극적인 이민자 수용 정책을 펼쳤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짝짓기 문화를 확산시켰다. 국선주선 프로그램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어느 쪽이든 완벽한 얼간이도 없었고, 특출난 똑똑이도 없었다.


“그러다 매장당하는 수가 있어. 조심해.”

가끔 선 넘는 로예에게 주의를 주었다. 검고 어두운 피부의 로예는 유서 깊은 홍풍 양 씨 가문의 장녀로 혈통 상으로, 순혈 중의 순혈이었다.

“선배 앞이니까 얘기한 거죠.”

“회사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안심하면 안 돼.”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않는 건지. 로예는 팔을 휘저으며 온몸으로 홀로됨의 억울함을 표현했다.




“이제 조금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이러다 친구 되시겠어요.”

국선주선사가 이번 만남 전에 해준 코치였다. 확실히 유의미한 진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친구가 된다 해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친구가 되어서 규랑이 다른 사람과 함께 웃고, 사랑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씁쓸한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국립 중앙 박물관 입구에서 규랑을 만나 함께 들어갔다. 박물관에선 백라 시대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번 전시의 메인은 7년 만에 다시 공개된 ‘현무도’였다. 가로 폭이 2미터에 달하는 옷칠을 한 편백나무 판에 자개를 박아 그린 상상의 동물 현무의 모습은 웅장하기로 유명했다.

현무도가 있는 전시실로 가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꽉 차 있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미는 것을 한 팔로 막아, 규랑에게 닿지 않도록 했다. 국선주선사에게 받은 가르침 중 하나였다. 느린 속도지만, 앞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현무도 앞에 설 수 있었다.

“빛나는 암석 드래곤 같아요.”

규랑이 평가했다.

“말씀하니까, 그렇게 보이네요.”

칠흑 속에서도 빛나는 백라인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칭송받는 작품이지만, 불경스럽게도 규랑이 ‘빛나는 암석 드래곤’이라고 한 순간부터 보스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무도 지나자, 백라 시대 의복이 전시된 공간이 나왔다. 규랑은 백라 평민 여성복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유리창에 코를 박을 듯이 가까이 붙어 옷을 쳐다보고 있는 규랑을 옆에서 힐끔 훔쳐보았다. 이 사람은 집중할 때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구나.

중앙에는 미니어처로 밀랍 인형들이 농사를 짓고 베틀을 짜고 있었다.

“신기하지 않아요. 역사가 지금으로 오기까지, 이런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났다는 게.”

규랑이 작은 인간들을 보며 말했다.

“배아의 관점에서 성체는 DNA를 복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에요. 목적은 끝없는 존속이죠. 특별한 의도 없이, 순수한 진화적 프로세스에 의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거죠.”

“그렇다고 해도 성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자체는 무시할 수 없는 ‘진짜’이지 않나요.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해도.”

난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납득이 안 가서, 혼자였나 봐요.”

시선을 돌려, 규랑은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전시실로 가자 알처럼 생긴 거대한 원형의 미디어 조형물이 있었다. 하얀빛이 감도는 알 표면에는 한라의 시조왕 시혁거세의 탄생설화를 설명하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신화에서 알에서 태어난 존재들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탄생의 수단으로 인간을 사용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자연 천생란적(自然天生卵的) 갈래와 인위 인생란적(人爲人生卵的) 갈래로 나뉩니다.

시혁거세 설화는 전형적인 자연 천생란적 유형으로, 빛과 함께 강에서 떠오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어...”

곱게 울리는 안내 음성을 듣던 규랑이 알 표면을 크게 쓸었다. 그러자 알의 색이 출렁이며 은은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알의 꼭대기까지 색이 변한 뒤, 나도 알 표면을 크게 쓸어보았다. 이번에는 은은한 연두색으로 변했다.

“8만분의 1로 양막이 터지지 않고 분만되는 경우가 있어요. 양막 안에서 아이가 웅크린 모습을 보면, 말 그대로 알 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게 기원이 되었을 거예요.”

규랑이 알을 한 번 더 쓸며 말했다.

“처음 알았네요. 보신 적 있으신가 봐요.”

“지겹게 봤죠. ‘시혁거세 프로젝트’ 연구진이었어요.”


규랑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의식한 규랑은 목각 인형처럼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죠. 성공했다면, 더 웃겼을 거예요. 애초에 로봇 노동을 인간화하겠다는 전략 자체가 기만이죠. 그렇지 않아요? 꼭 더 많이 태어나야 미래가 보장되는 건 아니잖아요.”

“순혈 자체도 웃기도 않은 일이죠.”

나는 조금 날카롭게 말했다. 달라진 목소리에 규랑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순혈주의자로 보여요?”

“세상에 순혈주의자로 보이는 사람은 없어요. 순혈주의자로 보는 사람이 있는 거죠.”

진지하게 말했는데, 규랑은 손톱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혼혈이에요.”

옆머리를 올려 반쪽으로 잘린 귀를 보여주며 규랑이 말했다. 반쪽으로 잘린 귀는 표호인의 상징이었다. 이 나라에서 표호인은 환영 받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규랑의 피부가 지나치게 하얗다는 걸 깨달았다.

“실망했어요?”

놀리는 말투로 규랑이 물었다.

“아뇨, 전혀 몰랐어요.”

“뭐, 언젠가는 알려드려야 할 사실이죠.”

규랑은 머리를 다시 내렸다.

“시혁거세 프로젝트에 진지하게 참여할 생각은 없었어요. 일이 그렇게 흘러갈 줄도 몰랐고. 박사 때 쓴 논문 때문에, 거의 납치되다시피 끌려갔었어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도망칠 준비부터 하고 있었어요. 완전 비열하죠. 게다가 순혈인종 생산 프로젝트에, 표호계 혼혈이라? 제가 생각해도 코미디예요. 뭐, 이것도 변명 같긴 하네요. 실패해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수치스러워서 못 살았을 것 같아요.”

심각한 얘기를 경쾌하게 말했다.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했더라도, 규랑이 정말로 수치를 느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문득 손을 잡고 싶어졌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뻗은 손을 다시 내렸다.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다 드러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규랑을 더 즐겁게 만드는 것 같아, 약이 올랐다.

박물관을 나와서 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먼저 왔지만, 모른 척했다. 얼마 시간이 지난 뒤, 규랑의 버스가 도착했고,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했다. 차에 오르기 전 규랑이 내 귀에 입을 맞추었다.


그날 국선주선사는 내게 선택을 요구했다.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내 답변이었다. 가위바위보도 삼세판이 국룰입니다. 국선주선사는 데이터에 의거해 조언해주었다. 국선주선사가 창에 띄운 그래프를 보니, 세 번 이상 만남을 이어간 후 결정한 경우 성사율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잘 맞지 않는 관계를 어정쩡하게 연장시키다, 늘어진 고무줄을 끊어내듯 쳐진 그대로 헤어지는 것이다. 그럴 바에, 얼른 접고 새로운 사람을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규랑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전까지는, 기다리고 싶었다. 국선주선사가 호감 정보 정도는 전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그마저도 거절했다. 규랑이 마지막으로 속삭였던 말이 귓바퀴를 타고 울렸다.



출근길에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바쁜 모양이었다. 문득 지금 당장 연락이 끊어진다고 해도 불평할 수 없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등이 서늘해졌다. 겨우 세 번의 만남이었는데도, 깊숙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온 것 같았다. 통증 같은 사람이었다.


늦은 오후 국선주선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 계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시오 씨. 잠깐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아, 저희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뭐 어쩔 수 없죠. 오류 보고서는 받을 수 있을까요. 개선할 부분은 개선해야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 이규랑 씨가 사망했습니다.”

비현실적인 소식이었다.

“네?”

잠시 배려 차원에서 거절을 에둘러 표현한 건 아닌가라고 생각해보았다. 무용했다. 배려 차원에서 산 사람을 죽은 사람 취급할 정도로, 국가 시스템은 악랄하지 않았다. 규랑의 죽음은 사실이었다.

“다음 선 자리를 알아봐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 소리가 나옵니까!”

분노가 일었다.

“저로서도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인(死因)도, 장례일도 알 수 없나요.”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말씀해주신 정보는 전달드릴 수 없습니다.”

“아, 진짜”

휴대폰을 내던지고 싶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숨을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진정이 안 되어서.”

“이해합니다. 그럼 마음을 추스르길 바랍니다.”

통화는 종료되었다.


규랑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원이 꺼져있었다.


복도에서 격한 목소리로 통화하는 걸 들었는지, 사람들이 내 눈치를 살폈다. 퇴근 시각이 될 때까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책상을 정리하고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누떼들처럼 출입구로 밀려가는 직원들에 끼여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사망이라니.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사망했다니. 사고사일 테다. 어떤 사고가 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세상 밖으로 걷어찰 수 있을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몸이 기우뚱 거렸고, 균형을 잡으러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무릎을 짚었을 때, 뒤에서 나를 불렀다.

“선배 괜찮으세요?”

놀란 목소리로 로예가 물었다.

“잠시 발을 헛디뎠어.”

“지하철 타고 가시죠? 같이 가요.”

로예의 귀가 수단이 버스란 걸 알고 있었지만, 사양할 여유가 없었다.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열차는 막 떠나가고 있었다.

“전 하행이에요. 선배는 어디로 가세요?“

“장매역”

“같이 타면 되겠네.”

로예의 목소리에선 걱정스러운 기운이 빠져 있었다. 곧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답을 주지 않으면, 헤어지기 전까지, 이 시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잘 안 됐어. 그것뿐이야.”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로예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런 얘기를 남에게 해야, 마음이 풀리는 거예요’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듯했다.

“주제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초점이 빗나간 위로가 성가시게 들렸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열이 심하게 났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딱 오해하기 좋겠네. 자가진단 앱을 켜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1분 뒤 검사가 완료되고, 개미고양이열병으로 확진되었다. 팀장에게 진단서를 메시지로 보내고, 병가를 신청했다. 1일을 신청했는데, 진단 결과가 심각해 보였는지 3일을 주었다. 확실히 증세는 심했다.

오후에 약이 배달되지 않았더라면, 저녁까지 침대에 박혀서, 숨을 껄떡대고 있었을 것이다. 뇌와 두개골 사이가 벌어져 고개를 돌릴 때마다 덜컹이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보리팝콘을 꺼내 우유에 부어 먹었다.

뺑소니처럼 찾아온 휴일에, 헐거워진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디오를 켜 시티팝을 듣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타이랄 ost도 있었다.

국선 주선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한 번 더 걸려왔다. 이번에는 차단했다.


혹시 규량은 알바였던 게 아닐까, 진짜 있었던 사람은 맞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머리가 멍멍해서 그런지 의심은 신뢰보다 더 많은 설득력을 가졌다.

나는 일어나 인터넷에 ‘시혁거세 프로젝트’를 검색했다. 마루 위키에서 사태를 정리한 문서가 있었다. 문서에는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주요 미디어의 태도, 관련자들의 행보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중에는 ‘S-어린이’의 근황을 다룬 내용도 있었다.

참고 자료에는 프로젝트 보고서 요약본이 올려져 있었다. 파일 내용은 특별한 게 없었다. 서론만 읽고 가장 마지막 장으로 갔다. 마지막 장에는 참여 연구자들의 이름과 메일 주소가 있었다. 규랑의 이름도 그곳에 있었다. 이규랑 선임 연구원. 뒤에 붙은 직함이 어색하게 보였다.


진짜 있었네. 이런 사람.


규랑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전히 전원이 꺼져있었다.


다시 연구진 목록을 보았다. 이 중에 한 사람은 부고 소식을 듣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장례식장이 어딘지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메일을 보내야하지. 이름을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가다 ‘해예영’이란 이름에서 멈췄다.

‘예영이가_최고야’, 규랑의 타이랄 아이디 속 예영이가 이 ‘해예영’이겠지. 주소를 카피했다. 수신인은 정해졌다.

이제 내용을 정해야 했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웠고, 목적을 설명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국선주선사를 통해서 세 번 만난 사이인데, 어제 갑자기 부고 소식을 들었지만, 개인정보보호법 상 문제로 장례식장을 전달 받지 못해, 어느 곳에서 장례가 치러지는지 알고자 연락드립니다.’

몇 번을 고쳐보았지만 딱,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메일 보내고 나서, 10분 뒤 답신이 왔다.


[Re: 안녕하십니까 전 시혁거세 프로젝트 연구원 이규랑 씨 부고 관련으로 연락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유시오 씨.


저 역시 관련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부고 소식도 선생님의 메일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혹시나 규랑 씨를 뵙게 된다면


제 안부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을 담아


해예영 드림


보낸 메시지에 맞춰 자동으로 작성된 응답메일이었다. 더 이상의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게 확실해졌다.


태블릿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탕! 탕! 탕!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유시오 씨 계세요?”

제법 깊게 잠들어 있었는지. 말소리가 뇌에 닿는 시간이 지연되고 있었다. 폰을 두드려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였다. 이 시간에 누가. 하지만 한 가지 더 눈에 들어왔다. 일자가 하루가 더 지나있었다. 하루를 완전히 수면상태로 보낸 것이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부유하듯 문으로 걸어갔다.

“유시오 씨 계세요?”

한 번 더 나를 불렀다. 누구세요라고 반문하려던 찰나에 문이 벌컥 열렸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중키의 여자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경찰 조끼를 입고 있었고, 여자는 국선주선사였다.

“살아계셨군요. 다행이에요. 이틀 째 연락이 안 되어서 왔어요.”

국선주선사가 안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종 미성사 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게다가 이번은 단순 거절이 아니니...”

“확인되셨으면,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경찰은 성가신 일을 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생사 확인도 국선주선 서비스에 포함되나요?”

다소 비아냥거리듯 말을 하고는, 나의 인성을 그동안 과대평가해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사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마치 떼쓰는 아이를 달래러 온 유치원 교사 같은 움직임이었다. 빠르지만, 부드러운, 그러나 양보는 없는.

“국선주선사지만, 저 역시 상대가 없는 상태입니다. 초조한 마음이실 거라는 건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일 불안함으로 잠들곤 합니다. 얼마 전에도 한 사람에게 거절당했습니다. 오류 보고서에는 ‘잠재적 관계 상대자로서 매력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남자와 대화하는 동안 무척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상대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사람 좋은 사람’에서 ‘잠재적 관계 상대자’로 넘어가는 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사실을 받아들일 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설교 같은 조언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난 슬슬 제대로 된 짜증을 압축하기 시작했다.

“주선자법 제26조 비밀유지의무에 따라,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규랑 씨의 진심을요.”

“진심이요?”

“네, 규랑 씨의 진심을 아시게 되면, 위로가 되실 겁니다.”

국선주선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지금 상황에.”

“지금 상황이니 위로가 될 수 있어요.”

국선주선사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듣겠다고 했다.

“규랑 씨는 사설 관계연결회사도 이용 중이었습니다. 최종 선택을 그 쪽에서 찾은 분으로 했고요. 그러니 불의의 사고로 좋은 인연을 놓쳤다는 착각으로 힘들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잘 되지 않을 인연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쪽 최종 선택을 당하신 ‘그 분’이십니다. 유시오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가여운 사람처럼 굴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도 아니거니와,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요.”

처음으로 국선주선사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악의 없는 위로였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요즘 세상에 개미고양이열병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릴 떼 불주사 안 맞았어요? 얼굴 좀 봐 새하얗게 떠서. 완전 환자네 환자.”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로예가 혀로 날갯짓하며 달라붙었다. 손을 저어 물리치려 했지만, 로예는 아랑곳 않고, 깐죽거렸다.

“로예야, 한 마디만 해도 될까.”

“그럼요. 두 마디, 세 마디도 하세요!”

“고맙다.”

시비 걸 수 없는 ‘한 마디’에 로예가 할 말을 잃었다. 알아서 로예는 자신의 자리로 가 업무를 시작했다.

내년부터는 너도 이 리그에 들어오는 거야. 나는 로예가 입단하기 전에 퇴출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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