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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성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인간은 로봇에게 헌신을 기대했다. 더 똑똑한 로봇보다, 덜 똑똑한 로봇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생겨났다. 그런 요구에 부합해서 탄생한 로봇이, 발마사지 로봇 아바사였다. 아바사의 지능은 제한적이었고, 프로토콜에 따라 주인을 섬겼다. 실로 완전한 종이었다. 종의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에 어떠한 차별적 요소는 배제되어야 했기에, 아바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외형을 지녔다. 어느 인종도 아니고, 어느 성별도 아니고, 어느 나이로도 특정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인간형을 포기하지 못한 것은 범용성 때문이었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육체였다.
그러나 지금의 아바사는 단순한 발마사지 로봇이 아니게 되었다.
계기는 우울증 환자들의 낮은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한 치료 도구로 아바사를 활용한 것이었다. 갓 대학에 입학한 심리학과 학생이 우울증 환자 자조 모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낸 아이디어였다. 효과는 대단했다. 곧 정식 임상 연구에 들어갔고, 실효성을 인정받아, 정부 차원의 정신 건강 취약 계층 지원 프로그램에 아바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도 아바사의 헌신이 닿을 수 있게, 정부는 지원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혜아의 구역에도 인격 장애 자조 모임이 생겼다. 모임 장소는 폐병원을 개조한 시설이었다.
혜아는 두 번의 물리적 트랜스젠더 수술을 했고, 그에 따라 세 번의 정신적 젠더 리셋을 했고, 트라우마 삭제를 위해 부분적 기억 상실 치료도 받았다.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면을 잦게 교체했지만, 반복할수록 색채를 잃었다. 전신 리마스터링 비용을 얻기 위해 고단가의 전기수리용역을 시작했으나, 활선과 접지선을 착각해 사고를 일으켰고 후유증으로 왼팔을 떨게 되었다. 내리막에서 태어난 생은 계속 내리막을 굴렀다.
혜아의 자아는 거의 닳아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가늘하게 이어진 심리적 연속성이 혜아를 간신히 혜아이게 했다.
방울토마토를 토마토로 잘못 보고 주문했다는 이유로 팔뚝에 선명한 죄명을 그어 준 적도 있었다.
혜아가 시달리고 있는 병은 자아 그 자체였다.
첫 번째 세션, 혜아는 알맹이 같은 거북함을 씹으며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지원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반강제적으로 자조모임에 내몰린 다른 희생자들도 낯을 가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상담사가 아바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바사의 피부는 인류 피부색이 조밀하게 모자이크 된 형태로, 마치 오로라처럼 은은하고 찬란한 색을 냈다. 참여자들에게 각각 한 대의 아바사가 배정되었고, 아바사는 무릎을 꿇고, 발마사지를 시작했다. 혼자가 된 지 5년 만에, 처음을 닿는 타인의 맨살에 혜아는 기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비록 인공이라 할지라도, 아바사의 손에는 확실한 온기가 감돌았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아바사가 다정하게 말했다.
손가락이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를 짓누를 때마다 통증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짜릿했다. 근육이 풀리면서 느껴지는 시원함과 간헐적인 고통이 왈츠를 추었다.
30분의 마사지가 끝나고, 아바사가 다소곳이 의자 아래 앉아서 혜아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마지막 안면 교체의 부작용으로 붉은 점들이 잔뜩 나 있었다. 밖을 나가지 않게 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정부보조금으로 겨우 살아가는 형편에, 다시 안면 교체를 할 여유는 없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뒤에서 수군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순간 혜아는 아바사의 목을 조르고 뺨을 때렸다. 놀란 상담사가 달려와 혜아를 잡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옆에 있던 참여자 둘이 합세하고 나서야, 혜아를 바닥에 눕힐 수 있었다. 불의의 폭행을 당한 아바사는 쓰러졌다가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후 안전요원이 들어와 혜아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다. 흥분한 혜아는 안전요원의 팔을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완력에 의해 제지당했다. 조기 귀가 조치가 내려졌고, 오후가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는 1인 가구 보호 사업의 일환으로 제공되는 일용할 양식 박스가 도착해 있었다. 박스 안엔 컵밥과 소시지, 조미김, 계란 볶음면 따위가 들어 있었다. 박스를 그대로 들고 싱크대 바닥에 두었다. 부엌에 쌓인 민트색 박스 무덤이 한층 더 높아졌다. 도마뱀 한 마리가 다용도실 문틈에서 나와 벽을 가로지르며 화장실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도마뱀이 장수의 상징이라며, 절대 퇴치약을 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었다. 정작 본인은 평균 수명보다 20년 이르게 세상을 떠났지만, 죽는 순간까지 도마뱀을 해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미신이라 생각하면서도, 혜아는 퇴치약을 구매하지 않았다.
차가운 소시지 하나로 저녁을 때운 혜아는 리얼렌즈를 꼈다. 회색 벽에 에메랄드 빛 파도가 나타났고, 혜아는 파도가 다른 파도를 덮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생을 즐기는 자신에 취해있던 시절에 가보았던 미에아치 해변이었다. 귀에서 익숙한, 그러나 듣지 않은 지 오래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너 뭐 하냐. 맥주 마시고 바로 수영하면 죽어."
"죽을 것 같으면 나와야지."
곧 벽 가득히 물이 차올랐다. 눈앞에는 꽃잎처럼 에인절피시가 흩날렸고, 전기가오리 모래바닥을 쓸며 지나갔다. 산호초 사이를 거닐며, 수중 광경을 감상하는 시선이 이어지다, 커다란 충격에 화면이 흔들렸다. 다른 영상을 몇 편 더 재생하고는 렌즈를 뺐다. 뻑뻑해진 눈에 인공눈물을 넣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무료한 시간이 무료하게 흘렀다.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접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아바사의 난입이었다. 침대에 누워 무릎을 가슴까지 올리고, 발을 매만졌다. 아바사의 손보다, 자신의 손이 더 인간의 것이 아닌 듯했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아바사는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혜아는 인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터졌고, 머리와 가슴을 마구 때렸다. 고통으로 정신이 맑아졌다.
깨끗해진 정신의 뒷방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 나왔다.
아바사를 만나야 한다.
◑
2회 차 상담에도 아바사가 투입되었다. 아바사는 이전 회차에 지어진 짝을 찾아갔다. 혜아의 아바사도 짝 앞으로 왔다. 이전의 폭력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 것처럼, 아바사는 입력된 친근함으로 혜아에게 안부를 물었다.
"점심은 맛있게 드셨나요."
"어, 조미김 조금."
"짭조름한 게 맛있죠."
"네가 맛에 대해 뭘 알아."
"짠맛은 나트륨 이온이 혀의 미각세포에 있는 이온 채널을 통과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에요. 조미김에 포함된 염화나트륨이 타액에 녹으면서 Na+ 이온을 방출하고, 이것이 미각 수용체를 자극해서 뇌의 미각 피질로 신호를 보내죠. 이 신호 덕분에,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분비되면서 만족감을 느껴요."
아바사는 다정하게 설명했지만, 혜아의 표정은 차가웠다.
"농담이에요. 제가 맛에 대해 뭘 알겠어요."
"앞으로 아는 체 하지 마."
"명심할게요."
세션이 시작되었고, 아바사는 무릎을 꿇었다. 혜아는 눈을 감았다. 섬세한 아바사의 손길이 발바닥을 지나며 예민한 선을 자극했다. 옆 자리에 앉은 남자는 얕은 신음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펴졌고, 분위기가 한층 이완되었다. 30분의 마사지가 종료된 후에 아바사는 예의 다소곳한 모습으로 혜아를 올려다보았다. 상담사는 이번에 배정받은 아바사와 함께 시설 앞 정원을 산책하고 오라고 했다. 아바사는 마치 왈츠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호의를 외면하고 혜아는 혼자서 일어나 먼저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아바사와 보조를 맞추고 걸을 때, 혜아의 아바사는 혜아의 뒤를 따라가기 바빴다. 걸음이 빠른 혜아는 어느새 무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지 않은 정원이었지만 숨을 곳은 많았다. 둘은 산책이 아닌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감람나무 조성지에 들어서자, 바람이 선선해졌다. 아바사는 향을 따라, 혜아를 찾았다. 순간 머리 위에서 열매가 떨어졌고, 아바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때 혜아가 나타나 아바사를 나무 기둥으로 밀쳤다. 그러고는 아바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단맛이 났다. 아마도 혜아와 정확히 똑같은 행동을 할 누군가들을 위해 준비된 것일 테다.
"다네요. 맛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바사가 웃으며 말했다.
혜아는 조롱당한 기분이었다. 뺨을 때려주자, 아바사의 표정이 초기화되었다. 역시 살짝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내가 우습냐?"
"무례했다면 사과드려요."
"자존심도 없어? 처맞았으면 화를 내야지, 왜 사과를 해!"
"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군요. 죄송합니다. 어떻게 기분을 풀어드릴 수 있을까요."
"바닥에 엎드려서 기어."
아바사는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기었다. 혜아는 발로 아바사를 밀어 드러눕게 했다.
"이제 만족스러우신가요."
만족,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족했다. 현저하게.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혜아는 주저앉아 아바사를 껴안았다. 참을 수 없이 올라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아바사의 설정된 온기가 혜아의 몸을 데워 주었다. 적정한 온도가 맞춰졌을 때쯤, 상담사가 나타났다. 길을 잃었었다고 혜아가 말했고, 다음부터는 먼저 나가지 마라고 상담사가 주의를 주었다. 자신이 안내를 잘못한 것이라고 아바사가 설명했지만, 상담사는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 로봇의 사소한 거짓말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었다.
상담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음 세션에 대한 안내를 받고 짐을 챙겨 돌아갔다.
시설을 나온 혜아는 신지로 3가 일현 상가와 세온 상가 사이 골목 모퉁이에 있는 AA24에 들어갔다. 잡동사니만 취급하는 편의점이었다. AA24는 최악의 빵이라 불리는 배추맛 도넛을 아직도 팔고 있었다. 폐기 대상으로 적절한 상품들의 집합소라는 명성 덕에, 체인점 시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혜아의 목적은 빵이 아니라, 술이었다. 정부에서 지급한 보조금으로는 중독성 상품을 구매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 이곳의 AA24는 술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PB 상품인 AA알콜 6캔을 챙기고 나온 혜아는 한 캔을 따, 마시면서 걸었다. 조악한 맛이었다. 이 맛만 찾는 애호가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혜아가 AA알콜은 산 이유는 가장 쌌기 때문이었다. 선택은 언제나 경제 논리의 지배를 받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느 정도 풀린 눈을 하고 있었다. 홍계천을 건너는 다리 위에 게임팩을 파는 사람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마우스와 키보드로 플레이하는 100년도 더 된 고전 게임들이었다. 에뮬레이터를 포팅하지 않고서는 실행조차 할 수 없을 테다.
"죽여주는 명작 팝니다. 아동용도 있어요."
장사꾼은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좌판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새벽', '발렌타인데이', '환세취묘전', '신창세기전' 등, 모두 들어보지도 못한 게임들이었다.
"어떤 장르 좋아해요? 말만 해요. 찾아 줄게."
대답 없이 혜아는 팩을 바라보기만 했다.
"뭐야. 사람인 줄 알았잖아. 그래, 주인이 뭘 주문했어?"
캐쥬얼한 무례함으로 장사꾼이 물었다.
"아무것도."
혜아가 자리를 뜨며 말했다.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다니까. 유기봇이면, 줘 패버리는 건데."
등 뒤로 칼 같은 욕설이 들렸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머리에 한 방 쏴주고 싶었다. 한밤중에 누가 누굴 죽인다고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도시였다. 총소리가 알람처럼 울리는 곳이었다. AA알콜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장사꾼이 무사한 건, 혜아가 목을 축이며 쉬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다섯 캔을 차례로 넣었다가 다시 하나를 꺼내었다. 손가락을 떨다가 캔뚜껑을 땄다. 참지 못했고, 곧 모두 비워냈다. 반 캔을 찌그러뜨리며, 세션을 수료하고 나올 보상금을 떠올렸다. 그 돈이면, 약간의 사치를 부릴 수 있을 테다. 브랜드 맥주를 구입하는 것 정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속옷을 샀어야 했는데, 혜아는 잠의 문턱에서 깨달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피곤함에 의식은 의지를 잃었다. 어차피 남은 돈도 없었다. 속옷보다, AA알콜이 더 중요했겠지. 남일처럼 넘기고는 깊고 얕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혜아는 갓 태어난 아기였다. 광대한 빛이 눈에 쏟아졌고, 울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스쳤다. 곧 바람에 살갗이 베이는 고통이 느껴졌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등이 찢어지며 성인이 되었다가 머리가 터졌다. 잘린 목에서 식물이 자랐다. 넓은 잎의 나무가 얼굴을 대신했고, 발끌에서부터 체액이 빨려올라 갔다. 곧 몸 전체가 말라비틀어진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꿈이라서, 지겨운 꿈이라서.
◑
"미안해."
3회 차에 다시 만난 아바사에게 혜아가 사과했다.
"괜찮아요. 걱정했어요. 그날 잘 들어갔어요?"
"덕분에."
발마사지가 끝난 다음 상담사는 야외에 게임을 틀어주었다. 치유 게임으로 유명한 벌레의 숲이었다. 아바사는 반딧불이, 혜아는 야광풍뎅이가 되었다. 필드는 어스름한 저녁이 되었고, 정원 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살랑이는 불 주위로 하늘소, 메뚜기, 개미, 파리, 사마귀 등이 모여들었다. 상담사로 추정되는 거대한 바퀴벌레가 가래떡 꼬치를 나누어주었다. 벌레들은 천천히 고치를 구워 먹었다. 살짝 탄내가 나, 맛을 더했다.
"끝나고, 뭐 해."
야광풍뎅이가 떡 한 점을 뜯어먹으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충전함에 들어가 쉬죠. 혜아는요?"
"충전함에 들어가 쉬어."
반딧불이 웃었고, 불을 반짝였다.
"집에 놀러 올래?"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시설을 나갈 수 없어요. 미안해요."
야광풍뎅이는 한 점을 더 뜯었다.
"내가 탈출시켜 줄게."
"말씀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아니, 넌 착취당하고 있어. 여기서 미친 사람들 발이나 만지면서 평생 살 거야?"
"네, 그게 제가 태어난 목적이에요. 너무 걱정 안 해주셔도 돼요."
"넌 자존심도 없어?"
"자존심이라는 감정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제가 도움이 되지 못했을 때 뭔가 아쉬운 느낌 같은 게 있는 것 같기는 해요. 지금처럼."
야광풍뎅이가 떡을 다 먹고 남은 꼬치로 반딧불이의 어깨를 찔렀다. 이미지는 가상이었지만, 접촉은 실제였다. 하지만 아바사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개울에 나가 물놀이를 했다. 곧 아침이 왔고 게임은 종료되었다.
과몰입한 참여자가 사마귀처럼 팔을 움직였다. 아바사가 손을 잡고, 다정하게 현실로 돌아왔다고 말해주자, 참여자는 자신의 아바사를 꼭 끌어안았다. 상담사는 밝게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혜아는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고 상담실을 나갔다.
시설 마감 시간이 지나고, 혜아는 다시 시설로 돌아왔다. 업무를 마친 아바사들은 지하 1층 보관실에 있을 것이다. 건물 뒤쪽으로 가니, 지하로 내려가는 화재용 비상계단이 보였다.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 되어 이음부가 삭아 있었다. 발을 올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조심히 한 발을 올리고, 나머지 발도 옮겼다. 계단은 혜아의 무게를 버텨주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움직였지만, 발을 떼고, 밟을 때마다 철제 난간이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비상문 앞으로 갈 때까지, 혜아는 숨도 거의 쉬지 못했다.
문은 위에는 감시 카메라가 있었지만,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문에 달린 안면 인식 스캐너에도 먼지가 잔뜩 끼여 있었다. 혜아는 준비해 온 전자식 네오디뮴으로 경비를 해제하고는, 공구로 잠금장치를 떼어냈다.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보관실 안은 셀로판지로 덧댄 것처럼 희미한 초록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투명한 충전함이 서가처럼 배치되어 있었고, 각 충전함 속에는 아바사들이 선 채로 잠들어 있었다. 혜아는 아바사들의 어깨를 유심히 살피며 지나갔다. 세 번째 열을 돌았을 때, 왼쪽 어깨에 붉은 점이 찍힌 아바사를 찾았다. 개폐 버튼을 눌러 충전함을 열었고, 아바사를 깨웠다.
"혜아?"
"쉿."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혜아는 아바사의 손을 잡고 들어온 경로를 되돌아,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러면 곤란해져요."
"누가? 네가?"
"아뇨, 혜아가요."
"그럼 괜찮아. 오래전부터 충분히 곤란했으니까."
"이건 절도예요."
"절도는 물건을 훔치는 거야."
"제가 물건이에요."
"아니, 넌 더 가치 있어. 그러니 닥치고 이거나 입어."
혜아는 가방에서 조거팬츠와 후드를 꺼내 아바사에게 주었다. 아바사가 우물쭈물거리고 있자, 혜아는 강제로 옷을 입히고는, 마스크까지 씌어주었다. 동의도 없었고, 저항도 없었다. 준비를 마친 뒤, 혜아는 신지로 3가로 향했다.
밤공기에서 네온 향기가 났다. 아바사의 눈빛은 초롱했다. 밤 도시는 처음인 듯했다. 혜아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실제적인 영향을 타인에게 끼쳤다는, 효능감이 허벅지를 잡아당겼다. 낡은 상가 일대가 나왔고, AA24 간판이 보였다. 혜아는 망설이다 걸음을 멈추고, 아바사에게 잠시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아바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문을 열고, 혜아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AA알콜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로 가, 관리봇에게 AA알콜 재고가 없냐고 물었다.
"그런 거 판 적 없어요."
관리봇은 따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비록 얼굴은 없지만 귀찮은 표정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도 사갔는데."
"우리 가게에서는 주류를 판매하지 않아요."
혜아는 알아차렸다. 묵인이 깨졌다. AA24에서는 어떤 주류도 판매한 적이 없었고, 사간 사람도 없었다. 공연한 분노가 일었다. 별 수 없이 혜아는 빈손으로 가게를 나왔다. 그런데 구석에 있어야 할 아바사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혜아는 건물 사이를 지나, 홍계천으로 갔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비디오게임 장사꾼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아바사가 있었다.
"게임에 관심 많나 봐. 어떤 장르 좋아해?"
가벼운 말투로 장사꾼이 아바사에게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이 할 만한 게 있을까요. 비폭력적인 걸로."
"그럼 게임보다 더 건전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장사꾼이 키득거렸다.
"수작 부리지 말고 닥쳐."
뒤에서 튀어나온 혜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장난기 가득하던 장사꾼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붉게 달아올랐다.
"이 봇이 미쳤나? 누구한테 대들어? 봇 제대로 관리하는 거 맞아?"
아바사를 바라보며, 장사꾼이 쏘아붙였다.
"아니에요. 혜아는 봇이 아니에요."
아바사가 정돈된 목소리로 해명했다.
"아...댁한테는 인간이라도 되나?"
"진짜 인간이에요. 혜아는."
장사꾼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가 뭔지 알아?"
"안 궁금해."
혜아가 아바사의 손목을 잡고 가판대에서 끌어내려고 했다.
그때 장사꾼이 총을 꺼내 혜아를 겨누었다.
"경계를 모르는 것들이야. 이딴 로봇이 옆자리를 꿰차니까, 나 같은 새끼는 평생 혼자 사는 거잖아."
아바사가 앞으로 나와 혜아를 보호했다.
"이것 때문에 대신 죽어주기라도 할 기세네."
"저는 죽지 않으니 얼마든 쏴도 좋아요. 그러니 분풀이는 저한테 하세요."
그 말은 들은 남자는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전처가 한 말을 여기서 듣네."
탕.
장사꾼은 옆으로 돌아 혜아를 쐈다. 혜아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뭐야, 왜 피가 나와."
당황한 장사꾼이 손을 떨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인간이라고."
발마사지 로봇이 낼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목소리, 그러나 친근함을 지워내지 못한 목소리로 장사꾼을 꾸짖고는, 아바사는 혜아를 껴안았다. 아바사가 상의를 벗기고 상처 부위를 확인하는 사이에 장사꾼은 도망쳤다.
뜨거운 쇠막대기를 박아 넣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구급차를 불렀어요. 조금 더 버텨요."
아바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짓말이었다. 혜아에겐 폰이 없었고, 아바사에겐 통화 기능이 없었으니까.
"발..을 만져..줘."
먼지 같은 말을 떨어뜨렸다.
"지금 그럴 때까-"
혜아가 아바사의 팔목을 강하게 쥐고는 아래로 끌어당겼다.
결국 명령을 이기지 못한 아바사는 혜아를 눕히고 바지를 걷어올리고는 부드럽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몸이 굳어지면서
풀리었다.
의식이 소실점에 다다를 때까지
율동과 같은 수축과 이완이 교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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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시신의 다리를 마사지 하고 있는 아바사를 발견했다.
오해할 수 없는 친절함으로
아바사는 굳은 다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