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착서

백설기 크라상

by 설다람

◑.


땅은 발목이 잠길 만큼 눈이 쌓여있었고, 비탈 아래로는 사람이 굴러 떨어지면서 눈이 파인 길이 보였다. 그 끝에 얼지 않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처럼 튀어나온 계곡 바위틈에, 목이 완전히 꺾인 남자의 시체가 물에 쓸려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다혁 형이었다.



“아직도 무전기 안 돼요?”

노은이 지휼이 형에게 물었다.

“안 돼, 눈 때문인가 봐.”

6.25 전쟁 때 사용하던 벙커를 임시 숙소로 개조한 이곳엔 기지국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휴대폰이 터지지 않았다. 7킬로미터 아래 떨어진 군부대와 연락 가능한 수단은 무전기가 유일했다. 어제 짐을 옮긴 후 운영인력이 떠나고나서부터 눈발이 휘날리더니, 밤 사이 하늘이 눈을 양동이 째 부어 놓았다.

“지금이라도 챙겨서 내려가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자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쫄지 마, 겨우 사람 하나 죽었다고 유난이야. 게다가 실족산데.”

이라크 전에 미군 전투병으로 참전했던 주디 누나는 다혁 형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여자로서 받았던 차별의 경험을 신랄하면서도 코믹스럽게 담은 다큐멘터리의 감독다웠다. 그 작품은 사탕을 깨부수는 듯한 거친 주디 누나의 내래이션으로 시작했다.

‘내가 마침내 프레드 무리랑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어린 내게 총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망한 인재는 주디 누나 뿐만 아니었다. 음악가인 노은도, 시나리오 쓰는 지휼 형도, 웹소설 작가인 자예도 모두 주목받는 예술인이었다. 죽은 다혁 형도 촉망받는 영화감독이었다.

우리는 예술가들에게 오지 체험의 기회를 주는 정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남해 무인도에 있었고, 이번엔 강원 북부 산악 지대에서 3일 동안 머무를 예정이었다. 일종의 여행형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정부는 극한 체험으로 영감을 받은 창작인들이 K-예술을 꽃피우길 믿었다. 이 나라는 K 열병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질병 같은 믿음의 결과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면, 다소 실망할 것이다. 다음 차수를 기다리던 지원자들도.

세상 망한 듯한 표정 짓지 말고, 점심이나 먹자는 주디 누나의 말에, 육개장 사발면을 꺼내고 물을 올렸다. 사람이 죽은 것도 사실이었고,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었다. 노은도 옆에 와 식사 준비를 거들었다. 3분 뒤 익은 라면을 식탁에 둘러앉아 먹기 시작했다.

문득 이 장면이 코믹하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곧 깨질 것이다. 그래야 이야기가 굴러갈 테니. 라면을 다 먹었을 때쯤 주디 누나가 입을 열었다.

“조금 아쉽지 않아? 뭐, 악의로 가득 차서 홧김에 밀어버렸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정도는 돼야, 다혁이 체면이 서지. 명색에 스릴러 감독인데. 어떻게 생각해 노은.”

“그건 좀...”

“왜, 홧김에는 조금 약하나.”


무인도에서 노은이 자예와 다혁 형이 키스하는 걸 보고 다혁 형과 말다툼 벌인 것을 두고 자극하는 것일 테다. 주디 누나는 여러모로 성가신 부류였다. 참다못한 지휼이 형이 노은을 대신해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까부터 있는 대로 지껄이는데, 입조심 좀 해.”

“오, 너도 있었구나. 그 시놉 때문에? 그건 좀 강하다. 그치.”

“이 새끼가 진짜.”

남자와 여자가 싸우며, 목소리를 높일 때면, 언제나 집안 가구를 박살 내며 싸우셨던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빠가 엄마를 패고 나가고 나면, 엄마는 술을 들이켰고, 초등학생이던 나를 흠씬 두들겼다.

그때마다, 누나는 나를 꼭 끌어안고, 엄마, 제발 때리지 마세요.라고 엄마에게 사정했다. 엄마의 가족의 자랑이었던 딸은 때리지 못했다. 학교에서 늘 칭찬과 상만 받아오는 누나였으니까. 어쩌면, 본인의 어릴 적 모습을 꼭 빼닮아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엄마는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 단역 배우 일을 시작한 누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본인이 실패한 배우였고, 그 길을 선택해서 실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채 졸업하기 전, 다혁 형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누나가 말했을 때, 길길이 날뛰며 엄마는 그 자식 잡아오라고 했다.

그 뒤로 누나는 다시 집에 오지 않았고, 나도 나와 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게, 남자와 여자가 목소리 높여 싸우는 소리는, 목을 졸라서라도 사라지게 하고 싶은 소리였다.

노은과 자예에 꽂힌 관심을 돌리고, 주디 누나의 도발을 잠재울 수 있는 주제를 꺼내기로 했다.

“살인 동기야, 제가 제일 확실히 가지고 있죠.”

예상 못한 말에, 지휼이 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우리 누나가 다혁 형이랑 결혼하고 나서 죽은 건, 다혁 형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여찬아-”

지휼 형이 말을 더 하려다 말았다.

내 누나가 다혁 형의 아내였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그 관계를 내가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는, 지휼이 형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아, 그런 게 있었어? 그건 좀...”

공감 능력이 1도 없는 사람지만, 이 정도 얘기했으면, 이쯤에서 그쳐야 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챘을 것이다.

먼저 일어나 식탁을 정리했다.



“여찬아, 미안하다.”

책상에 앉아 콘티를 그리는 중에, 옆에서 지휼이 형이 말했다. 우린 두 사람 씩 짝을 지어 방을 쓰고 있었지만, 방 가운데는 가림막이 있어, 각자 방을 쓰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지휼이 형이 내게 사과해야 하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장례식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장례식에서 일을 도왔다. 다혁 형은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살의를 느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살벌하게 쳐다봤었다.

그러나 진짜 살벌하게 다혁 형을 때린 건, 지휼이 형이었다. 지휼이 형은 조문을 오자마자 다혁 형 멱살을 잡고 얼굴을 갈겼다. 쓰러진 다혁 형의 목을 조른 뒤, ‘니가 사람이야, 이 새끼야’ 한 대, ‘개새끼야, 니가 사람이냐고’ 한 대, ‘아, 왜. 썅.’ 한 대 더, 사람들이 달려와서 지휼이 형을 잡고 말렸다. 체대 출신인 내 친구가 팔을 꺾고 진정시키지 않았더라면, 정말 다혁 형을 죽였을 수도 있었다. 그 순간은 그랬다. 그렇게 순도 높은 분노를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몰랐지만, 지휼이 형과 누나 사이에, 각별한, 칼에 찔린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사람을 죽도록 패게 만드는, 그 각별한 무엇이 있었나 보다.


그 각별한 무엇을, 알고 싶진 않았다.

내겐 다혁 형이란 적만으로도 버거웠다. 지휼이 형은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다 자기 잘못이라고. 서럽게 울었다.


세상에 가장 뻔하고, 흔한 게 치정 살인이다.

작품에서 살인은 동기도 다양하고 수법도 영리하지만,

현실에서 살인의 동기는 대부분 돈 아니면 치정이고, 수법은 어설프기 그지없다. 다혁 형은 누나와 결혼하고 나서도 10명의 여자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누나의 동기가 될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경찰에게 진술한 다혁 형의 주장에 따르면, 누나가 먼저 칼로 자신을 찔렀고, 몸싸움을 하다 자신에게 제압당한 뒤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119를 부르자고 누나가 했지만, 깊은 상처는 아니라 지혈만 하면 될 것 같아 수건으로 압박만 했다고 했다.

약국에 가서 거즈랑 지혈제를 사 오겠다고, 누나가 나갔고,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하주차장에서 거즈로 목을 매달고 죽은 누나를 보고 신고한 것은 동네 주민이었다. 상처를 입힌 것도 누나였고, 누나를 죽인 것도 누나였다. 그러니 다혁 형에게 죄가 있을 리 없었다.


지휼이 형도 조금 전의 주제를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콘티 짜는 작업에 집중했다.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네오 조선을 배경으로한 사이버펑크물이었다.

백설기 크라상 잘 빚기로 유명한 주인공은 평범한 제과점 주인으로 소란 없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백설기 크라상 10억 개를 주문받는다. 수량을 오입력한 것이라 생각해 취소하려던 찰나, 은색 신사들이 제과점으로 들이닥친다.

그들은 인삼 아편을 밀수하던 송상 단원으로, 조직을 속이고 거래자금을 빼돌린 배신자를 찾아왔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인공은 말했지만, 그들은 주인공을 납치한다. 송상 본사로 이송되던 중, 제빵 재료를 배달하러 왔다 주인공이 사라진 것을 알고 뒤따라온 친구에 의해 구조되고 둘은 도망치기 시작한다는 진부한 이야기였다.

콘티는 어떻게 해본다고 쳐도, 빵과 기계의 디테일을 살릴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선 자신 없었다. 토리야마 아키라 수준의 메카닉들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녔지만, 내 손으로 구현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오후가 지나고, 저녁도 거르며 그림을 그렸다. 빨간 단발의 주인공을 그리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기운이 났다. 누명을 벗기 위해, 별 거 없던 하루들로 돌아가기 위해, 뛰고, 질주하고 추락하는 모습은 선한 사람이 타인에게 메시지를 건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결말에 희망이 깃들지 않게, 조심히 전개해야 한다.



새벽 3시가 지나서야 펜을 놓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린 장면은 위험한 사람들이라도 죽일 순 없다며, 쌀가루로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주인공이 친구에게 떼쓰는 장면이었다, 어떤 무기가 좋을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알 것 같았다.

손가락이 얼얼했고, 손목은 시큰거렸다, 육체도 소모품이다. 그게 사람들이 안달하는 이유일 테다.

오랜 시간 말라 있던 목을 축이러 탕비실로 갔다. 탕비실엔 주디 누나가 부엌에 서서 사과를 먹고 있었다. 남은 사과 한 조각 옆에는 군용 나이프가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나를 본 주디 누나는 자기 보고 싶어서 깼냐고, 농담했다. 웃기진 않았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자, 주디 누나는 자신도 한 잔 따라 달라고 했다. 잔을 받은 주디 누나는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그때 노은의 방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노은의 신음소리는 아니었다.

“쟤네들은 저게 안 들릴 거라 생각하나 봐.”

소리가 적나라할 정도로 크게 들리긴 했다.

“너도 할래?”

주디 누나는 약통을 내게 줬다. 비타민 B였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돌려줬다. 주디 누나가 건네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몸에 유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어디 나왔다고 했더라?”

군대 얘기였다.

“해군이요.”

“배 좀 탔겠네.”

“1년 타고 내렸어요.”

“멀미는 없었어?”

“딱히.”

“다행이네, 사과 한 조각 먹어. 하나 더 깎아줄까”

사람 좋은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여기서 많이 죽었겠지, 전쟁 때.”

“그렇겠죠.”

“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폭탄이 터져서, 돌아보니 동료 몸이 반 날아가 있더라고. 눈 뒤집힌 채로 모르핀을 외쳐댔지. 안 당해봐서 모르지만, 폭탄에 배가 터져서 내장이 나오면 겁나 아플 것 같긴 해. 그 상태로 꽤 오래 숨이 붙어있었는데, 차라리 머리를 쏴서 죽여주는 게 이 친구를 위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드는 거 있지.

밤에 그 친구 비명이 들려. 모르핀!”

주디 누나가 속삭이듯 내 귀에 대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바로 벽으로 나를 밀어붙였다.

“왜 죽였어?”

“무슨 말씀을...”

“개수작부리지 마.

한밤에 눈이 그렇게 내렸는데, 발자국이랑, 패인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잖아.

비탈 아래 5m까지는 발자국이었고, 그 아래부터는 굴러 떨어진 흔적이었어.

밤에 비탈로 밀었고, 날이 밝았을 때 확인하러 와 보니, 생각보다 멀리 떨어지지 않아, 다시 시체를 들어 한 번 더 아래로 굴려 보냈다.

그리고 아침 산책을 나갔다 온 사람은 너고. 꽤 그럴듯하지 않아?“

“아시잖아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거.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고요.”

“산책하고 온 사람 외투에 나무껍질 부스러기 묻어있진 않지.”

물에선 단맛이 났다.

“왜 죽였어?”

혀끝에서 물이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점심때 말씀 그대로예요. 항상 생각해오던 일이, 적절한 기회를 만난 거죠.”

주디 누나가 피식했다.

“다행이겠다, 눈이 안 그쳐서.”

다행이라, 내게 다행이었던 것은, 영하 20도 기온에서는 모두가 장갑을 낀다는 것이었다. 비탈에서 굴러 떨어진다고 사람이 죽는 건 아니니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어깨를 잡던 손이 내려갔다. 엄지손가락에 눌러졌던 자리가 욱신거렸다. 주디 누나가 남은 한 조각을 마저 먹었고, 나도 잔을 비웠다. 마신 컵을 물로 헹구면서, 주디 누나의 빈 잔도 받아 씻어 건조대에 뒤집어 두었다.


정리해줘서 고맙다는 말 뒤에 주디 누나가 덧붙였다.

“네 말이 맞아, 항상 방심하면 안 되지. 전투든, 뭐든.”

주디 누나가 탕비실을 나가며, 폰을 흔들었다.


지휼이 형과 토스트와 햄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자예가 굳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주디 누나가 의식이 없다고 했다. 들어가 보니, 주디 누나의 숨은 멈춰져 있었다.

어떤 피곤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기상 시간을 어긴 적 없는 주디 누나가 일어나지 않자, 괜찮아요 언니,라고 물었고, 대답이 없자 약하게 어깨를 흔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자예의 설명이었다,

지나치게 뻔했다. 수면제 과다 복용이 사인일 테다. 전쟁 트라우마로 매일 밤 수면제를 먹고 잠든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약통에 지금 내 지문이 묻어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먼저 약통을 발견하고, 사람들 앞에서 잡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약통이 보이지 않았다. 녹음 파일로 다혁 형을 죽인 죄를 입증할 수 있을 테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내가 자신마저 죽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일까.

이제 죽음에 대해 세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내가 다혁 형을 죽인 것은 맞지만, 주디 누나는 죽이지 않았다. 다혁 형도, 주디 누나도 죽이지 않았다. 다혁 형, 주디 누나, 둘 모두 죽였다. 형량을 줄이기 위해 애쓰던가, 죄를 지우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하지만 다혁 형을 죽인 내가, 자백을 녹음한 주디 누나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게 설득력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제 누나가 평소보다 상태가 나빴어요? 제 말은 잠들기 전에 호흡이 거칠었다거나, 뭐 그런 거요”

“아뇨, 그냥 보통 때랑 같았어요.”

“두 분 중 누가 먼저 잠드셨어요?”

“주디 언니요.”

“자예 씨는 언제쯤 주무셨어요.”

“지금, 자예 의심하시는 거세요?”

노은이 날 노려보았다.

방에는 가림막이 있었다. 주디 누나가 먼저 잠들었다고 바로 대답하려면, 정말로 자고 있는지를 확인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노은의 방으로 가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냥 여쭤본 거예요.”

“지금 밀실 추리극이라도 찍으시려나 본데, 정도껏 좀 하죠. 우리 다. 이제-”

이제 소시오패스 같은 꼰대도 죽었잖아요. 라고 하고 싶었을 테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소시오패스가 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죽은 사람 두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지휼 형이 경고했다.

“산 사람 두고도 그러면 안 되죠.”

완전히 선을 긋는 말이었다. 노은은 자예 짐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주디 누나의 시신과 짐은 그대로 두어 현장을 보존했다.

무전기는 아직도 불통이었다. 나와 지휼이 형은 식탁으로 돌아가, 남은 아침을 끝냈다. 자예가 훌쩍이는 소리가 방에서 새어 나왔다. 노은의 방도 죽은 사람의 방이었다. 태연한 게, 이상할 상황에 있었다.

잠시 후 둘이 짐을 챙겨서 나와, 내려가겠다고 했다. 눈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말릴 이유도 없었다. 허리 바로 아래까지 눈이 쌓인 탓에 둘은 장비실에서 삽을 챙겨나갔다. 아래 도착하면 상황을 알리고 곧바로 구조하러 오겠다고 말하고, 노은과 자예는 눈 속으로 사라졌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긴장감이 형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신의 끈을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주디 누나 방으로 가, 휴대폰을 찾고 싶었지만, 둘만 남은 상황에선 불가능했다. 지휼이 형 입장에선, 사람이 둘이나 죽었고 모두 타살이 맞다면 자신은 죽이지 않았으니, 내가 살인자로 보일 테다. 그런데도 노은이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이유는, 나를 믿거나, 눈이 두렵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짐작하는 일보다는 콘티를 이어 작성하는 게 생산적이란 판단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작업 노트를 꺼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죽여선 안 된다고 떼쓰는 빨간 단발머리 여자에게 무해하지만, 강력한 무기를 줘야 한다. 요리는 유사마법이니까, 제빵술사라는 컨셉을 넣을까. 바게트 빵으로 바주카를 쏘고, 후춧가루와 강낭콩으로 만든 콩알탄을 던진다.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 그건 작가의 역량이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든 사람이 다치지 않게를 외치는 주인공은 남을 해치지 못하는 무기 때문에, 자신을 구해준 친구를 잃을 것이다. 자신의 결정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 후회. 후회해야 한다.

“넌, 그림이 그려지니?”

뒤에서 지휼이 형이 말했다.

“그리고 싶어서, 그리는 건 아니죠.”

“언제부터 둘이 그런 사이였어?”

“노은이랑 자예요?”

“아니, 너랑 주디.”

감이 나빴다.

“새벽에 너 나가고, 신음소리 나더만.”

“전 또 뭐라고. 당연히 노은이랑 자예죠.”

“탕비실에선 뭐했는데.”

들을 게 아니라, 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디 누나가 내 귀에 속삭였고, 벽으로 날 밀쳤다. 뒤에서 본다면 오해할 만했다. 대화를 들었다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을 테다.

“다혁 형 때문에 제 누나 죽은 거 얘기하다, 조금 다퉜어요. 그게 끝이에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지휼 형이 무섭게 다가왔다.

“내가 죽였어, 주디. 우리 사인 좀 깊었거든.”


항상 이런 식이었다.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치정.

나도 모르게 지휼 형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그 역겨운 표정을 풀게 하려 한 대를 더 때렸다. 지휼이 형이 팔을 잡아 나를 벽으로 던졌다. 머리가 그대로 콘크리트 부딪쳤고, 피가 나기 시작했다. 지휼이 형은 책상 위에 있던 스탠드를 들어다, 내 머리 쪽으로 휘둘렀다. 몸을 왼쪽으로 굴려, 간신히 피했다.

지휼 형은 스탠드 전깃줄로 내 목을 감았다. 주먹질을 했지만, 무엇도 때리지 못했다. 의식 흐려지고 있었다. 콘티, 주인공의 친구는 그럼 누가 죽이지. 끝내야 한다는 간절함만이 마지막 기억이 되어가고 있을 때,

가림막 너머에서 무전기 소리가 났다.

“지휼 작가님, 여찬 작가님 계세요?”

내 목을 한 번 더 선으로 확실히 조이고, 지휼 형은 무전기로 달려가 대답했다.

“네 지휼입니다. 상황이 안 좋아요, 지금 숙소로 오시는 중이 거죠?”

“아뇨, 저희 지금 숙소인데, 보이지 않으셔서 쳐본 겁니다. 무전기 들고 어디로 가신 겁니까.”

“무슨 소리세요.”

거친 잡음이 한 차례 지나갔다.

“숙소에 주디 감독님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문제로 두 분이 사라지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폭설에 산길은 위험합니다. 다혁 감독도, 노은 작가, 자예 작가 모두 눈 속에서 숨진 걸 확인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우선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오셔서 일은 차례로 처리-치지..”.

잡음이 짙어지다 송신이 끊겼다. 지휼 형이 무전기를 껐다 켜보았지만, 신호는 다시 연결되지 않았다.

무전기를 귀에 대고 있는 지휼이 형을 스탠드로 내리치고, 내리치고, 내리쳤다. 사람을 죽이게 되면,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 좋은 방향이든, 아니든.

이불로 시체를 덮고, 밖으로 나와 다혁 형이 죽은 곳으로 향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삽으로 파내야 했지만, 다행히 노은아 네가 먼저 헤치고 간 길이 있어,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계곡이 보이는 비탈에 도착해, 아래를 살폈다. 다혁 형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계곡물만 흐르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었다. 주디 누나도, 지휼이 형도 사라져 있었다.

주디 누나 짐을 뒤져 폰을 찾아냈다. 녹음앱을 열어 어제 녹음된 파일을 재생시켰다.

‘나 보고 싶어서 깬 거야.’

주디 누나의 목소리였다.

‘당연하지.’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다혁 형이었다. 곧 거친 숨소리가 나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지휼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 내려놔 주디야. 닥쳐.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이렇게 또 왈츠였다.


발견된 시체들의 사망 시각은 모두 동일했다. 각자 서랍 안에는 살해할 대상과 방법이 적혀 있었다.

노은이 다혁을 죽이고, 다혁이 자예를 죽인다. 자예는 지휼을 죽이고, 지휼은 주디를 죽인다. 주디는 여찬을 죽이고, 여찬은 노은을 죽인다. 적힌 대로 모두가 살인에 성공했다면, 모두가 죽을 순 없다.

주디의 폰에 있던 녹음 파일에서 여찬은 다혁 감독을 자신이 비탈에 밀어서 죽였다고 자백했지만, 정작 계곡에서 목이 꺾인 채 발견된 사람은 여찬 자신이었다.

수사하는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짚이는 것, 하나 없는 사건의 시작점으로 택한 것은

다혁 감독의 전 아내이자, 여찬의 누나인 여란이었다.

맞다. ‘백설기 크라상’으로 세계를 휩쓴, 그 ‘여란’이다.


사건 덕에 유명인을 다 만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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