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쉽게 봤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비개발직군이었고, 전문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다. 나이가 서른이었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알게 되었다. IT 직종에서 나이만 든 물경력은 사무실 실내 화분보다도 못하다. 6개월 안에는 합격하겠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세 달이 지났고, 세 번의 서류 전형 합격, 세 번의 면접 탈락이 있었다. 세 달 뒤에는 실업급여가 끊긴다. 월세와 생활비를 줄일 수는 없다. 그때는 피가 마르듯 돈이 마를 것이다. 처음 목표는 너무도 당연하게 NKL이었다. 물론 CBDT도 함께 준비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디든'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정말 어디든 갈 수는 없었다. 이번 이직으로 가치가 확정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전 회사보다는 처우가 나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자존심도 한 몫했다.
공기업으로 눈을 돌리는 게 맞을까. 블라인드 채용이니, IT 보다야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공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인적성과 자격증 공부에 들어갈 절대적인 시간이 꽤 될 것이다.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엔 확신이 부족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참았다. 아버지가 언젠가 계곡에서 가르쳐 준 '생존수영'의 시작점이었다.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몸이 안 떠요. 자 라선아, 숨을 크게 마시고 뒤로 누워봐. 아버지의 말에 따라 숨을 가슴이 넣은 뒤, 몸을 뒤로 눕히니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 상태에서 천천히 호흡하는 거야. 지금부터는 10에서 7만큼의 숨은 남겨두고, 3만큼만 뱉었다 다시 마시는 거야. 빠르게. 7을 남기고, 3을 빠르게. 빠르게. 공기를 빠르게 교체하고, 다시 숨을 참았다. 몸은 여전히 떠있었다. 잎새처럼 물에 누워, 최대한 오랫동안 버티기.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것이다.
가다듬고, 재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지치지 않아야 한다.
계속 떨어지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이, 경력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탓하지 말자. 지금 바꿀 수 있는 것은 '포트폴리오'다. 라선은 지원용으로 모아둔 '포트폴리오' 파일을 모두 삭제했다. 백지상태에서 시작하자.
◐
한 달이 지났고, 초초함이 손톱 끝까지 퍼져나가고 있을 때,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돌렸던 열일곱 개의 기업 중 한 기업으로부터 서류 전형 합격 메일을 받았다. 키보드 보안 솔루션으로 유명한 네온시큐였다. 공고의 지원 자격은 "신입, 경력 무관", 직무는 "마케팅, UX/테크니컬 라이팅"이었다.
경력이니 어느 정도는 신입보다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마케팅과 UX라이팅, 테크니컬 라이팅을 하나의 직무로 묶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 직장에서 시키는 대로 일한 덕분에 UX 라이팅은 경험해 본 적 있었다. 마케팅만 공격당하지 않는다면, 해볼 만하다. 잡플랜잇(JOB plan !t) 평점이 2.7인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해도, 그 정도면 평타 정도의 중견 기업이었다. 처우를 비교해 보아도, 전 직장보다는 나았다. 네온시큐는 점점 드림 잡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령 진짜 드림 잡은 전혀 아니면서도. 면접일은 다음 주 수요일이었다. 면접 보기 좋은, 혹요일(Hump day)이었다.
나포에 위치한 사무실은 하트스퀘어빌딩 20층과 21층을 쓰고 있었다. 면접장은 21층 대회의실이었다. 대기실에 들어가 앉았다. 대기실에는 라선을 포함해 6명이 있었다. 복장은 자율이라고 안내받았지만, 자유롭게 입고 온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쓴 훤칠한 키의 남자가 일어나 다과를 집어와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가 과자를 씹을 때마다 나뭇가지를 으스러뜨리는 듯한 소리가 조용한 대기실을 깼다. 덕분에 긴장감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 세 시 정각이 되자, 직원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와 간단히 면접 진행 방식을 설명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고, 면접관 분들이 차례로 간단히 질문할 겁니다. 면접관 분들이 많아서 다소 위축될 수 있으시겠지만, 떨지 말고 차분하게 대답하시면 좋은 결과 있을 거니, 걱정 마세요. 직원은 밝게 웃었다.
옆자리에 앉은 주황 머리 여자가 '감사합니다.'하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주황 머리는 곧은 자세로 앉아 노트를 한 번 보고, 정면을 한 번 보며 입술을 바삐 움직였다. 예상 질문에 답변하는 연습을 하는 듯했다. 약간 붉은 뺨 때문인지, 갓 스무 살이 된 대학생처럼 어리게 보였다. 잠시 후 직원이 돌아와 두 사람을 호명했다. 훤칠한 키의 남자와 맨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나, 밖으로 따라나갔다. 차례로 사람들이 나갔고, 대기실이 비어 갈수록 불안함이 출렁였다가, 가라앉았다. 그다음엔 나겠지. 아마 나일 거야. 그러나 라선의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결국 라선은 마지막 조로 들어갔다. 라선의 짝은 주황 머리였다. 이거 너무 비교되는 거 아냐. 한눈에 보이는 나이 차가 실(失)이면 실(失)이지, 득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경력자다. 나는 경력자야. 라선은 머릿속에서 주문처럼 되뇌었다.
직원이 면접실 문을 노크한 뒤 문을 열었고,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사인을 받고 라선과 주황 머리를 들여보냈다. 회의실 한가운데 놓인 의자 두 개로 두 사람은 향했다. 곧바로 자리에 앉지 않고, 둘은 기다렸다. 다섯 명의 면접관 중 정중앙의 안경 쓴 면접관이 편하게 앉으라고 말했다. 좌장인 듯했다. 라선과 주황 머리는 함께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왼쪽에서부터 딱딱해 보이는 인상의 백발 여자와 스포츠 머리의 젊은 남자, 좌장, 단발머리 여자, 검은 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가 차례로 앉아 있었다. 그리 다정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곧바로 좌장이 자기소개를 시켰다. 라선은 전 직장의 경력을 강점으로 살려 자신을 소개했다. 주황 머리는 아프리카에 IT 기술 보급 봉사를 했을 때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했다. 라선이 듣기에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어서 장단점을 물었고, 평이한, 그래서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주황 머리는 또박또박,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그에 비해 라선은 조금 허둥거렸다. 1 대1 면접이었다면,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남은 질문에 최선을 다하자고 추스릴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옆에 뛰어난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경험을, 주황 머리가 감탄할 정도로 완벽하게 말하고 나서는 다들 펜을 놓고 쉬는 분위기였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좌장이 헛기침을 한 번하고 라선에게 물었다.
"임신 계획 있어요?"
"네?"
"싫으면 대답 안 해도 돼요."
싫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아뇨 괜찮습니다. 임신 계획 없습니다."
"결혼도요?"
좌장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네, 지금은 업무에서 전문성을 키우고 싶습니다."
"라선 씨, 지금 경력직 채용이에요. 전문성을 키우는 게 아니라, 전문성을 보여주셔야죠."
맞는 말이었다.
"안주하지 않고, 성장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역량 있습니다."
옆 자리 단발머리 여자가 크게 하품했다.
"애 낳고, 출산 휴가 내고, 육아 휴직 냈다가 퇴사만 안 하면 돼요."
검은 셔츠 남자가 말했다. 재밌는 농담이라는 듯이 다른 면접관들이 키득거렸다.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사과하시죠."
라선이 미소를 지탱하기 위해 무릎을 꼬집고 있을 때, 주황 머리가 말했다. 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그 말에 검은 셔츠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실제로 그런 케이스가 있어서 하는 질문이에요. 불편하게 듣지 마세요."
"그 질문에 불편하지 않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주황 머리가 온화하게 말했다. 따뜻해서 더 섬뜩하게 들렸다.
"제가 볼 땐 지금 지원자가 면접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만하시죠."
가장 왼쪽의 백잘 여자가 제지했다. 라선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의 합격 여부에 유리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지네만 잘난 줄 안다니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검은 셔츠 남자가 중얼거렸다. 면접은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진짜 웃기지도 않는 인간들이네요."
함께 건물을 나오며 주황 머리 여자가 말했다.
"제가 말해서 주의줄 테니, 걱정 마세요. 다 저런 사람만 있는 거 아니니까요."
라선은 순간 말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주황 머리 여자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 내용은 면접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어긴 면접관에 징계를 내려라는 것이었다. 여자는 통화를 하면서 손인사를 하고는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은 여유가 있었구나.
라선은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걸으면서 먹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벤치에 앉아 있는 천사를 보았다.
민하는 양손으로 찹쌀꽈배기 도넛을 잡고는 고기처럼 뜯어먹고 있었다.
"힘들어 보이네."
"아뇨. 겉보기에만 그럴 걸요."
라선이 김밥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걔 회장 딸이야."
"저도 눈치있어요."
"그리고 너 떨어졌어. 기적을 기대할까 봐 미리 말해줬어."
"눈치 있다니까요!"
라선이 밥알을 튀기며 외쳤다. 민하의 얼굴에 쌀알이 묻었다. 놀란 라선이 황급히 휴지를 꺼내 민하의 얼굴을 털었다.
"사소한 거에 열받지 마. 열받을 일 더 많아. 언제나, 항상, 어느 때나, 매 순간."
민하가 펠리컨처럼 남아있는 꽈배기를 한 입에 꿀꺽 삼키고는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고, 가로등이 켜질 순간이었다.
◑
얼마 후 불합격 통보 메일이 왔다. 어떤 위로의 문구도 없는 통지서였다. 메일창을 닫았을 때, 새로운 메일 도착했다. 발신인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민초율'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