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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Aug 31.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13화


'3,098,200원''


전 직장보다 약 50만 원이 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코웃음 칠만한 금액일 것이다. 라선은 월급을 받자마자 CMA 계좌에 190만 원을 넣었다. 나머지 110만 원은 전처럼 45만 원은 월세, 20만 원은 식비, 4만 원은 알뜰폰과 인터넷 요금, 7만 원은 교통비, 마지막으로 27만 원은 학자금 대출로 나갈 것이다. 최종 잔액을 미리 따로 빼어 비상금 통장에 넣었다. 급여 정리를 끝낸 뒤, 라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 생활비, 데이트를 하지 않으니, 가능한 금액이다. 전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을 때, 데이트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만나는 횟수를 줄였었다. 보고 싶지만, 만나면 돈이 나갔다. 조금 저렴한 곳을 가는 게 어떨까 제안하니, 남자친구는 자기가 다 내겠다고 했다. 말이 그렇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인은 여유가 있다고 해도 라선의 눈치를 보면서 쓰고 싶은 돈도 안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였다. 배려였다.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몸을 둘렀다.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이랑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었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전 남자친구 생각에서, 손에서 힘이 풀렸다. 소중한 것을 놓칠 때 드는 아찔한 감각이 온몸을 창으로 찌르듯 지나갔다. 다시 숫자를 보자. 라선은 실밥이 터진 기억을 여미기 위해 계좌 잔액을 재확인했다. 숫자를 보면 현실이 보인다. 현실이 보이면, 행동을 해야 한다. 지나간 일을 곱씹는 일은, 잘못된 소비를 반성하는 것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돈으로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담. 


 지난 현금 흐름을 복기하기 위해, 거래 이체 내역을 스크롤하고 있을 때, 고양이 모습의 타아와가 바닥에서 책상 위로 사뿐히 뛰어올랐다.

"해피 페이데이!"

"해피 페이데이."

쾌활한 인사를 해조류 같은 목소리로 받았다.

"좋은 날에 왜 이렇게 풀 죽어 있어요?"

"탈출구가 안 보여서요."

눈을 손으로 가리며 라선이 말했다. 깜깜했다. 이게 미래인가.

"그럼 아까 혼자서 하던 거 이어서 할까요."

스르르 잠들려는 라선의 팔을 꼬리로 때리며 타아와가 말했다.

"푸념이요?"

"아뇨, 재무진단이요."

말을 마치자마자 타아와가 발톱으로 책상을 긁어 4열 20행으로 된 표를 만들었다. 첫 번째 열에 월평균 수입을 항목별로 나눠서 채우고, 두 번째 열에는 월평균 고정 지출, 변동 지출, 저축, 투자 금액을 넣으세요. 세 번째 열에는 현금성 자산, 투자 자산, 연금 자산, 기타 자산을, 마지막으로 네 번째 열에는 부채를 적으세요."

타아와는 깃펜을 내밀었다. 표에 자동으로 항목이 구분되어 나타났고, 라선은 앱을 보며, 하나씩 빈칸에 숫자를 적었다. 숫자를 넣을 때마다 상단에 합계가 자동으로 계산되었다. 자산 부분을 채우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10분의 1토막 난 코니랩스 주식을 발견했다. 작성을 끝내자 표가 공중에 프로그램창처럼 띄워졌다.

"왼쪽 두 열은 현금흐름표고, 오른쪽 두 열은 재무상태표예요. 라선은 소비 습관이 좋아서 탄탄하게 변동지출을 잡아주고 있어요. 훌륭해요. 학자금 대출도 다섯 번만 더 납입하면, 모두 상환하네요. 나쁘지 않아요."

"나쁘지 않다고요? 전체 자산이 2천도 안 되는데?"

"기죽어서 탈출구가 없니, 인생이 망했네, 낙오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정도로 나쁘진 않다는 뜻이에요."

"인생이 망했다고는 안 했어요. 낙오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지도 않았고."

타아와는 라선의 반박을 무시했다.

"결혼 계획 있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라선이 당황했다.

"결혼이요? 좋은 사람 만나면 심적으로는 하고 싶죠. 물적으로 불가능한 게 문제일 뿐."

결혼과 출산은 소비재를 넘어, 사치재가 된 지 오래다. 결혼식 비용만 최소한 3천만 원 가까이 든다. 어떻게든 결혼에 성공했다고 해도, 진짜 문제는 다음부터다. 빌라 월세에서 시작한 부부와, 아파트 자가로 시작한 부부의 생애 주기를 따라가는 경제적, 문화적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태어난 쪽도, 태어나게 만든 쪽도 모두 불행해지는 길로 발을 내딛고 싶은 사람은 없다. 좋아하는 만큼 미래를 생각하게 되고, 미래를 생각하는 만큼, 움츠러들게 된다. 라선은 가난 사람들이 사라지기 좋은 사회에 살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도태될 것이다. 도태되는 개체 수만큼, 또 다른 가난한 사람들이 채워지겠지. 패배주의적 사고가 머릿속 가장 낮은 자리에 웅덩이처럼 고였다.

"가까운 시일엔 없다는 거네요. 그럼 제1순위 재무 목표가 뭐예요?"

"재무 목표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돈이 있으면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단지 돈의 유익함을 생각하고, 무작정 돈이 많았으면 했다. 돈을 모으는 하나의 '목표'는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사람의 영역이었다. 지금껏 라선은 하루하루를 쳐내기도 바빴다. 고민이 필요했다. 타아와는 배를 드러내고 누워 기다려 주었다. 머리를 굴리던 라선이 결심한 듯 말했다.

"집을 사야만 해요."

한 바퀴를 굴러 일어난 타아와가 라선에게 다가와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 색깔이 초록색에서 푸른색,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멋져요. 전면적인 리뉴얼 작업을 해야겠네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타아와가 말을 하다 멈추었다.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라선이 기다렸다. 타아와는 라선의 눈을 그윽하게 보았다.

"어, 오늘 사용량을 모두 소진하셨네요. 라선 씨 더 듣고 싶으면 달란트를 내세요."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라선은 추가 비용을 내지 않고 상담을 끝냈다. 타아와는 아쉽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고는 사라졌다. 



 라선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회사에 파문을 일으켰다. 리뉴얼을 한다고? 갑자기 왜. 아직 할지 안 할지 정해진 건 아니던데. 사람들이 조용히 말을 돌렸다. 회전 초밥처럼 회사를 도는 소문의 중심에는 라선이 있었다. 리코에게서 흘려들었을 때는 그다지 큰 일처럼 느끼지 못한 허니맨은 직원들의 반응에 놀랐다. 라선이 생각보다 꽤 큰 일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리코는 세안나 옆에 라선을 두라고 했지만, 인사담당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라선과 세안나가 붙어 있는 건 오히려 적(敵)을 만드는 일일 수도 있었다. 리코는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면이 있었다. 리코는 리뉴얼 건을 전적으로 웨일에게 위임했다. 적절한 판단이라고 허니맨은 생각했다. 웨일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명색의 기획팀장인데. 

  목요일이 되었고 직원들의 사용 경험 리포트가 모두 제출되었다. 사안의 중요성에 동의한 웨일은 TF 구성을 위해 토월과 세안나, 라선을 불렀다.  그러나 토월은 아직도 불만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구축한 브랜드 디자인과 컴포넌트 하나하나 모두 다 바꿔야 해요. 게다가 아무리 기획 단계를 같이 한다고 해도 UX는 저희가 다 뜯어고쳐야 하잖아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구현은 어차피 우리 쪽에서 하고, 다 뜯어고친 UX도 흐름이 어색할 테니 결국엔 개발이 고생할 거예요. 솔직히 컴포넌트 수정하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브랜드 디자인은 지금 당장 급한 게 아니니, 안 건드려도 되고."

코브라처럼 세안나가 맹독을 뿌렸다. 라선이 미안할 정도였다. 

"그럴 거면, 단순 기능 개선이니 개발 선에서 끝내요!"

토월이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둘 다, 진정 좀 해요. 모든 팀에 지나치게 부담가지 않도록 최대한 효율적으로 진행하면 되잖아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고."

리더답게 웨일이 중재했다.

"우선 제출된 리포트 요약본은 다 보고 왔죠? 라선이 제기했던 문제점과 유사한 패턴이 빈번하게 나왔어요. 이걸 바탕으로 가장 최적화된 구조도를 만드는 작업부터 진행하죠. 여기 하나로 묶는 것이 좋을 것 같은 기능 조합을 분류해서 리스트업 했어요."

웨일이 뽑아온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자료에는 앱에 담긴 콘텐츠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리뉴얼 작업 게시글을 피드백 받았을 때도 느꼈지만, 웨일은 유연하면서도 꼼꼼했다. 45개나 되는 기능의 특성을 분석해 공통적인 성향에 따라 조합을 만들었고, 그것들을 중요도 순서로 나열했다. 덕분에 한눈에 무엇부터 작업해야 하는지 즉각 알 수 있었다. 구조도를 짤 때, 상위 위계에 두어야 할 것들이었다. 어떻게 배치하고 구현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디자이너와 개발자의 의견이 필요했다. 자료를 받아ㅍ든 토월이 천천히 내용을 읽었다. 

"이건 간략하게라도 먼저 몇 개 뽑아서 테스트해 봐야 감이 잡히겠는데. 지금은 너무 막연해요."

곤란한 표정으로 토월이 말했다. 그 말인즉슨 디자인팀에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체념한 듯 토월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지금 바로 프로토타입 만드는 건 너무 급하니까, 조금 더 논리적으로 다듬고 진행하죠. 안 그럼, 고생만 하고, 득은 없을 수도 있으니까. 무리해서 지금 당장 디자인을 무턱대로 새로 변경하는 건 그다지 의미 없을 것 같아요."

세안나가 무심하게 말했다. 같은 말이라도 곱게 하면 좀 좋을 텐데. 토월이 표정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디자인 요소를 최대한 재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하는 게 좋다는 뜻이니, 조금 더 명확히 위계를 살펴보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

라선이 최대한 완곡하게 말을 옮겼다.

"동의해요. 그럼 1번 조합부터 보면서 의견 나누죠."

웨일이 논의를 이끌고 나갔다. 첫 미팅은 그렇게 어떤 기능 조합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검토하는 것으로 끝났다. 회의의 결론은 각 기능 조합을 유연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홈화면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앱 전체의 구조적인 개선이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테다. 기획팀에서 기본적인 WBS(Work breakdown structure)를 만들기로 했고, 각 부서장들이 내부 회의를 통해 조금 더 합리적인 내용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어느 부서에도 속해 있지 않은 라선은 기획팀을 보조해 WBS를 관리하고 전체적인 진행 과정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메인으로 맡게 되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는 조직에서 앱 개발의 문서화는 빈 들판인 경우가 보통이다. 빈 들판 한가운데 떨어진 라선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게 재앙의 방아쇠를 직접 당겼다고 하는 건가. 납구두를 신은 것처럼 무거운 발을 옮기며 회의실을 나갔다. 이제 시작이었다. 근거 있는 걱정을 털어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던 순간, 토월이 불렀다.


"잠시 얘기 좀 하죠."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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