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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안나가 남긴 것은 원자 모형 같은 무늬가 그려진 은색 USB 드라이브였다. 수상하게, 찝찝한 물건을 주머니에 넣고 라선은 집으로 돌아왔다. 바이러스 같은 건 아니겠지. 끝없는 불신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샤워를 마치고, 노트북을 켰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USB를 연결했다. 직장에 들어가 첫 월급을 받고 아끼고 아껴서 구매했던 노트북이 망가지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USB 명은 FYI(For Your Information)이었다. 그것 참 고맙네. 대체 뭘 넣었기에. 드라이브 안에는 'Friction log'라는 폴더가 있었다. 설마는 설마, 설마였다. 폴더에는 세안나가 직접 작성한 마찰로그가 있었다. 엑셀 파일 첫 번째 시트에는 지난 임장을 위해 앱을 사용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개발한 당사자만이 잡을 수 있는 포인트까지 상세히 기술해 두었다. 총 10개의 시트가 있었고, 안에는 각각 다른 경로로 매물을 비교하는 여정이 있었다. 라선이 찾던 '행위'였다. 좋음을 뜻하는 초록과, 보통을 뜻하는 노랑, 나쁨을 뜻하는 빨강으로 구분된 경험 조각은 실제 사용자가 앱을 사용할 때 겪을 어려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매물 가격을 보고, 지역 내 대장 아파트 가격과 비교하려고 할 때, 동선이 꼬였다는 기록 옆에는 메모로 '기능 간 연결성 개선 시급'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당 부분은 라선도 찾아냈던 페인 포인트(Pain point)였다. 천천히 자료를 살펴보면서, 라선은 앱이 지니고 있는 문제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중첩되는 행위는 단순히 매뉴얼 가이드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감히 제안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급진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단순히 문제에 덧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돈을 받고 일을 한다. 그 돈만큼의 기여를 해야 한다. 맡긴 업무는 초급 사용자 매뉴얼이지만, 업무의 본질은 사용자 경험의 개선이다. 세안나도 같은 결론을 내렸을까. 궁금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하고, 정리하려고 넘어가려던 순간에 새로운 숙제를 받았다. 자신이 멈췄던 곳이 출발점이었다. 구글 Keep을 열어 내일 할 일을 적었다.
개운하게 일어나기, 깨끗하게 식사하기
그리고 집중해서 마무리하기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업무 던지기로 봐야 하나. 내 업무가 맞긴 하니, 갑질인가. 어떻게든 세안나에게 죄목을 붙이고 싶었다. 열 번 못해주다, 한 번 잘해줬다고, 이 사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네,라고 순진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열 번 잘해주다, 한 번 못해줘서 욕 먹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 억울해서. 굴러가는 생각을 멈추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덮었다. 숨이 적당히 막혀 안정감이 들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라선은 주문을 외우며 늪으로 가라앉듯, 천천히 의식의 수면 아래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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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월요일 아침이 왔고, 라선은 미리 회의실로 가, TV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자료를 띄웠다. 곧 리코, 기획팀장 웨일 , 디자인팀장 토월, 그리고 개발리더 세안나가 차례로 들어왔다. 모두 자리에 앉고 나서, 리코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네."
"현재 매뉴얼은 투자 목적의 사용자와 실거주 목적의 사용자를 분리하지 않고 제작되어, 각 기능을 중요도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홈화면 구성 순서대로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데 그칩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사용자에 맞춰 매뉴얼을 두 개로 나누고, 사용자 그룹 내에서도 세부 목적에 따라, 기능 사용 방법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매뉴얼을 수정했습니다."
라선이 두 사용자 그룹의 내의 페르소나에 맞춘 매뉴얼 일부를 예시로 보여주었다.
"먼저 실거주 목적 사용자의 고객 여정에 따라 기능을 소개한 것입니다. 주택 마련의 기본적인 단계는 '예산 세우기, 지역 정하기, 단지 정하기, 실제 집 보기'입니다. 이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 고급 필터 기능을 어떻게 사용해야 원하는 집을 찾을 수 있고, 지도를 활용해 실제 집 모습을 볼 수 있는지 안내하였습니다.
투자 목적의 경우 부동산 시장 전체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지역별 지수 분석을 중심으로 하고, 세부적인 가격 비교 기능을 테마로 묶어 차례로 설명했습니다."
"이전보다 확실히 낫네요."
화면에 뜬 예시를 읽고 나서 웨일이 말했다. 리코와 토월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번 매뉴얼 개선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어떤 문제죠?"
"사용자 매뉴얼로 각기 대상에 맞춰서 기능을 정리해 보여줄 수는 있어도, 실제 앱 사용성을 개선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자고고의 강점인 비교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파트명 검색을 하고 들어가고 확인한 뒤, 다시 나와 시군구 동을 입력하고 해당 아파트를 리스트에서 찾아 비교하기 버튼을 클릭해야, 두 아파트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작업들도 비슷하게 인, 아웃을 반복해야 합니다. 각 기능이 한 번에 이어지도록, 재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지금 앱 자체를 리뉴얼하자고요?"
토월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네,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이 개선된다면, 투자자뿐만 아니라 부동산을 처음 접한 사용자도 손쉽게 여러 요소를 분석 비교하며 매물을 탐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웨일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앱을 다 뜯어고치자고 하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이 보일 것이다. 라선은 사람들의 나빠진 안색을 보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괜히 나섰나. 후회하고 있을 때, 조용히 있던 세안나가 입을 열었다.
"동의합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임장 준비하면서 저도 라선이 지적한 문제 확인했습니다."
"지금 직주근접 매물 추천 기능 개발 중인데 리뉴얼 작업도 병행 가능해요?"
웨일이 세안나에게 물었다.
"우선순위를 따져야죠. 같이는 못해요. 제 결론은 리뉴얼이 시급하다는 거고요. 어차피 리뉴얼이 결정되면, 추천 기능도 새로 구현해서 넣어야 하니 하나만 해야겠죠."
모난 말투로 세안나가 대답했다.
"이건 개발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리뉴얼하면, 우리 디자이너들 다 달라붙어야 해요. 지금 겨우 디자인 시스템 구축하고 있는데."
토월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라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불을 지르고, 불구경 중이었다. 이렇게까지 날카로워질 줄은 예상도 못했는데. 초조해진 라선이 검지손톱을 엄지로 비비고 있을 때, 리코가 말했다.
"필요하면 해야죠. 다 달라붙어서."
차분한 목소리였다.
"세안나, 리뉴얼에 얼마나 시간 소요될 것 같아요?"
"라선이 분석도 끝냈고, 새로운 기본 구조도 초안도 만들어 두었다는 가정 하에, 길어도 세 달."
세안나가 라선에게 공을 던졌다.
"저도 해당 사항 고려해 초안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이건 개인 혼자서 결정할게 아니죠."
웨일이 나무라듯 말했다.
"그러니까 기획팀이 같이 해야죠. 필요성도 꼼꼼히 검토하고, 예산도 확인하고. 물론 디자인팀도요."
리코의 말에 토월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혹시 가능하다면, 오늘 발표 정리해서 전사에 배포해도 될까요. 회사 직원 분들 사용 경험을 먼저 확인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의견 작성 템플릿과 가이드라인도 이미 준비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라선이 말했다.
"준비 많이 하셨네요. 템플릿과 가이드라인은 웨일한테 최종 확인받고 오늘 중으로 공유하세요. 마감 기한은 이번 주 내로 하고요."
리코가 웨일을 보며 말했다. 웨일은 리코가 보내는 신뢰의 눈길을 저버리지 못했다.
"라선, 템플릿이랑 가이드라인 보내주세요."
"네!"
회의가 끝나고, 들어온 순서대로 차례로 회의실을 나갔다. 세안나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라선을 돌아보았다.
"마늘 초콜릿 잘 먹을게요."
빚을 갚기 위해, 새벽에 1등으로 출근해 자리에 올려둔 초콜릿에 세안나가 응답했다. 라선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유치한 기쁨이 터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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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리코의 미소는 더 음흉했다. 허니맨이 보기에. 점심까지 산다고 한 것도 수상했다. 두 사람은 회사 근처 김밥집에 들어갔다. 리코는 치커리 김밥을, 허니맨은 허니 김밥을 주문했다. 츠렌에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기대 이상이야. 테크니컬 라이터가 아니라 테크니컬 커뮤니케이터이던데."
김밥 한 알을 입에 넣으며, 리코가 말했다.
"회의에서 뭘 했기에."
"곧 알게 될 거야. 오늘 중으로 뿌릴 거니까."
허니맨은 리코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라선 소속 부서는 아직도 미정이야? 계속 혼자 두게?"
"애매해. 엄한 곳에 억지로 밀어 넣을 필욘 없지 않을까."
"개발팀으로만 안 밀어 넣으면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엔 기획팀이 가장 안전한 것 같아. 웨일이 관리 하나는 끝내주잖아. 기획서 작성도 라이팅 영역이고."
허니맨의 말을 들은 리코는 잠시 고민했다.
"아니, 세안나 옆에 붙여야겠어."
"뭐? 싸움 붙이려고? 그럴 바에 그냥 독립 체계로 두겠다."
"아, 미리 안 말해주려고 했는데. 먼저 알려주자면 곧 앱 리뉴얼 작업에 들어갈 거야. 그러면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부터 모든 부서가 개발팀이랑 긴밀하게 협업해야 해. 그런데 알다시피 세안나의 소통 능력은 제로야.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라선밖에 없어."
"갑자기 무슨 근거에서?"
허니맨이 의아해했다.
"들었거든. 세안나가 라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거."
리코가 말을 마치고 김밥 꽁지를 입에 넣었다.
"정말?"
"응, 정말."
허니맨은 리코의 말을 믿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릇을 비운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흐음 인사 건은 좀 더 고민해보자... 그래서 이번 점심은 네가 사는 거지?"
허니맨이 선수 쳤다.
"무슨 소리, 남친이랑도 각자 계산해."
리코가 먼저 일어나, 자기 몫을 계산했다.
"결혼해서도 그럴 거야? 통장도 각자 관리하고?"
"무슨 소리, 결혼하면 경제공동체지, 함께 관리해야 돈 모아져. 각자 관리하는 건 그냥 이혼 준비야."
"친구 밥 한 번 사줄 수 있는 거잖아?"
울상을 지으며, 허니맨이 말했다.
"근무시간 중 식사는 비즈니스."
"정 없는 리더는 망한다 기사 공유해 줄게."
허니맨의 저주에 아랑곳하지 않고 리코는 카드를 챙기고 먼저 가게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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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은 피드백을 정확하게 줬고, 라선은 부족한 부분을 즉시 수정해 회신했다. 수정본을 검토한 웨일은 컨펌을 내렸다. 퇴근 한 시간 전, 템플릿과 가이드라인이 메일과 게시판을 통해 전사에 배포되었다. 라선은 늦은 신고식을 치른 기분이었다. 남은 시간도 정신없이 지나갔고, 정신을 차리니 집이었다. 회사 집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살다가 죽는 게 삶일까. 헛헛한 기분으로, 폰에 쌓인 알림을 확인했다. 온종일 업무 하느라, 단 한 건도 보지 못했다. 90%가 쓸데없는 이벤트 알림이었다. 마지막 한 건이 남았고, 라선은 관성에 따라 보지도 않고 왼쪽으로 넘기려고 했다. 그때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급.여.'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