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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Aug 31.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8화


앤젤윙즈 사무실은 반사회 창작물 애호가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평수동에 위치했다. 간판 하나 없이 다 쓰러져 가는 폐공장 같은 건물 2층으로 가자, 녹슨 철문이 있었다.  철문 옆에 달린 인터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민초율 팀장님 미팅으로 왔습니다.

곧 직원이 문을 열고 나와 회의실로 안내했다. 시원한 파도색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초율이 계피생강 스파클링 병을 들고 들어왔다. 취향을 기억해주고 있어서, 신기하고 고마웠다.

"오랜만이에요, 라선 언니!"

"그래 이렇게 보니, 반갑네. 먼저 연락 줘서 고마워."

"링크미(Link-Me)에 구직 상태로 나와 있어서 연락했어요. 드디어 나온 거예요?"

나왔다기보다는 내쫓겼다가 맞지만 라선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뭐 그렇게 됐어..."

"잘했어요. 퀵펜슬 회사 상태가 말이 아니거든요. 지금 당장 파산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신 차장이 했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구나. 신 차장이 오히려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추측을 확신으로 변경했다.

"어디 갈 곳은 정해졌어요?"

"아니, 생각보다 어렵네. 이직."

말을 마치고 옅게 '하하'하고 웃었다. 자조적으로 들리는 웃음이었다.

"요즘 어딜 가나 만만치 않죠. 게다가..."

"게다가 테크니컬 라이터 자리는 진짜 없지."

"한 자리 있어요! 그것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예요. 좋은 테크니컬 라이터도 진짜 없으니까요."

"투자사에 테크니컬 라이터가 필요해?"

라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앤젤윙즈엔 필요 없죠. 대신 저희가 투자한 회사가 테크니컬 라이터를 찾더라고요. '넥스테이트(Nextate)'라고 부동산 앱 '부자고고' 개발 운영하는 회사예요."

"부자고고?"

"좀 생소해도, 부동산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인지도 있어요."

아무렴, 이전에 공부를 위해 역기획했던 앱이었다.

"앱 써봤어. 분석도 해봤고."

라선의 말을 듣고 초율의 눈이 땡글땡글해졌다. 초율이 지닌 수많은 매력 중에 하나였다.

"잘 됐다! 언니 포트폴리오 저한테 보내주세요. 제가 넥스테이트 대표님께 연락해 볼게요."


라선은 고맙다고 인사했다. 온 김에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지만, 라선은 약속이 있다고 그냥 헤어졌다. 약속은 없었다. 조금 숨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기회는 항상 이런 식으로 찾아온다. 준비를 완전히 마쳤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 그러나 반드시 잡아야 할 순간에.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블로그에 올렸던 부자고고 분석 포스팅을 봤다. 포트폴리오로 쓰기에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었다. 독자를 앞에 두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앞에 두어야 한다. 줄기를 잡아 모든 항목을 끌어올린 뒤, 재배치했다. 완벽은 불가하더라도, 최선은 가능하니까.

 부자고고 맞춤 작업물을 완성하고, 메일을 보냈다. mintchoco@angelwings.com 민초는 치약맛이라고 싫다고 하면서, 메일 아이디는 여전히 민초단이네. 잠이 쏟아졌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저는 이단예라고 해요."

넥스테이트 대표가 자신을 소개했다. 단예는 태국계 한국인으로 구름 한 점 없는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민 팀장님으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포트폴리오도 잘 봤고요.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우선 퇴사 이유가 궁금해요."

어김없이 나왔다. 필수로 준비해야 할 질문

"도전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넥스테이트는 현재 프롭테크 시장을 리딩하고 있습니다.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해 소비자 주도의 부동산 시장을 재편하는 것을 넘어서, 최종적으로 금융 서비스, 정부 행정 서비스를 묶어 개인 자산을 통합 관리하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건 개발자와 기획자의 몫인데, 테크니컬 라이터로서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뭔가요?"

"물론 앱서비스 개발과 서비스 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개발자와 기획자입니다. 하지만 결과물인 앱이 사용자와 소통하기 어렵다면, 아무리 제품이 뛰어나더라도 이용 가치는 떨어집니다. 더불어 개발 과정 내에서도 개발자와 기획자를 잇는 커뮤니케이터가 필요하고요."

라선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단예가 미소 지었다.

"다음 주부터 출근 가능하세요? 연봉협상은 이번 주 중으로 진행될 거예요. 문제가 없으시다면 바로 채용하고 싶어 여쭤봐요."

라선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네. 가능합니다."

"좋아요."


"아, 입사 전에 준비해야 될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단예가 사무실 나가려다 멈춘 뒤, 문을 잡은 채로 라선을 돌아보았다.

"츠렌(ชื่อเล่น)이 필요해요. 사내에서는 다 츠렌으로 부르거든요. 제 츠렌은 '리코리타' 줄여서 '리코'라고 해요. 충분히 고민해서 정하셔요. 퇴사 전까지는 못 바꾸니까."

단예, 리코가 나가고 나서 잠시 후 피플팀 팀장 허니맨이 들어와 연봉 협상 일자와 입사 일정을 알려줬다.

"아 참, 츠렌, 한 번 정하면 무를 수 없어요. 저처럼 막 지었다가 후회하시지 마세요."

허니맨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츠렌  태국에서 이름대신 사용하는 별명



타아와 씨는 이름 뜻이 뭐예요?

"히브리어로 욕망(תַּאֲוָה)이요."

타아와가 물고기를 잡듯 베개를 양발로 끌어안았다.

"라선 씨는요?"

"소리 얽힐 라(囉)에 춤출 선(跹)이에요."

"뭔가 꼬불꼬불한 뜻이네요."

"얽히는 소리처럼,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춤을 추며 나아가란 의미예요. 아빠가 음악을 좋아하셨거든요. 최애가 '# Purple Disco Machine'였어요."

"춤을 안 출 수가 없었겠네요."

문득 라선은 자신이 이름이 아버지가 지어준 츠렌처럼 여겨졌다. 이것보다 더 나은 이름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문득 평생 불리게 될 '이름'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내가 짓지 않지만, 내 것이고, 내 것이라 하기엔, 너무도 타인의 것인. 이름이 라선이라고 했을 때, 독특하다.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아버지에게 자랑했을 때, 하얀 미소가 돌아왔다.


연봉 협상에서 서로가 바라는 '금액'이 달라 얼굴 붉히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라선의 경우에는 별 탈 없이 끝났다. 이전 직장보다 꽤 후하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츠렌이었다. 허니맨이 츠렌은 정했냐고 물었다. 라선은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라선을 써도 될까요... 마땅한 츠렌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허니맨이 턱을 만졌다.

"이게 단순히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조직 문화 차원에서 하는 거라...정말 할 만한 게 없으세요?"

설마 이름 문제 때문에 해고당하는 건 아니겠지. 이름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정한 규칙에 반하는 태도를 첫날부터 보이는 건 불복종의 싹을 보인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미 던진 주사위였다.

"네..."

"그럼 어쩔 수 없죠. 라선도는 특이하니까, 츠렌처럼 들리긴 하네요. 리코한테 괜찮냐고 물어볼게요. 그래도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회의실에서 나간 허니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괜찮다네요. 억울하네, 허니맨은 절대 못 바꾸게 하면서."

허니맨이 웃으며 투덜거렸다.

너무 쿨해서, 싱겁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감사해요."


결국 라선은 라선이 되었다. 

기우도 이런 기우가 없었다.



첫 출근날이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라선 뿐이었다. 넥스트테이트의 복장은 이전 직장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다. 반바지에 맨발로 샌들을 신은 사람도 있었다. 라선은 신입사원처럼 공손하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했다.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개발 리더 빼고. 민머리에 무지 티셔츠 검은 후드를 쓴 개발 리더는 사나운 눈으로 라선을 바라보았다. 세안나라고 합니다. 인사를 끝내자마자 세안나는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테크니컬 라이터가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존재가 고집 센 개발 리더였다. 실력이 뛰어날수록, 더 고약했다. 자신 빼고는 다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작자가 아니길, 라선은 기도했다.

  처음 맡은 업무는 초급 사용자 매뉴얼을 최신화하는 것이었다. 지금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간 매뉴얼에는 출시 이후 추가된 기능들이 하나도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 갔다. 기획자는 기획하느라 바쁘고, 마케터는 마케팅하느라 바쁘다. 개발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 보통 일손과 자금이 모자란 중소기업에선 앱을 잘 만들면 매뉴얼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기본이다. 하지만 테크니컬 라이터를 특별히 고용했다. 사용자가 앱을 사용하는 데 느끼는 불편함이 비즈니스 모델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허니맨이 면담 때 얘기해 주었다.

기본적인 분석은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해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역으로 접근한 것이라 정보가 부족했다.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라선은 세안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시간을 뺏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개발 부서의 시간은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 중에 하나니까. 세안나는 자신의 자리로 오라고 했다. 라선이 오자, 세안나가 빈자리의 의자를 끌어다 주었다. 이전에 퇴사한 사람의 자리라고 들었다. 퇴사 사유가 세안나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선에게로 몸을 돌린 세안나가 후드티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버릇인 듯했다. 어떨 때 나오는 버릇인지는 모르지만.

"최종 IA가 언제 제작되었나요? 지금 앱이랑 많이 달라서요."

라선이 물었다.

"처음 런칭 때, 그 이후론 없어요. 서비스 기획자 퇴사해서. 왜, 없으면 못해요?"

세안나가 답했다. 이걸 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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