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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트 #11 6화

by 설다람

콩쿠르에서 서란이 친 곡은 카푸스틴의 intermezzo Etude Op. 40 No. 7이었다. 쇼팽이나, 브람스, 슈만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카푸스틴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전략적 선택이었다. 클래식 경연에서 듣기 힘든 곡일 테니, 인상에 안 남을 수가 없겠지.


녀석이 선택한 곡은 쇼팽의 Etude in C minor, Op.25 No.12 "Ocean이었다. 정석 중의 정석. 다이아몬드로 내리쳐도 안 깨질, 탄탄한 실력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분노와 질투심이 가슴 바닥에서 일렁이고 있을 때, 녀석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피아노 앞으로 데려가더니, 말릴 새도 의자에 앉혔다. 예상치 못한 피아노로의 초대였다.


“나 이제 피아노 안 쳐.”


당황한 목소리로 서란이 말했다.


“진짜 1도 못 쳐.”


녀석은 건반 위에 손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도 쳐야, 내려 보내줄 것 같은 태도였다.


“실망할 거야.”


“안 실망해, 기대 안 하니까.”


“너 말고, 내가!”


흥분해서 결국 ‘미’를 쳤다. 그러자 녀석이 ‘미’를 중심으로 코드를 짰다. 그러고는 정박된 배가 물에 흔들리는 것처럼, 같은 자리에서 떠올랐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다. 잔잔히, 또 다정히.


여덟 마디를 쳤을 때, 음이 들어왔다. intermezzo Etude Op. 40 No. 7의 주제 선율이었다. 서란의 손가락이 기지개를 켰을 때, 후드 티를 입은 피아니스트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흘려 치는 부분도 있었고,


말아먹는 부분도 있었다.


손끝이 타는 듯했다.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연주는 끝났지만, 속에서 올리는 잔향에 세포들이 톡톡 터지는 것 같았다, 박수 소리가 들렸다.


“형편없었어.”


서란은 콩쿠르 심사위원 기준에서 평가했다.


“나쁘진 않았어. 15년 동안 안 친 사람치고는.”


녀석은 관찰자 시점에서 평가했다.


얄미운 소리였지만, 밉진 않았다. 오히려 끌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웠다.


“울어?”


“무슨 소리야!”


서란은 고개를 돌렸다. 농담인 걸 알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면, 정말 없던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객석으로 내려와, 서란은 남아있는 진저에일을 마시며 진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 격정적인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호흡. 콩쿠르 대회 때도 그랬다. 이젠 같은 선에 있지 않은데도, 질투 났다.


공기 위로 흐르는 음들이 비스킷 접시와 칵테일 잔을 다독였다. 부엌에선 그릇 씻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몇 명 더 와 자리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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