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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Aug 31.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3화


 단정한 셔츠 차림의 타아와 라선을 103호로 데려갔다. 103호라고는 하지만 102호나 101호는 없었다. 103호는 현관 좌측에 화장실, 우측에 주방이 있는 전형적인 직선형 오피스텔 구조였다. 빌트인 된 냉장고와 세탁기가 붙박이장과 나란히 이어져, 정사각형 원룸보다 시원해 보였다. 방 끝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짐 하나 없는 빈 방이었다. 타아와는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마치 웰컴 드링크처럼 식혜 두 캔이 있었다. 한 캔을 라선에게 건네주고, 타아와는 방바닥에 앉아 식혜를 땄다. 라선도 따라서 방바닥에 앉아 식혜를 따 마셨다. 공산품 캔 식혜에서 수제 식혜 맛이 났다. 


 "민하에게 들었어요. 많이 벌고 싶어요?"

타아와는 찻잔 속 흔들림 없는 물처럼 미소 지었다.

"네..."

"간절함이 부족하네요. '네...'가 아니라 '네!'가 되어야죠."

라선의 힘없는 대답을 흉내 내며 타아와가 말했다.

"돈은 자신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독한 것만으론 부족하죠. 극단적인 절약, 칭찬받고 싶나요? 절약은 원래 하는 거예요. 쓸 일이 없으면 쓰지 않는다. 간단한 규칙이죠. 하지만 살이 제법 붙은 돈을 내버려 두는 건,  돈을 소외시키는 거예요. 바빠서 놀아주지 못했다? 그럴 리가요. 그냥 귀찮고, 게을러서예요."

타아와는 온화한 표정으로, 가시 방망이를 휘둘렀다. 스멀스 기어올라오던 변명이 모두 납작해졌다.

"잔소리가 길었네요. 오늘부터 이곳에서 사세요, 월세는 30만 받을게요. 지금 자취방보다 면적도 넓고, 직장까지 20분이나 더 가까워요. 지상 1층이라 물에 잠길 걱정도 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되나요?"

종잣돈을 다시 모으려면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한다. 심지어 거주 환경까지 이전보다 좋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이죠. 여기 계약서를 작성하세요."

타아와가 펜과 종이를 건네었다. 라선은 임차인 란을 채우고 나서, 서명했다. 그때 펜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펜과 닿아 있던 부분이 붉게 데어 있었다.

"왜 의심하지 않으세요?"

무슨 뜻인지, 라선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사시는 반지하 방보다 조건이 더 좋은데, 왜 월세 30만 원에 해드린다고 했을까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라고 생각하는 게, 이성적이죠."

소년 얼굴과 노인 얼굴은 천천히 회전하면서, 시간을 옮겨가고 있었다. 

"제 이름과 주소는 확인하셨나요. 소유주가 저라는 보장이 있나요. 신분증도,  등기부등본도 보지 않으셨잖아요. 수도세와 전기료는 보통 얼마쯤 나오는지, 따로 관리비는 있는지, 여름엔 더운지, 물은 잘 나오고, 잘 내려가는지 체크하는 것도 필수 아닌가요. 마트에서 바나나 한 송이 가격은 그램 단위로 비교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월세 계약은 이렇게 쉽게 하시죠?"

라선은 당황했다. 천사 소개로 만난 사람이라고,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환상과 현실이 겹쳐진 공간에 있다고 막연히 믿었다. 하지만 이곳도 결국 현실이었다.

"라선 씨는 기본이 없어요. 동료가 추천한 주식을 제대로 뜯어보지도 않고 구매했죠. 시세 추이, 관련 뉴스를 조금 찾아봤다고 그 주식을 매수할 강한 근거를 얻은 거라 착각하고, 매수한 거 아닌가요. 이런 자세론 무엇을 하든, 놓치고, 잃고, 당하고, 무너지기만 할 뿐이에요. '대충대충, 이거면 됐겠지. 얼추 맞는 것 같은데.'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하고, 기대한 결과물이 나오길 바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에요."

첫 번째 주식 사건은 평생 동안 언제고 따라붙을 것 같았다. 도발이었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식혜의 단맛이 혀에 감돌았지만, 쌀알의 질감만 느껴졌다. 진정하자. 잘못은 내가 했고,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또 잘못은 일어날 것이다.

타아와가 눈을 감고 식혜를 들이켰다. 라선도 남은 식혜를 마저 마셨다. 다시 시작.

"신분증부터 보여주세요."

각진 말투로 라선이 요청했다. 타아와가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그리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알려주세요. 등기부등본 열람하게."

라선을 신분증과 등기부등본 상의 정보를 확인했다. 주민등록증 상의 사진과 지금의 모습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사진 속 타아와는 소년과 노인의 모습 사이의 얼굴이었다.) 동일 인물 범주 안에 들어갔다. 세부 사항과 특약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집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화장실로 가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변기를 내렸다. 수압은 적당했다. 따뜻한 물도 잘 나왔다. 창틀에 결로가 생긴 자국이 있는지 보았다. 깨끗했다. 창문을 열고 닫을 때, 조금 뻑뻑한 감이 있었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서리에 곰팡이가 있는지 살피고, 부엌 서랍장에 난 흠집과 바닥의 긁힌 자국은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꼼꼼히 둘러보고, 돌아와 계약서를 한 번 더 천천히 읽었다.

펜을 들고 라선이 타아와에게 눈짓했다. 

"특약 사항에 '임대인은 임차인에 전입신고 효력이 발생하는 계약 다음 날까지 계약 당시 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와 '임대인은 임차인의 계약 기간 동안 매매계약 체결 및 소유권 이전과 변경, 근저당 담보 설정 시 임차인에게 사전에 미리 고지하여야 한다. 이 경우 임차인에 새로운 임대인 신뢰할 수 없다면 임대차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를 추가하고 싶은데, 괜찮으시죠?"

타아와는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이 싸악 웃었다. 라선이 먼저 서명하고, 타아와가 이어서 서명했다. 계약이 성사되었다. 라선과 타아와는 계약서를 한 부씩 나누어 가졌다.


"짐은 천천히 옮겨도 되지만, 확정일자는 오늘 받으세요. 계약서 챙겨 가는 거 잊지 말고요."

라선은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그리고...?"

"캔은 분리수거해서, 건물 뒤 분리수거함에 넣어주세요."

라선이 바닥에 있는 캔을 집었다.

"마지막으로 토요일에 임장을 다녀오세요."

머리를 들었을 때, 타아와는 사라지고 없었다. 열린 창으로 점박이 고양이가 담장을 뛰어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단방 아파트는 가문역에서 18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역세권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했다. 전속력으로 뛰면 가능할지도. 멀리서 보았을 때 청색으로 칠해진 외관이 어딘가 답답해 보였다. 월방을 구하는 것 말고는 집을 보러 다녀본 적 없었다. 아파트를 보러 가는 건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선택권 바깥의 영역이었다. 서울에선 10년 된 아파트도 5억은 우습게 넘겼다. 단방 아파트 딱 5억에 걸려있었다. 타아와는 집값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지 꼼꼼히 기록해 오라고 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니, 낡은 상가가 먼저 보였다.  1층엔 분식집과 미용실, 치킨집과 소형 할인 마트가 붙어 있었다. '월드 빅 마트'라고 쓰인 빛바랜 간판은 아파트의 연식을 말해줬다. 마트 끝으로 더 걸어가, '단방 부동산'을 찾았다.  안에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선은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중개사와 보기로 약속한 장소는 108동 1-4, 5-8 라인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15분이 더 남았다. 101동을 지나, 102동으로 건너가는 길에 매캐한 냄새가 났다. 동 사이에 있는 벤치에 대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와 백발의 노인이 맞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인은 연초로 도넛 구름을 만들었는데, 여자가 '이열'이라고 감탄하며 키득키득거렸다. 담배 연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라선은 담배 냄새만 맡으면,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간신히 오염된 공기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또다시 담배 연기가 앞에서 밀려왔다.  다른 동 사이의 벤치에서도 세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자들은 대화 없이 각자 폰을 보면서 담배를 빨다, 침을 뱉고, 다시 담배를 빨았다. 끈적한 하얀색 덩어리가 바닥에 찰지게 붙었다. '아'하고 짜증 섞인 한숨이 나올 뻔했다. 쪽방살이라도, 담배 냄새만은 나지 않는 곳으로 구했다. 탁한 연기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을 보기도 전에 정이 떨어졌다.

   108동 1-8라인에 도착해, 중개사를 기다리는 동안 주민이 한 두 명 지나갔다. 한 명은 무관심했고, 다른 한 명은 외지인을 위아래로 훑으며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중개사는 정확히 2시에 나타났다.

"두 달 전까지 5억 2천이었어요. 집주인이 다른 곳에 살 데를 구했는데, 아직도 집이 안 나가서 금액 낮춰서 낸 거예요."

엘리베이터에서 중개사는 가격의 메리트를 강조했다.

"요즘 물건들이 잘 안 팔리나요? 아니면 이 집만 그런 건가요?"

"뭐 전체적으로 다 잘 팔린다고 말하긴 조금 어렵죠. 영끌했던 사람들이 매물을 던지고 있으니까, 지금보다 더 내릴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는 게 사실이에요. 이 집은 그나마 경매로 안 넘어가고, 집주인이 어떻게든 팔아보려고 하고 있어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며, 중개사가 대답했다. 매물은 6층으로 저층이었다. 6층에 내린 후 오른쪽 복도 끝으로 가 608호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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