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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 말도 일리 있어요. 세안나, 이번 기회에 바람 쐴 겸 임장 다녀오세요. 진짜 매수자의 입장으로. 두 사람 같이"
라운지로 들어론 리코가 말했다.
"농담이죠?"
세안나가 확인했다.
"아니요. 굳이 따지자면 업무지시."
싫기는 라선도 마찬가지였다.
"진짜..로요?"
"임장지는....삼호 펠리스가 좋겠네요. 신축 2만 호 공급에 맞서는 구축 대장아파트!"
리코는 영화 광고 문구처럼 말했다.
세안나가 얼음처럼 굳었다. 리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내일 출근은 삼호 펠리스로 가고, 거기서 퇴근하세요. 중개사 분께는 제가 말해둘게요."
세안나와 라선 사이를 지나 다과 서랍으로 간 리코는 옥수수과자 하나를 집어들고 자기 자리로 갔다.
이게 다 네 잘못이야. 하는 표정으로 세안나가 라선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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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세안나는 삼호역 8반 출구로 나와 삼호 펠리스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까지 7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진짜 역세권이었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문주는 지금 보아도 세련되어 보였다.
오랜만이었다.
세안나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삼호 펠리스는 삼포 주공 1단지였다. 세안나의 아버지는 국내 PC 온라인 게임 회사 맥스노리(Maxnori)의 사장이었다. 오로지 재미로 승부하는 진짜 '게임'을 만드는 맥스노리는 마성의 3N, 3대 체제를 깨뜨릴 기대주로 불렸다. 아버지의 사업이 바람을 타기 시작했을 때, 아파트 재건축 결정이 났다.
지상 5층 70개 동 규모의 저밀도 대단지 아파트의 재건축 소식에 모두가 주목했고, 시공사가 정해지자마자 2억이 올랐다. 곧 사업시행인가가 나자 3억 원이 올랐고, 조합원 동호수 추첨 이후에 또 2억이, 일반분양이 끝났을 때, 3억 원이었던 집값은 13억 원이 되어 있었다. 맥스노리의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삼호 펠리스의 첫 입주자가 되었다. 세안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사립초, 사립중을 나왔다. 아버지를 닮아 일찍부터 개발에 관심이 많았고, 재능도 충분했다. 경기 한양 과학고에 들어가서는 조기졸업 후 한국과학기술원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길이 정해져 있었고, 입학 후 한 번도 학교를 벗어나지 않았다. 정규 수업을 듣고 나서 틈나는 대로, 컴퓨터실에서 매일같이 코드를 짜느라 눈코뜰 새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숙 생활을 해온 탓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옅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었는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부모님께 연락 없이 집으로 향했다. 단지 내 놀이터가 그리웠던 것 같기도 했다. 놀이터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가 저녁이 될 때까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했었다. 가장 빠져 있었던 게임은 'Everything in Orbit'이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 존재들의 궤도를 타고, 세계를 탐사하는 독특한 컨셉의 게임이었다. 코드로 우주를 만들 수 있다. 세안나에게 미지의 세계를, 확실한 물리체계를 재현하는 수단으로써 '개발'을 동경하게 되었다. 푹신한 스펀지로 울퉁불퉁한 동굴벽을 재현해 낸 아늑한 공간은, 그 게임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어준 것은 어머니가 아닌, 처음 보는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집을 얼마 전에 샀다고 말했고, 부모님께 연락해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곧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딸 잘 지내니,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고마워.
-이사했으면, 알려줬어야죠. 지금 집에 왔는데, 아빠 어디세요?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나온다고 말을 하지. 아빠가 데리러 갈 텐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얘기를 그때 하려고 했지.
세안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학교에 갇혀 살았던 세안나는 게임 플랫폼이 PC에서 모바일로 넘어가는 시류에 맥스노리가 올라타지 못했다는 사실과 기우는 사세를 결국 다시 일으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세안나가 누리던 모든 것이 공기처럼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45분이 지나서 이름 모를 구식 자동차를 타고 나타났다. 화가 들끓어 올랐다.
"우리 딸 공부하느라 힘들지. 아빠가 미리 못 말해줘서, 미안해. 나아지고 있으니까 걱정 마."
조수석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망한 거야?"
아버지는 대답 대신 신호등을 봤다. 아직 빨간불이었다.
"우리집 망한 거냐고!"
"사정이 조금 나빠진 거야."
담담하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사 갔다는 집은 허름한 상가 건물의 옥탑방이었다. 집 안은 4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작았다. 세안나의 기준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실감나지 않았다. 온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현실을, 현실이 끌어당길 미래를, 휘말려갈 자신을. 결국 세안나는 잠들지 못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걷다가 새벽이 아침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때 첫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세안나가 현실을 마주 보고,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기숙사로 사채업자가 찾아와, 네 애비 빚을 갚으라고 뺨을 때렸을 때였다. 그게 불법인지도, 신고해서 형을 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 세안나였다. 언제나 무시하는 쪽이었다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난 또 네가 뭐, 튜링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지.' 같은 아파트에서 자라, 같은 사립초, 같은 사립중을 나와, 꽤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자퇴하기 전에 했던 말이었다. 가난은 덫이었다. 내뱉고 싶은 말을 옭아매는. 대꾸 없이 세안나는 자리를 떴다. 평생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확정된 예감이 불처럼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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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앞에, 세안나가 뚫어져라 문주를 보고 있었다. 라선은 바로 인사하지 못하고, 세안나가 고개를 내렸을 때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여전히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 라선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지만,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격언을 씹어 삼켰다.
"일찍 나오셨네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라선이 인사를 건넸다.
"네. 중개사 분께 전화해 볼게요. 지금 가도 괜찮은지."
세안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임장을 빨리 처리해야 잡무로 여기는 듯했다. 중개사가 113동 1호 라인 앞에 있겠다고 했고, 라선과 세안나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라선과 세안나를 본 중개사는 사람 좋게 웃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아도 반드시 갖추게 되는 능력이었다.
"자매세요?"
엘리베이터에서 중개사가 물었다.
"네"
뻔뻔하게 세안나가 대답했다. 실거주 목적인 매수자처럼 행동해라는 리코의 지침을 따른 것이었다. 반면에 라선은 매매 의사 없이 단순히 '임장'만을 목적으로 왔다는 점이 계속 걸렸다. 규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같았지만, 삼호 펠리스의 가격이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더 초초하게 느껴졌다. 중개사가 힐끔힐끔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들키면 어쩌지, 걱정하는 중에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중개사가 문앞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나왔다.
"편하게 둘러보세요."
세안나는 현관 오른편에 화장실과 마주 보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사방이 보드게임으로 가득 찬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너무도 짙은 검정색 이라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보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보드게임방이에요. 신랑이 워낙 광이라서. 분명 별로 없다고 했는데, 결혼하니까 저걸 다 들고 온 거예요."
여자가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딸이 아니라 집주인이었구나, 라선은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가 집주인이란 사실에 놀랐다. 역시 부자는 많고,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세안나는 양해를 구하고, 보드 게임 박스를 몇 개 꺼낸 뒤 벽지를 확인했다. 곰팡이가 났는지 보는 것 같았다. 그다음엔 허리를 숙여 바닥을 만졌다. 임장이 아니라, 수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재를 바꾸셨네요."
일어나면서 세안나가 말했다.
"네 들어올 때 갈았어요. 전주인이 입주 당시 그대로 살고 있었거든요. 흠집이 있는 대로 나서, 안 바꿀 수가 없었죠."
여자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라선은 세안나가 이 정도로까지 알아보고 왔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방을 나와 바로 공용 화장실을 살펴보았다. 목욕탕 대신 샤워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압을 확인하고 자리를 옮겨 거실로 갔다. 가구가 소파와 테이블이 전부라 공간이 더 넓어 보였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는 대리석 상판의 아일랜드 식탁이 있었다. 불규칙한 선형 패턴의 은은한 회색 식탁은 부엌을 한층 더 고급스럽게 보이게 했다. 다음으로 안방에 들어갔다. 발코니로 나가는 커다란 창으로 빛이 내렸다. 안방 화장실에도 목욕탕 대신 샤워부스가 있었다. 평소에 관리를 잘했는지, 물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작업실로 쓴다는 방으로 갔다. 작업실 문을 열자 책상에 놓인 거대한 그래픽 태블릿과 대형 모니터 두 개가 보였다. 웹툰 작가인가, 라선은 추측했다. 이 정도 집을 자가로 가지고 있다면, 꽤 성공한 작가일 테다. 필명이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묻기엔 애매했다. 놀러왔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개인 작업실이라고 했기에, 대충 훑어보고 나가려고 했을 때, 세안나가 말했다.
"콘센트 위치를 안쪽으로 옮기셨네요."
세안나는 책상 아래에 꽂힌 충전기를 가리켰다.
"네, 문 바로 옆에 콘센트 있는 게 불편해 보여서 책상 둘 곳을 미리 정해서 안쪽에다 두었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어릴 때 제 책상도 같은 위치에 있었어요. 그때 콘센트가 아래에 없어서 멀티탭을 끌어다 PC를 썼거든요."
"아, 여기 사셨구나. 어쩐지."
중개사가 그제야 궁금증이 해소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작업실을 보고 나서, 집을 나왔다. 잘 둘러보고 간다고 말하고 아파트 입구에서 중개사와 헤어졌다. 이곳에 살았다니, 라선은 세안나가 달리 보였다. 꼼꼼히 본 건 진짜 살 생각이 있어서였을까. 진짜 부자들은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다는데, 세안나도 그런 부자일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과 매매는 해봤냐고 언성 높인 게 우스워졌다. 매매에서 가격적으로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은 자신일 테니.
세안나와 라선은 왔던 길로 가지 않고 주위를 한 바퀴 돌고 가기로 했다. 한 동을 지나자 축소된 놀이공원 같은 놀이터가 나왔다.
2층 높이에서 세 가지 다른 방향으로 내려오는 회오리 미끄럼틀과 놀이대와 놀이대를 공중에서 잇는 그물 통로, 산악 모형의 클라이밍 존, 집라인과 커다란 원형 트램펄린, 그 뒤에는 실제 돌 질감을 살린 동굴이 있었다. 라선이 살았던 동네에는 놀이터도 공원도 없었다. 삼호 펠리스의 놀이기구들은 어른인 라선이 보아도 재밌어 보였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술래가 된 아이가 놀이대에 팔을 대고 눈을 덮은 뒤, 숫자를 셌다. 아이들은 사방으로 뛰어가 숨었다. 그때 세안나가 동굴로 향했다. 숨바꼭질이라도 할 셈인가. 한 아이가 동굴로 숨기 위해 달려오다, 낯선 이방인을 보고 반대편으로 방향을 돌렸다. 허리를 숙인 세안나는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정말 누가 옆에 있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라선은 천천히 세안나를 따라갔다. 세안나에게 '안 가요?'라고 물으려던 순간, 다른 목소리가 먼저 세안나에게 말했다.
"마효?"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세안나에게 다가갔다. 여자 뒤에는 동굴로 숨으려던 아이가 치마를 잡고 있었다. 세안나는 일어나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를 본 세안나의 눈이 떨렸다. 그 눈동자를 보며, 여자가 비꼬듯 물었다.
"야, 여기서 다시 보네. 반갑다. 잘 지냈어?"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