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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Aug 31.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11화


여자를 본 세안나는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여자는 마음에 든 듯했다.

"그러게, 이런 곳에서 볼 줄 몰랐네. 너는 잘 지냈어?"

세안나가 한 템포 늦게 답했다.

"그럼 잘 지냈지. 너 자퇴하고 걱정 많이 했어. 빚은 좀 갚았니?"

걱정했다고는 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세안나가 가만 서 있었다. 로딩이라도 하듯이.

"대표님, 돌아가시죠."

라선이 여자와 세안나 사이로 들어왔다. 대표님이란 말에 세안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나?'라고 얼굴로 말했다. 라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에 안 차실 줄 알았어요. 신축 들어오면 그때 다시 오죠."

"어..."

"친구분, 죄송하지만 저희 대표님이 다음 미팅에 빨리 가셔야 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대표라는 말에 여자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의 기분이 상했다는 걸 느꼈는지, 아이가 안절부절못하며 치마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라선은 재빨리 세안나의 팔을 살며시 당기며, 수행하듯 세안나를 데리고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입구에서 나오자마자 세안나가 라선의 팔을 뿌리쳤다.

"누가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럼 거기서 혼나듯 계속 서 있을 거예요?"

"라선이 뭘 안다고 끼어들어요!"

또다시 선의가 오지랖이 되었다.

"그래요, 아는 거 하나 없는, 타인인 제가 실례했어요. 사과할게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아는 거 하나 없는 타인이 억지로 꾸역꾸역 인사하는 것도 받아주지 않고, 이야기할 때마다 무시하듯 말하고,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처럼 굴면서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별로예요. 최악이에요!"

라선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도와주고 싶었다고요. 그게 좀 잘못됐네요."

라선을 노려보는 세안나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라선은 그대로 길을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갔다. 자신이 주제 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자신을 막대하는 세안나에게도 화가 났다. 재수 없는 세안나의 친구한테도 화가 났다. 그냥 다 화가 났다.


 문을 거칠게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민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선은 인사하지 않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침대 위에 던지고, 의자를 거칠게 끌어다 책상에 앉았다.

 "잔뜩 화가 났네."

 민하가 오로라 색 막대로 손톱을 손질하며 말했다.

 "네, 뭐 보태준 거 있어요."

짝, 민하가 등짝을 떄렸다. '아'하고 라선이 비명을 질렀다.

"싸가지 하고는, 너 친구 없지."

라선은 으르렁거렸다. 민하에게는 가르릉으로 들렸다. 돈이 없으면 어렸을 때부터 어느 정도 관계를 포기하게 된다. 최소한 밥은 같이 먹어야 친해질 텐데, 남들 수준에 맞춰서 식사를 하기엔 그 금액이 너무도 컸다. 자연스럽게 끼지 않았다. 앓는 소리도 한두 번이지, 세 번이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진절머리가 난다. 돈도 없는데, 정신마저 가난해지면 안 된다. 라선에게는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것이 정신을, 감정을, 자존심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 진짜 왜 시비예요!"

양팔을 하늘로 뻗어 올리며 라선이 외쳤다.

"시비 아니고 벌주는 거야. 걔가 괜히 텃 세부리고 아니꼽게 본다고 생각하지?"

민하가 라선의 양 손목을 한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오로라색 막대를 눈앞에다 가져다 댔다. 라선이 손목을 풀기 위해 힘을 줬지만 민하의 손은 더욱 꽉 조여왔다.

"어설프게 친하게 지내려 하지 말고, 가르치려 들지 말고, 힘이 되어 주려고 하지 마, 그냥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해. 그게 진짜 사람 도와주는 거야." 

라선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민하가 말했다.

온몸에서 화가 빠져나갔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엔 라선 혼자였다.



라선이 떠나고 나서, 세안나는 천천히 걸었다. 삼호역으로 내려가지 않고 지나쳤다. 다음 역에서 탈 생각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옛 친구와의  조우가 준 충격은 상당했다. 너무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아직도 비웃는 것 같아서. 라선의 말대로 누군가 끌어내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멍하니 서서 두려운 말들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이제 빚에 쫓기지도 않는데, 아직도 죄지은 아이처럼 움츠리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독을 뱉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바보 같아 보일까 봐. 어느 새부터 인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몇 걸음을 더 걷지 못하고, 댐이 무너진 것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심했다. 세상이 싫어서, 전활 하고 싶었다. 세상이 싫어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세안나는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우리 딸 잘 지내니,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고마워.

언제나 같은 말에 세안나는 울컥했다.

-죄송해요.

세안나가 떨리는 게 티 나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갑자기 왜 죄송해.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났니?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하게 보였다.

-죄송해요. 그때 소리 질러서

그때는 그때밖에 없었다. 

-난 또 깜짝 놀랐잖아. 큰일 난 줄 알았어. 죄송하긴, 아빠가 다 미안하지.

전화기 너머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들렸다. 세안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관심 보이지 않았고, 세안나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곳엔 자신과 아버지만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하면 다음에 밥이나 사주렴

아버지가 농담처럼 말했다.

-꼭 그럴게요. 서울 올라오실 때 얘기해 주세요

-그러마, 저녁 잘 챙겨 먹고 푹 쉬어. 

세안나는 '네'라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에 잔향에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세안나는 겨우 진정했다. 그러고 나서 떠올렸다. 라선을. 나쁜 의도가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은 선을 함부로 넘어오는 건 불쾌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불쾌하게 했다는 것을, 조금은 유하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고등학생 때 성격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그 성격으로 얻은 게 친구로부터의 뒷담화였음에도.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을 때, 점박이 고양이가 다가와 입에 물고 있던 카드로 세안나의 다리를 쳤다. 세안나의 카드였다. 언제 떨어뜨렸지. 세안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뒤, 고양이 입에서 카드를 빼냈다. 얼굴이 꼭 인간처럼 생긴 기분 나쁜 고양이었다. 카드를 챙긴 세안나는 지하철 역으로 걸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 고양이에게 말했다.

"고마워."

점박이 고양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라선은 세안나와 마주쳤다. 라선이 먼저 눈을 피했다. 세안나의 눈동자에서 자신이 보일까 봐. 세안나는 언제나처럼 인사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 내 할 일이나 잘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리코가 임장을 보낸 이유는 '관계 개선'이었을 테지만, 결과는 '관계 악화'였다. 1차 자료는 모두 받았으니, 지금 당장은 부딪치지 않아도 된다. 라선은 그 사실을 위안 삼고, 리코가 과제로 준 임장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것 역시 매뉴얼 작성의 연장선이었다. 사용자 매뉴얼의 흐름은 임장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의 사고 프로세스를 따라야 한다. 임장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앱을 사용할 테니까. 그런데 과연 사용자는 선형적인 과정을 거쳐 임장 보고서를 작성할까. 직접 다시 부자고고 앱만 사용해 임장보고서를 작성하려니, 여러 메뉴를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가야 했다. 메뉴의 인 앤 아웃에는 중심 패턴이 있을 것이고, 개인화된 패턴이 있을 것이었다. 라선은 자신이 매뉴얼의 페르소나를 단순히 '관점' 차원에서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르소나의 '행위'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앱을 사용하는 '행위'는 '관점'에서 시작하지만, '관점'을 파악했다고 해서 앱을 사용하는 '행위'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기존 매뉴얼과 다름없이 작성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매뉴얼이 될 것이다. '관점'은 맞췄지만, '행위'는 놓쳤다. 어제의 자신과 같았다. 업무를 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예술이 아니라도,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은 일정 부분 제작자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한 주가 끝날 때까지, 세안나와 접촉할 일이 없었다. 세안나가 일어서면, 자리에 앉았고, 세안나가 고개를 돌리면, 머리를 숙였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다음 주 초급 매뉴얼 초안 리뷰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전엔 최대한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처음 성과를 보이는 자리이다.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수습기간 3개월. 기대하는 능력치에 미달하는 경우 해고하기 위한 장치이다. 소란을 일으킨 마당에 업무 능력까지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으면, 위태롭다. 초율을 볼 면목도 없고.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일한다는 건, 고역이다. 신뢰가 가장 무서운 적이다. 혼자서 하는 실패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실패는 몇 년이 지나도, 한밤중에 이불과 레슬링을 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실패의 가치를 미화하곤 한다. 그러나 실패는 실패고, 다른 무엇도 아니다. 실패를 이기는 법은 실패를 하지 않거나, 실패를 무시하는 것 말고는 없다. 실패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실패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성공도 무시할 줄 알아야 한다. 성공을 무시한다는 건, 최선을 다하되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최적화된 삶. 타인의 시선에 기죽어 살면서, 온몸으로 깨달은 생존 방식이었다.

 정시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퇴근했다. 전 직장에서 포괄임금제로 공짜 야근에 익숙해진 라선은 아직 정시 퇴근에 시차적응을 하지 못했다. 어물쩍거리다, 짐을 가장 늦게 챙긴 라선은 문을 닫고 나가게 되었다. 전등 스위치를 하나씩 눌러 오셀로를 하듯 백을 흑으로 뒤집었다. 사무실이 완전히 흑이 되었을 때,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라선은 흑을 다시 백으로 뒤집었다. 기척의 주인공은 작은 행성 와펜이 왼쪽 상단에 붙은 백팩에 노트북을 집어넣고 있는 개발리더였다. 누가 불을 끄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세안나는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속도로 짐을 챙겼다. 스위치에 손을 댄 채로, 라선은 본의 아니게 세안나가 사무실에서 나오길 기다리게 되었다. 마지막 퇴실자가 불도 끄고, 경비 잠금도 해야 한다. 그게 조금 전까진 자신이었기에, 그냥 나 몰라라 떠날 순 없었다. 게다가 세안나가 문단속을 잘하고 나갈 것 같지 않았다. 괜히 덤터기를 쓰는 것보다는, 확실히 마무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세안나가 헤드폰을 쓰고 일어나, 입구로 다가왔다. 예상대로 세안나는 인사 없이 그냥 라선을 지나쳐갔다. 이젠 어떤 대미지도 입지 않을 테다. 네가 얼마나 무시하든.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닫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라선은 내일 할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왕재수를. 진짜 제멋대로, 오만방자, 안하무인의 최악이었다.

 1층에 도착했고, 빌딩을 나가려 할 때, 경비직원이 라선을 불렀다.


"저기, 조금 전에 나가신 분이 이걸 드리라고..."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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