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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Aug 31.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6화


"들어온 지 3년 됐나?"

"네."

업무 조언을 해주려고 부른 것은 아닐 테다.

"이번 투자 유치에 실패했어 회사 상황이 심각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나가줘야겠어. 지금 나가면 퇴직금은 줄게. 거절하면 줄어들지도 몰라. 인사팀에서 내보내야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투자 유치 실패를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구조조정은 경영진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행위다. 권고사직은 그 책임을 죽어라 일한 실무진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레퍼런스 체크가 들어오면 잘 말해주겠네. 성실하고 우수한 사원이라고."

정말 그럴까. 신 차장의 말에 믿음이 안 갔다. 권고사직을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좋게 이야기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바닥은 좁았다. 한 번 평판이 찌그러지면,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 실력도 없는 애가 나갈 때 깽판치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도는 순간 동종 업계에서는 영영 발을 못 들일 게 분명했다.

"여지가 없을까요."

"미안하지만, 없네."

"언제까지 답을 드려야 하나요."

"언제까지가 아니야. 결정은 끝났고, 서류 제출만 해주면 돼."

현기증이 났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우선 서류를 주시면 보겠습니다."

라선이 비싸게 군다는 듯이, 신 차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 차장은 인쇄한 사직서를 건넸다. 사직서를 받고 소회의실을 나갔다. 조금 전까지 억지로 일으켰던 의욕이 한방에 쓰러졌다. 기획팀 사람이 흘린 농담이 이걸 예고했던 것일까. 자신 빼고 모두가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일을 못해서일까. 대체 얼마나 못했으면 이렇게 잘리는 걸까. 정말 내가 그렇게 쓸모없을까?  라선은 빠르게 자라나는 피해의식을 떨치기 위해 애썼다.


사직서를 가방에 넣고, 휴게실로 갔다. 냉장고에서 계피차를 꺼냈다. 진한 계피향이 코와 목을 휘감으며 속으로 들어왔다. 옅은 매콤한 맛이 혀를 스쳤다. 

"라선 씨, 괜찮아요?"

휴게실로 들어온 규인이 물었다.

"아, 네. 목이 타네요."

"조금 전에 들었어요. 제가 다 미안하네요."

규인은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벌써 말이 나간 모양이었다.

"그게... 차장님이 인수인계받으라고 하셨어요. 언제 시간 되면 말해줘요. 제가 라선 씨 자리로 갈게요."


아.


 이건 실제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 내일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동아줄이 목을 조여 오는 듯했다. 실직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상황이 나빠지면 가장 먼저 해고되는 직군이라는 사실이 자조적인 농담 정도로 여겼던 자신이 순진하게 느껴졌다. 전문성을 기르는 데 안이했던 탓이라고, 뒤늦은 채찍이 거세게 뒤통수를 내리쳤다.

 글 잘 쓰는 개발자는 드물기에 규인은 경쟁력을 가졌고, 비슷한 수준의 역량을 가졌지만 범용성은 떨어지는 자신은 밀려났다.



오늘따라 집에 오는 길이 유난했다. 때마침 가로등도 고장 나, 휴대폰 전등을 켜고 길을 찾아야 했다. 눈먼 고양이가 갈밭 매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점박이 고양이가 옆에서 같이 걷고 있었다. 도착해 문을 열었고, 소년과 노인의 모습이 섞인 타아와가 부엌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 말릴 새도 없었다. 라선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망연히 침대에 걸터앉아 타아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요리는 하는 중에도 타아와의 형체는 이따금 떨리다 제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타아와가 냄비를 책상 겸 식탁 위에 올렸다. 저녁은 생강 우유 라면이었다. 인터넷에서 대량 구매해, 4박스나 쌓여 있는 것이었다. 이 집에서 먹을 거라곤, 이게 전부였다. 천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었다. 생강 냄새를 맡은 라선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책상 겸 식탁 앞에 앉았다. 어느새 타아와는 고양이가 되어 책상 겸 식탁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밥 먹는데 털이 날리지 않을까 신경 쓰였지만, 저녁을 차려준 존재에게 저리 좀 가달라고 할 순 없었다. 

"7,343,657원이에요. 퇴직금. 적지 않은 돈이죠."

타아와가 말했다.

"물론 지금 받는다면요."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할 거예요."

"개인이 회사를 이기는 건 쉽지 않아요. 깔끔하게 나가고 빨리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에요."

합리적인 판단이겠지. 라선도 자신이 진짜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일어난 일이 부당하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이라고.

"억울한가요?"

라선은 답하지 않았다. 타아와는 말없이 기다렸다. 라면은 한 젓가락 먹고, 또 한 젓가락 먹은 뒤 라선이 입을 열었다.

"억울해요. 해고당해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부유하지 않다는 게, 해고가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다투는 것도, 결국 돈이 문제라는 게."

타아와가 수염을 흔들고, 책상 겸 식탁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을 보았을 때,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7,343,657원을 미래 수익을 당겨온 것이라 생각하자. 새로운 일을 반드시 구해야 하고, 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퇴직금은 퇴직금이 아니라 일종의 성과급이다. 3년 동안  씹던 껌 같은 회사를 버텨낸 보상이다. 이직하기 전까지 생활비는 어떻게 하지? 고민하고, 걱정하지 말고, 찾아보자. 

 라선은 퇴사할 때 준비해야 할 것들을 검색했다. 퇴사 전에 챙겨야 할 필수 서류는 경력증명서,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퇴사 전 1년 치 급여명세서, 사직서 사본이 있었다. 이때 사직서에는 '권고에 의한 사직'이라는 문구와 '근로자의 귀책이 없음'이라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가방에서 사직서를 꺼내 해당 문구가 있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받을 것도 못 누리고, 가진 것도 잃는다는 게, 이 사회의 규칙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도 할 것이 많았다. 국민연금 보험료의 75%를 지원받을 수 있는 실업 크레딧을 신청해야 하고, 직장에 다닐 때 내던 건강보험료 수준의 보험료만 낼 수 있게 임의계속가입자 신청도 놓치지 말고 해야 한다. 하나씩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나서, 라선은 책상에서 일어나 어깨 근육을 풀었다. 바보처럼 앉아 있으면 바보가 된다. 바보처럼 서 있어도 바보가 된다. 

 생각해 보면 신 차장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원래 나쁜 사람은 없다. 그는 단순히 회사에 소속된 임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좋은 사람도 회사에서 얽히면 나쁜 관계가 된다. 어떻게 보면 신 차장이 가장 불행할 수도 있었다. 회사 사정이 나빠졌다는 게 사실이라면, 가라앉는 보트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니까. 오히려 침몰하는 배에서 내보내주었다고, 신 차장에게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회사 사정을 전혀 모른 채, 깊은 물속에 빠져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거리에 나앉는 것보다야, 권고사직이 훨씬 나았다. 긍정 회로를 돌린 것인지,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얻은 긍정적인 결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도 유효했다. 낙오감에 허우적대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시간을 쓴다는 건, 남아 있는 생의 일부를 투자한다는 뜻이고, 낙오감에 투자한 시간은 어떤 가치도 창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수익률이 기대되는 것들에 시간을 쓰는 게, 당연하다. 그 당연한 것을, 쉽게 잊는다. 


내일이 기다려졌다. 누구도 상처 입힐 수 없는 나의 내일이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상냥한 성격은 결코 아니었던, 라선이 밝게 웃으며 신 차장에게 아침인사를 하자, 신 차장은 당황했다. 세상 꺼질 듯한 표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 차장님, 소회의실로."

라선이 신 차장을 지나가며 말했다. 신 차장은 알 수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라선의 목소리에 이끌려 소회의실로 갔다. 라선은 회의실 책상 위에 수정한 권고 사직서를 내밀었다. '권고에 의한 사직'과 '근로자의 귀책이 없음'이라는 내용이 추가된 사직서였다. 이것만 보완해 주면 당장에라도 회사를 나가주겠다고, 라선이 말했다. 신 차장은 인사팀에 물어보고 답을 주겠다고 했다. 

 자리로 돌아온 라선은 인수인계서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텍스트와 스크린샷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부분은 비디오 녹화를 통해서 작업 흐름을 보여주고, 필요한 부분에는 강의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껏, 누구도 보지 못한 완벽한 인수인계서가 목표였다. 나는 당신들이 쉽게 버릴 만큼 그런 허접한 사람이 아니다. 버려졌다고 패악을 부리고 떠나는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뒷모습을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 여유가 고갈된 순간에도 후임자를 배려하는 깊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우습게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자신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승격시키고 있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피해의식의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더러운 꼴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결과물은 타인을 위한 모습으로 완성될 테니까. 

 위키 형태로 완성한 노션 페이지 최하단애 날짜와 이름을 적었다. 검은 바탕의 페이지가 비석처럼 보였다. 디지털 비석을 NFT로 만들어 파는 비즈니스 모델을 떠올렸다 접었다. 

퇴근 전 신 차장이 인사팀으로부터 수정된 사직서를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다음날 규인에게 실습 인수인계를 해주었고, 수정된 사직서에 서명을 했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서, 짐을 정리했다. 간소한 살림이라,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피도 여행용 백팩 하나를 꽉 채우는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경비 장비를 작동시키고 사무실을 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문이 열리자 품고 있던 빛을 쏟아냈다. 

그 속으로 라선은 한 걸음 내디뎠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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