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활짝 펼쳐보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한두 명쯤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대학원 때부터
가장 어렵고 초라했던 시절의 삶을
함께 채워 나갔던 친구 S가 있다.
S와 나는-
대학원 시절,
기숙사에서 조교로 함께 일을 하며 서로를 알게 되었다.
기숙사 조교들의 특권 중 하나로
희망하는 경우에 조교들끼리 같은 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삶을 대하는 색깔이 비슷했던 우리는
곧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수많은 대학원생들이 그렇듯,
우리도
가벼웠던 지갑을 팔랑거리며
애써 그 시절을 살아냈다.
축하할 일이 생기는 특별한 날엔
영혼까지 끌어모아
치킨 한 마리 값을 만들어 냈고.
이왕 시키는 치킨은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치킨매니아’의 새우치킨으로 시켰다.
치킨 한 마리를 둘만 먹는 법은 없었다.
친했던 친구들을 우리의 좁은 방에 초대해
깔깔거림을 찬으로 삼아 맛있게 나누어 먹곤 했다.
되도록이면
학기초에 배급받은 식권으로 끼니를 채웠지만,
학생도 군인도, 주부도 사식은 늘 그리운 법.
“오늘 떡볶이?”를 외치며
알록달록 수면바지를 배꼽 위까지 끌어당겨 입고는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떡볶이 1인분에 튀김 1인분을 기본으로 사다 먹었지만
조금 무리하고 싶은 날엔 순대도 곁들였다.
그리고 용돈이 바닥을 보이던 어느 날 밤엔
떡볶이도 튀김도 먹고 싶은데,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우리는
대책회의를 끝내고 기숙사 방을 나섰다.
“저어... 사장님....
튀김 1인분에 떡볶이 5백 원어치만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오늘은 돈이 부족해서요....”
돈이 없으면 시원하게 먹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날 밤 우린 지독히도 배가 고팠거나
지독히도 추억이 고팠던 모양이다.
우리가 늘 ‘조폭 아저씨’라고 부르던 떡볶이집 사장님은
1인분보다 더 넉넉한 오백 원어치 떡볶이를 담아 주셨다.
아저씨의 따뜻함과 우리의 무모함 덕분에
지금 이 시간
흐뭇하게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추억으로 남았다.
대학원 졸업 후 임용 준비를 했던 S는 학교 앞에서
작은 원룸을 구해서
같이 임용 고시를 준비했던 친구와 살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
저 멀리 남미의 콜롬비아에서
1년간의 장기출장 같은 직장생활을 마치고 온 나는
한국에 돌아와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포항 본가에서는
취업준비도 미래 준비도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만 같아
일단 학교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얼마간 고모댁에서 얹혀 지냈지만,
자기 방의 반쪽을 내주는 사촌언니에게 너무 미안해서
빨리 그곳을 나오고 싶었다.
마침 S가 학교 앞에서 친구와 자취를 하고 있었고,
나의 딱한(?) 처지를 듣고는
원룸 한 칸을 셋이서 나눠쓰자는 제안을 먼저 해 주었다.
크지도 않은 방에 책상과 미니 냉장고가 있었고,
S와 Y, 그리고 내가 나란히 누우면 빈틈없이 꽉 찼다.
취업준비생이나 대학원생이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각자 본가에서 바리바리 싸온 반찬들로 식탁을 나누었고,
그래도 로망만은 품고 살던 우리는 친한 친구, 언니 오빠들을 불러 귀여운 집들이도 했다.
(다들 잘 살고 계시려나....ㅎㅎㅎ)
가난했지만 마음은 부자였던 우리는
그 당시 서로를 위로해야 할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서로의 등을 토닥였고,
이불을 싸매고 울 때는
말없이 서로의 곁을 지켜주기도 했다.
그때의 초라하고 아름다웠던 우리의 20대가 있었기에
지금의 단단한 우리가 세워졌다.
꼬질꼬질했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우리는
세상 앞에서 잘 나가는 위인이 되진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일들을 해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지금도 힘이 들 때면
그때의 추억을 한 장 한 장 곱씹으며
마음을 데우곤 한다.
그 시절의 초라함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어제저녁 문득,
내 20대를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주었던
친구 S가 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우린 엊그제 만난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통화를 했다.
웃으며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친구가 있음에
참 감사한 저녁이었다.
그 시절의 추억 덕분에
지금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롭게 살찌워질 수 있음을,
그리고 더 감사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