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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인?"
"라선?"
남자가 라선을 보고 놀랐다. 규인은 개발 부서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였다. 가이드 초안을 깔끔하게 잘 써주는 몇 안 되는 개발자라, 혼자만 내적 친밀감이 깊은 사이였다.
"아는 사이세요?"
중개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같은 회사 사람이에요."
규인이 설명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중개사가 먼저 들어갔고, 라선이 따라 들어갔다. 규인 뒤에는 여자친구 혹은 아내가 있었다. 여자는 방문자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라선은 규인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규인은 세입자였고, 집이 팔리지 않으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것이다. 둘러보기가 목적인 것이 미안했다. 규인은 묻기도 전에 나서서, 집의 장점을 소개했다. 남향이라서 볕이 잘 든다. 저층이지만, 고도 자체가 높아 전망이 좋다. 다른 집과 달리 화장실까지 완전히 리모델링해 내부는 신축이나 다름없다. 관리비가 저렴하다. 복도 가장 끝에 있어, 소음이 덜하다.
설명대로, 집 내부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살기 좋게 꾸며 놓았다. 좁지만 용도에 맞게, 구역도 세심하게 잘 나뉘어 있어 동선도 편리했다. 하지만 민도가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남그때 갑자기 옆집에서 남자가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고, 아이가 크게 울었다. 규인의 표정이 굳었다.
"어딜 가나 저런 집이 한 둘은 있죠."
중개사도 민망했는지, 어떻게든 포장해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집에서 문을 벌컥 열고 나와 소리쳤다. 셋 다 닥치라고.
"그렇죠, 한 둘은 있죠."
아직 둘이었다. 라선이 떨리는 규인의 눈을 보고 맞장구쳤다.
갑자기 윗집에서 쿵쿵 바닥을 거칠게 두들겼다. 아마도 소란의 주범을 규인의 집이라 생각하고, 공격한 듯했다. 꾹 참고 있던 규인이 천장을 세 번 쳤다. 잠시 쿵쿵거림이 멈추는가 싶더니, 곧 폭풍우 같은 발길질 소리가 쏟아졌다.
"셋도.... 있네요. 하하."
규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라선도 멋쩍게 웃고는 집을 나왔다. 중개사가 헤어질 때, 마음 정해지면 바로 연락 해달라고 했다. 다들 전세살이들이라서, 곧 이사갈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팔기 위한 거짓말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라선은 빌런들에게 둘러싸인 규인이 오늘 과연 제대로 잠들 수 있을지 걱정하며, 발길을 돌렸다. 아파트를 나오는 길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라선은 연기를 헤치고 단지 밖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도로변이 상쾌했다. 아파트가 아니라, 담배의 숲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라선은 저녁을 먹기 위해, 상가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지긋하게 나이 든 사장이 벌레를 보는 눈빛으로 라선을 보았다. 가운데 긴 테이블 양옆으로 등받이 없는 의자가 줄지어 놓인 오래된 식당이었다. 테이블 끝에는 고등학생 두 명이 라면을 먹고 있었다. 라선은 가운데 자리를 잡고, 김밥을 시켰다. 가장 저렴했고, 비교적 영양소가 고루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 후문 바로 옆에 있는 낡디 낡은 분식집이 떠올랐다. 그곳 김밥은 한 줄에 1,300원이었다. 여기 김밥은 한 줄에 3,200원이었다. 이 가격 차가 물가상승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때 분식집이 지나치게 쌌던 것이다. 자료구조 기초 수업을 마친 어느 날 언제나처럼 분식집에 들렀을 때, 가게문이 닫혀 있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와 문을 열었다. 오늘 영업 안 해요. 사장님 돌아가셨어요. 남자는 들어가 문을 다시 닫았다. 황망했다. 사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이제 1,300원 김밥을 못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먹던 곳이었는데. 그때 스스로가 비루하게 느꼈다.
김밥 나왔고, 한 알을 먹었다. 혀를 다시마로 감는 듯한 감칠맛이 났다. 기대치 않았던 훌륭한 수준이었다. 테이블 끝에서 라면을 먹는 학생들이 쌍욕을 섞어가며 대화했다. 주제는 수업 시간에 잠 깨운 선생님을 팬 사건과 어제 여자애들과 보낸 하룻밤이었다. 저속했다. 부끄러움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마지막 꼬다리를 먹고, 라선은 계산대로 갔다.
"쟤네들 것까지 계산해 주세요."
심드렁한 눈빛으로 사장이 결제했다.
"쟤들이 고마워할 것 같수?"
"그러길 바라야죠."
"돈 낭비올시다."
사장이 비웃듯 말했다. 라선도 동의했다. 이 행동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실천이었다. 깨어 있는 사람으로서의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라면 두 개 값으로 이런 기분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어쩌면 부끄러움을 배워야 할 사람은 자신인지도 몰랐다. 매번 그걸 알지만, 매번 그걸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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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을 때 점박이 고양이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라선은 고양이 벼락을 맞고, 바닥에 엎어졌다 일어났다.
"임장은 재밌었나요?"
어느새 나타난 타아와가 유쾌하게 말했다.
"나름요."
"깨달은 바는?"
"입지 자체는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닌데, 생활 수준이 너무 낮아요. 비슷한 조건인데도 바로 맞은편 아파트에 비해 2,3천 정도 싼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인터넷으로 볼 땐 저평가된 게 아닐까 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제 가격이었어요."
"놀러갔다 온 건 아니네요. 가격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입지마저 나빴다면, 그 가격도 받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 시세는 오로지 입지로만 지탱 받고 있는 거네요."
라선이 책상에 앉으며 말했다. 규인의 집주인은 폭등기에 상투를 잡은 사람일 것이다. 하방 지지선인 전세가마저 무너진다면, 경매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 아파트를 살 능력도, 지금 라선 씨에게는 없어요."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타아와가 말했다.
정신이 번쩍했다. 사실이었다. 빈털터리는 매일같이 전쟁을 벌이는 이웃주민들과 담배 연기로 둘러싸인 아파트에 살고 싶어도 살(居) 수 없다, 살(買) 수 없으니까.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죠?"
"아쉽지만, 체험 기간이 종료 되었어요. 앞으로 더 대화하고 싶으면 유료 플랜을 구독하세요."
타아와가 수염을 흔들었다.
무료 서비스가 아니었구나
"얼만데요?"
"1 달란트, 지금 금 값이 한 돈에 383,000원 정도니까, 337,920,000원은 되겠네요."
"..."
"지금 안 내도 돼요. 천국에서 빚으로 달아둬도 되거든요. 단 늦게 죽을수록 이자가 더 붙을 뿐이에요."
조언 한 마디에 3억.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3억의 조언으로 10억을 벌 수 있다면 가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언은 실행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 조언이 얼마나 유익하다고 해도. 스스로 무지한 지금, 조언이란 게 의미 있을 리 없었다. 성공 팔이 강의에 희생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천국에서까지 돈에 짓눌린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뇨. 제가 해볼게요. 고마워요."
라선은 제안을 거절하고 노트북을 열어, 임장 후기를 적기 시작했다.
손품팔이로는 알 수 없었던, 실제 이동 시간, 동 위치, 분위기. 노후화 정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등. 최대한 자세히 쓴다고 쓰는데, 초라하고 부족해 보였다. 아파트에 애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것도 같았다. 애정이 생기는 아파트가 나타났을 때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 지루한 작업이 필요한 것일 테다. 관심 없었던 분야니, 집중도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보고서를 완성했다. 분석 항목의 조정도 필요하고, 임장 전 준비가 더 철저해야 한다. 뻐근해진 어깨를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하루의 끝자락에 닿았다. 고양이도 사라진 시간에서, 라선은 천국이 아닌 곳에서, 천국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땅도 누군가에겐 천국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그럴 수 있다. 다짐보단 무른 혼잣말을 내뱉고 라선은 옷을 갈아입고, 바닥에 누웠다. 그래도 아직 아늑한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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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에서 계피 이온 음료를 마시고 있을 때, 규인이 커피를 마시러 잔을 들고 나타났다. 규인은 주말의 사건 때문이지, 조금 어색하게 인사했다.
"사지 마요. 실거주든, 투자든."
에스프레소 머신에 규인이 캡슐을 넣었다. 캡슐을 받아먹은 에스프레소 머신은 진한 원액을 침처럼 흘리다 멈췄다. 물을 붓고, 얼음을 가득 채우고 나서, 규인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보증금만 돌려받으면, 당장 뜨고 싶은 동네예요. 매매하려다 전세로 들어간 건데, 집값 떨어질 땐 만만다행이다 생각했죠. 지금은 보증금을 못 받으면 만만불행으로 굴러 떨어지게 생겼어요."
사람 좋은 얼굴에 그늘이 졌다.
곧 팔릴 거라고, 경매로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조금만 헛디뎌도 최악의 상황은 더 최악의 상황으로 휘몰아쳐 들어간다. 간신히 숨통이 트였을 때, 5만 원짜리 한 장으로 숨구멍이 다시 막히기도 한다. 서로 말없이 각자의 잔을 비우고 나서 일어나 자리로 돌아갔다.
월요일 저녁부터 야근이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의 마지막 불을 껐을 때 창밖으로 천사 하나가 날개로 공중을 차며 빌딩 사이를 지나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