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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인류는 모두 계좌를 지급받았고, 계좌번호를 주민번호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모두가 계좌에 든 액수만큼 대접받았다. 상위 1%는 상위 1%의 유흥을 즐겼고, 상위 99%는 상위 99%의 괴로움을 즐겨야 했다.
0.1%의 자산가, Toxs 시스템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라22는 돌연 자본적으로 회개하고, 가진 재산을 랜덤하게 사람들에게 던졌다. 에라22의 코인 다발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은 머니클럽에 인증글을 올렸다. 처음엔 페이크 뉴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팝업창에 에라22의 선물이 떴을 때, 진짜라는 것을 계좌로 알게 되었다.
류미토도 에라22의 코인을 물려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아샤는 에밀리마트에서 깨우탕면으로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기주전자로 끓인 물을 컵에 붓고 뚜껑을 덮었다.
깨우탕면 특유의 누룽지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
보나마나, 번지수를 잘못 찾은 배달원일 테다. 누구도 이 집을 방문할 이유는 없으니.
"안 시켰어요!"
아샤가 큰소리로 현관문을 향해 외쳤다.
대답 대신 문이 벌컥 열렸고, 후드티에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네가 지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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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티에 모자를 눌러쓴
류미토는 '공공의 아이'였다.
출생률 0.65%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인공 수정을 통해 매해 5만 명의 공공시민을 키워냈다. 정치적,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시민성을 갖춘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것이, 공공의 아이들이 도착해야 할 생의 목표였다. 철저하게 자본적인 요구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은, 가장 자본에 취약한 계층이 되어, 언더 소사이어티에서, 사회를 떠받치는 일에 인생을 헌납했다.
공공양성소를 나온 류미토가 첫 번째 가진 직업은 물류 창고 자동화 관리 보조원이었다. 공기 중 산소 농도까지 자동으로 조절되는 물류 창고에 인간이 있는 이유는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사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관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 이유로 류미토는 1년 뒤에 일어난 화재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직장을 잃었다. 변변치 않은 일용직을 전전하다 외곽지대 군인으로 근무하기까지 했다. 반정부 테러 집단인 '해달의 민족'과 전투 중 동료가 불타 죽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가난한 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값싼 정신과 처방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신이 말라가던 류미토를 깨운 것은
계좌 창을 열었을 때 뜬 팝업이었다.
글로만 들었던 '에라22의 유산'이었다.
그건 단순한 코인이 아니었다. 일종의 기억이었다.
코인에는 에라22의 마지막 생각이 기록되어 있었다. 특정 계좌번호와 마지막 금융 거래 기록도 있었다, '지갑'이라는 태그와 함께. 역설적이게도 Toxs는 시스템을 교란하는 Toxs 창시자의 유산을 가만히 둘 리 없었기에, 유산을 안전한 곳에 옮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갑이 어째서 계좌를 쓰고 있지'라는 의문을 뒤로 하고, 류미토는 계시를 따르듯, 계좌번호를 추적했고, 마침내 발견했다.
그러나, 지갑이 필요한 건 류미토뿐만이 아니었다.
탕, 류미토가 총을 쐈고, 아샤 뒤에 있던 남자가 쓰러졌다.
"뛰어."
류미토는 아샤의 손목을 잡고 달렸다.
손아귀 힘이 대단했다.
달리기 실력도.
전속질주 끝에는 빌딩 난간 너머로의 도약이 있었다.
'아, 여기 87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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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곳은 호버의 지붕이었다. 류미토는 호버에게 지붕을 열라고 외쳤다. 슬라이드 도어처럼 지붕이 열렸고, 류미토는 아샤를 거의 던져 넣었다.
"뭔진 몰라도,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살려달라고 비는 게 조금 더 설득력 있어 보일 걸."
지갑의 소유자는 보통 조직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아사를 감싸줄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고, 소란 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뒤통수를 치고 나온 '해달의 민족' 일당을 떠올렸다. 지금 지갑에는 '해달의 민족 코인(Sea Otter Coin)'이 두둑히 채워져 있었다.
"어떻게 절 찾아온 거죠."
자신이 지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는 해달의 민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류미토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그쪽 세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에라22가 남긴 코인에 네 계좌 위치가 떴어."
계좌라니, 지갑인 아샤는 계좌로 인해 자신이 발각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죽은 옛 해달의 민족 동료의 계좌를 훔쳐 쓰고 있었다. 계좌가 어떤 이유에서 에라22의 코인에 기록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자신이 진짜 '지갑'이라는 사실이었고, 에라22의 유산을 모두 담고도 남을 만한 '여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보호가 필요했다.
"넣어줄게요. 그런데 한 가지 약속해줘요. 샐러드 시티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거긴 살만 해?"
"돈만 많으면 어디든 천국이죠."
"그럼 거기로 가지. 지갑 사용료는 1억 챙겨줄게. 어때 괜찮지?"
"저야 어디든, 깨우탕면 먹을 수 있으면 돼요."
"소박하긴."
어차피 류미토도 에라22의 코인을 챙기고 시티를 뜰 생각이었다. 시궁창 같은 성킹맨션의 썩어 문드러지는 침대만 아니라면 목적지는 어디든 좋았다.
아샤가 류미토에게 지갑과 연결된 가상 계좌를 불러주었고, 류미토는 전액 550억을 송금했다.
계약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