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착서

2030 고려장

by 설다람

고령자 연명의료 특별관리에 관한 법률 (약칭: 고령자연명의료법)


제1장 총칙


제1조(목적)


이 법은 75세 이상 고령자의 무의미한 연명의료중단을 의무화함으로써 의료자원의 효율적 분배 및 국가 의료비 절감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연명의료"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행하여지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의료행위를 말한다.


"임종과정"이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고령자"란 75세 이상인 사람을 말한다.


"의료기관"이란 「의료법」 제3조에 따른 의료기관을 말한다.


"의료판단인공지능(이하 '의료인공지능'이라 한다)"이란 범용 인공지능 모델을 기반으로 의학 데이터, 임상 지식 및 의료 관련 규정에 특화 학습된 인공지능 시스템으로서, 보건복지부장관이 인증한 시스템을 말한다.



제3조(기본원칙)


① 75세 이상 고령자의 무의미한 연명의료는 환자 본인 또는 가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중단되어야 한다.
② 국가 의료자원의 효율적 분배와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의료체계 구축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2030 고려장', 2030년 10월 2일에 시행된 고령자연명의료법의 속칭이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 유지 권리를 타인에 의해 박탈당하는 비판 때문에, 법안 통과에 2년이나 걸렸다. 인구 피라미드 윗머리를 쳐내버리는, 사회적 학살이라고 연령 차별 반대주의자들이 외쳤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어느 정치색을 지니든, 어떤 성적 지향성을 가지든, 노년층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이 만개했다. 기왕 하는 거 희생 가능성 따지지 말고 시원하게 밀어버리자. 연령 기준이 10년은 더 낮춰야 하는 거 아니냐. 동년배들 다 저승 갈 동안 뭐 하고 있나.ㅋㅋ.
연령 차별 반대주의자들은 내세울 밈도 없었다.
게다가 연명 치료로 경제적 폐허로 변해가고 있는 가정에서는 시급한 법 시행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구성원을 경제적인 이유로 증오하게 될 때, 그만큼 비참하게 없다고, 고령자연명의료법 지지자는 말했다.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의 산소호흡기를 떼어, 살인죄로 형을 살다 나온 사람이었다. 인터뷰를 하며, 남자는 눈물을 흘렸다.
의사 단체도 연명 치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점에서 고령자연명의료법을 찬성했다.


연령차별 반대주의자 리더가 십 대에 집단 학교 폭력에 가담했던 과거가 밝혀지면서, 쟁점은 흐려졌고, 힘을 잃은 연령차별 반대주의 집단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법안이 통과된 후, 법안을 발의한 정치인의 X에 지게 사진이 올라왔다.



병상에 누운 채로 아버지는 75번째 생일을 맞았다. 서연은 동생 규연이 보낸 병원비를 확인했다. 간신히 숨 쉴 정도의 금액이었다. 3년 전 아버지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뇌경색이었다. 병원으로 곧바로 이송되었으나, 가망이 없었다. 전대뇌동맥, 중대뇌동맥, 후대뇌동맥이 모두 폐색 되었고, 혈전용해술을 시행했지만, 의식 수준은 더 낮아졌다. 감압적 개두술까지 시도했지만 대뇌 반구의 경색과 부종으로 뇌간 반사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의사가 말했다. 무호흡 테스트에서 자발적 호흡이 확인되지 않았다. 뇌사였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침대에 누운 아버지를 보며, 서연과 규연은 생각했다.


'오늘 얼마 나올까.'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3개월이 지나고 나서 둘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돈을 빨아들이는 배수구가 되리라는 사실을.
서연이 성년 후견인을 신청하고, 남아 있는 재산을 확인했다. 연금 생활자인 아버지가 모아둔 재산은 5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을 쓰고, 남은 돈을 모두 저축한 것이었다. 평생을 빠듯하게 살다 떠났다. 실로 낭비 없는 삶이었다.


"간병, 언니가 할래? 돈은 내가 댈게."
규연이 서연에게 말했다. 요양원에 보낼 여유도, 간병인을 쓸 여유도 없었다. 미혼에 무직인 서연이 간병을 맡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서연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과거 서연은 고령자연명의료법을 반대했던 활동가였다. 대학교 필수 봉사 학점을 채우기 위해 들어갔던 비영리 단체 '행동하는 생명'에서 서연은 자신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만났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애착이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학력도, 피부색도, 성별도 모두 달랐다. 서연이 속한 의대와는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맞추고 있었다. 의대에는 다들 비슷비슷한 사람들밖에 없었다. 엇나가더라도, 남들의 시선에서는 직각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1학년의 반을 봉사 활동으로 보낸 서연은 의대를 중퇴하고 '행동하는 생명'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반대는 격렬했다.


"너, 의사 가운 입히려고 주말도 안 쉬고 일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적어도 상의는 했어야지."
"누가 쉬지 마라고 했어요? 저도 아빠 때문에 10년을 하루 3시간만 자면서 공부했어요."
"활동 같은 건 의사 되어서도 할 수 있어.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것도 있잖아? 우선 의사부터 되자. 서연아."
서연은 답하지 않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생을 바친 자신이었다.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그때 마침 수업을 마친 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니, 어디 가?"
천성이 밝은 규연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밖에."
단면 같은 목소리로 답하고, 서연은 집을 나갔다.


시작은 좋았다. 사방이 적이었고, 해치우는 맛이 났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할 일은 차고 넘쳤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승부욕을 자극했다. 행동하는 생명의 영향력을 커져갔고, 핵심운영진들의 미디어 노출도 잦아졌다. 사회적 실천은 힙한 것이라는 테마 아래에, 인플루언서들도 유입되었다. 그 중에서도 서연은 돋보였다. 그 사실이 서연의 자존감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었다. 정치적 효능감으로, 가슴이 차올랐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모두가 응원해 주리라 믿었다. 고령자연명의료법 발의를 제지하는 서명 운동을 펼쳤을 때도, 의심의 여지없이 후원자들을 믿었다.
그러나 고령자연명의료법 입법과의 충돌은 행동하는 생명을 침몰시키는 암초가 되었다. 동물 학대 방지 캠페인에는 기꺼이 돈을 내면서, 고령자연명의료법 반대 캠페인에는 '좋아요'도 누르지 않았다. 열성 후원자들로부터도 시큰둥한 반응을 얻자, 내부에서 고령자연명의료법은 자연적인 사회적 합의이니, 순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건 비겁한 변명이라고, 서연이 일갈했다. 행동하는 생명이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연령층을 확대해야 한다. 행동하는 생명의 주 구성원도, 소비층도 모두 2030들이었다. 이러한 단체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전 연령층을 아우르게 되면, 행동하는 생명은 규모 있는 단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법안을 발의한 의원은 차기 당대표 후보로 떠오르는 신예였다. 지금 이겨두어야, 밀리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서연은 연령차별 반대주의자 협회와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결정은 브랜딩 실패와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연령차별 반대주의자의 연령대는 상대적으로 높았고, 행동하는 생명의 골수팬들은 새롭게 편입된 공동체가 덜 힙하게 여겨졌다. 심하게는, 물을 흐리는 것으로 여겼다. 성숙한 시민 의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성숙한 시민 의식을 지닌 '나'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얼마 안 가 후원을 취소했다. 빠르게 단체의 정체성이 무너져 내려갔지만, 고령자연명의료법을 찬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법안 통과를 저지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그때가 되면, 행동하는 생명은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고, 더 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2년 간의 사투는 고령자연명의료법 지지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행동하는 생명은 그 이후로 인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시시하고 지루한 단체의 숨을 다시 불어넣기 위해 서연은 필사적으로 활동했지만, 인력은 점점 줄었고, 마지막에는 세 사람만이 사무실에 남았다. 갈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지 못해, 남은 사람들이었다. 이제 '행동하는 생명'은 이름만 있는 단체였고, 하는 일은 무엇도 없었다. 행동하는 생명 공식 X 계정에 마지막 공지글을 올렸다. 그동안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은 없었다. 산소호흡기를 떼는 기분으로, 서연은 계정을 닫았다.



학업에 대한 압력은 모두 언니가 받고 있었기에, 규연은 '기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투자한 것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밝은 성격은 무관심에서 피어난 잡초였다. 그런 성격을 원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서연이 사라지고 나서, 규연은 자신의 웃음이 불필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세상엔 피젯 큐브처럼 불필요해서 유용한 것이 있다. 예비 열쇠 같은 생각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아버지에겐 등록금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스무 살의 시작을 빚과 함께 한 규연은 과 생활도,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았다. 학교와 집, 아르바이트의 트라이앵글을 울리며, 학업을 이어 나갔다. 쉬기 위해 방학이 기다려진 게 아니라, 목돈을 모을 수 있기에 방학이 기다려졌다. 늘 같은 차림의 규연을 보고 동기들은 일찍이 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규연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연애도, 여행도 포기했다. 그래야 하루라도 빠르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다. 4년을 지탱해준 믿음이었다. 그러나 취업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첫 번째 하반기에 100곳을 지원했고, 20곳에서 서류를 합격했다. 10곳의 인적성 검사를 통과하고, 면접을 보았다. 최종 면접까지 간 곳은 2곳이었고, 모두 탈락했다.


'하...'


도서관 종료 시간을 알리는 노래가 울렸다. 들을 때마다 야구장 경기 종료 음악이 떠오르는 곡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눈을 감았다.


이번 게임 힘겹게 진행됩니다. 규연 선수 타율 좋지 않습니다. 집중을 못하는 것 같아요. 언제는 뭐 잘하는 게 있었나요. 원래 선발도 아니지 않습니까.
해설가와 캐스터가 농담조로 주고받는다.
한 번 더 공이 온다.
깡.
파울이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네요. 누가 보면 파울을 많이 쳐야 이기는 게임인 줄 알겠어요. 만약 그랬다면, 규연 선수 MVP를 놓치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재능이네요.
방망이를 들었다 놓는다.


'핫!'
규연은 기합을 넣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떤 힘도 나지 않으니까.


그다음 해 상반기 실적은 더 나빴다. 조바심이 났다. 이대로 하반기마저 다 떨어지면, 1년 공백기가 생긴다. 그동안 무엇을 했냐는 질문의 대답이 궁색해질 것이다. 준비한 경험과의 시간적 거리가 멀어지면 설득력은 약해진다. 눈을 낮춰서 어디라도 들어가서 경력을 쌓아야 할까. 이미 충분히 눈을 낮췄는데. 다음 하반기엔 취업 사이트 평점이 1점 대만 아니면 가겠다고 스스로와 강제적 합의했다. 그리고 2.1점 회사에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합의 내용을 이행했다. 취업한 회사는 대기업 식품 브랜드의 OEM 생산을 주로 하는 회사로, 간편 식품과 소스류를 생산했다. 더운 날에는 덥고, 추운 날에는 추운 근무 환경에, 업계 최저 수준의 급여를 줬다. 유일한 장점은 종종 제품을 선물로 나눠준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자조적으로 이건 식품이 아니라 '식량'이라고 했다. 규연에게는 '식량'이 맞았다.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었다. 주된 업무는 납품 계약 관리였는데,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직 준비를 했지만, 야근이 잦아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나서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2년 뒤에 거래처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신생아 특례 대출을 받기 위해 낳은 아이였다.


대출과 둘의 전재산을 합쳐, 소형 아파트를 매수했다. 영혼을 끌어모았기에, 상환액을 빼고 나면 발 디딜 틈도 없는 돈만 남았다.



탁, 점심을 먹고 침대에 기대어 졸던 서연이 폰을 떨어뜨렸다. 액정이 깨졌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금 간 곳도 없었다. 폰 화면에는 오늘 날씨가 떠 있었다. 오늘 오후 맑음 최고 기온은 19도 최저 기온은 11도였다. 아버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령자연명의료법 반대 근거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깨어난 사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아내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9년 만에 깨어난 남편, 오토바이 사고로 의식을 잃은 아들을 5년 동안 간호한 끝에 눈을 뜨게 한 어머니, 식물인간이 된 예비 신부를 떠나지 않고 병실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랑이 입을 맞추었을 때 눈을 뜬 신부.
모두 기적이었다. 그리고 기적의 주인공이 인생의 말년을 병실에서 보내게 된 노인인 경우는 드물었다. 노화에 따른 생명력의 차이가 원인일 것이다. 마치 신도 늙은 자를 보살필 의지가 없는 듯했다.
졸음을 쫓기 위해 마른세수를 하던 서연을 간호사가 불렀다. 간호사는 사무실로 서연을 데려가 연명의료중단 계획서를 작성하게 했다. 말이 작성이지 사실은 통보였다. 법에도 계획서 작성 없이 단순 통지로도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서류를 작성하는 것은 형식적인 인도주의 때문이었다. 행정 업무는 인간성의 골격으로 남아 있었다. 서류 작성을 마무리하고 나와 서연은 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직접 얼굴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 번 더 걸어보려다, 메시지를 보내었다.
'조금 전에 연명의료중단 계획서 작성했어. 내일 처리한다는데, 안 바쁘면 오늘 와서 얼굴 보여드리지 않을래.'
답장은 퇴근 시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잘 됐네. 그러고 싶은데 연장 근무가 있어. 급한 건이라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해서 못 갈 것 같아.'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무리하지 말고.'
'응, 고마워. 언니도.'
올 수 없다는 규연의 말에 서연은 도덕적인 불편함을 느꼈다.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활동가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도 활발히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더라면, 병원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병시중을 하면서, 효심이 생긴 건 아닐 테다. 공간적 유대로 인한 죄책감이 더 적절해 보였다. 왜곡된 죄책감으로도 동생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정신을 헹구고 싶었다. 석션으로 아버지의 목을 청소해주고 나서, 7층에 마련된 휴게 공간으로 갔다. 평소라면 사지 않을 것이지만, 오늘은 마지막이니 자판기에서 제로 소다를 뽑았다. 캔뚜껑을 살며시 열어 가스가 나가게 한 뒤, 완전히 뜯어냈다. 구멍 안으로 하얀 액체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사치라, 뜸을 들였다. 한 모금을 오래 입에 머금었다가 목 뒤로 넘겼다. 벤치 옆으로 한 무리의 레지들이 웃으면서 지나갔다. 의대를 계속 다녔더라면, 하얀 가운 사회의 일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병원에 입학 동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지난한 간병의 터널 사방에 가시가 깔렸을 것이다.
탄산이 혀에 닿으며 터졌다. 캔의 무게가 가벼워져갔고, 이내 모두 비워냈다. 끝맛이 쓰려 좋았다. 더 마시고 싶어지지 않으니까. 휴대폰 알람이 울렸고, 분리수거함에 캔을 버렸다, 병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매주 마지막 수요일은 한 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가족의 날이었다. ESG 붐이 일었을 때, 거래하던 대기업이 요구한 지표에 맞추기 위해 추가한 복지였다. 초기에는 이름만 있는 제도였지만, 지금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개 지켜지는 진짜 복지로 자리잡았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온 규연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식탁에 앉았다. 남편은 늦게까지 야근했고,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은 야근자율학습을 마치고 11시쯤 올 것이다. 호승심이 강한 딸은 순전히 지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딸이 지닌 집념과 강박은 규연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언니인 서연과 비슷하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매번 말했지만, 그럴수록 딸은 더 독해지는 듯했다. 어쩌면 자신과 남편이 꾸린 가정이, 딸에게는 구질구질하게만 느껴져서, 죽어도 이런 미래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서,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딸이 사회적 성공을 이루게 되면, 지금보다 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규연은 구태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다, 의자 위에 올렸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숙여졌다. 규연은 마침 의자에 쌓아둔 짐처럼 보였다.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부침용 두부 한 모, 연근 반토막, 회사에서 받은 스리라차 소스가 전부였다. 주말에 장을 본다는 것이, 어쩌다, 저쩌다 보니, 완전히 잊고 말았다. 가뭄에 든 것 같은 빈속에서, 식욕은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오늘 밤은 누구도 집에 오지 않았으면
오늘은 누구도 옆에 없었으면
오늘이 없었으면


했다.



병실로 돌아온 서연은 바이탈 사인을 체크했다. 평상시와 같았다.
욕창이 생기지 않게 아버지의 체위를 바꾸려 서연은 침대를 높이고 난간을 내렸다. 내일 사라질 사람에게 욕창이야 생기든 말든 무슨 상관있겠냐마는 오랜 간병으로 굳은 습관이 몸을 먼저 움직였다. 머리 밑에 작은 베개를 받치고, 시트의 주름을 폈다. 피부에 가해지는 압력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준비를 마친 뒤 한쪽 어깨와 엉덩이에 손을 대고 천천히 측면으로 움직였다. 무릎 사이에는 작은 베개를 넣어 튀어나온 뼈가 부딪치지 않게 했다. 숙련된 동작이었다.


침대를 다시 내리려 했을 때, 갑자기 손등에 뭔가 떨어졌다. 아버지의 손이 도장을 찍듯 손등 내리친 것이었다. 자세가 뒤틀렸는지 확인하러 고개를 든 서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식었다.
예의 흐린 눈이 아닌 초점이 맞춰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기적이었다.


숨이 가빠졌고, 심장이 뛰었다.
긴장감이 온몸을 팽창시켰다.
아버지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눈동자가 손가락을 따라 좌우로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서연은 산소호흡기를 제거했다.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고, 심박수가 빠르게 올랐다.
아버지의 눈이 맹렬하게 조여지는 것이, 보였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3층 314호
코드 블루, 코드 블루 3층 314호


밖에서 달려오던 발소리가 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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