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니엘라 Dec 09. 2020

그런 운명이라는 건 타고나는 걸까?


엄마는 항암 치료 중이시다.
치료를 위해 한 달에 한번 서울에 가시는데,
때론 아빠와 함께
때론 엄마 홀로 움직이신다.


항암에 대해서는 전화로만 듣는 소식이니,
엄마가 힘드신 건 알지만,
그게 어느 정도 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항암을 받고 오시면 일주일에서 열흘간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주로 쉬며 지내신다.


엄마의 항암치료 앞에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고작,
“엄마 힘내세요.
엄마 고생하시네요.
엄마 잘 챙겨 드셔야죠.”
정도의 작은 응원과
KTX를 타고 가실 때면, 기차표를 끊어드리고
하룻밤 묵고 오셔야 할 때면 숙소를 잡아드리는 정도이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병원에 동행을 한다거나,
엄마의 항암치료 후
음식을 해다 나르며 곁을 지킨다거나 하는
시간과 품이 드는 일들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아픈 엄마보다는
눈앞에 있는
번잡스럽기 짝이 없는 딸린 식솔들을 챙기는 일이
시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호들갑 떨지 않는 가족의 무덤덤함과
지독한 항암제가 주는 좌절감으로
엄마는 가끔씩 우울감을 느끼신다.


평소에는 밝은 분이지만,
몸이 가라앉는 그때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아서 힘들어하신다.


그럴 때면 엄마를 위로하며 기도해 드리고,
공감을 해드리기도 하지만
결국 엄마를 일으키는 건 스스로의 의지이다.


엄마를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미안함을 빼고 남은 조각이
엄마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 그리고 걱정으로 채워진다.


왜 엄마에 대해 늘 미안했을까를 떠올려보면,
그건 나와 엄마의 관계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최ㅇㅇ라는 이름 석자를 지닌
엄마라는 사람에 대한 미안함이 더 큰 것 같다.


내가 태어난 이후
줄곧 엄마는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해 오셨다.
언니와 내가 어릴 적엔 우리들을 흠없이 키우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다.


우리 엄마의 자녀로 사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것을 핸드메이드로 누리는 인생이었다.
특히 음식에 있어서는 더욱 유별나셨다.
워낙에 솜씨가 좋으셨던 엄마는  
매 식탁을 정갈하게 차려 주셨다.
음식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엄마가 만든 음식엔 늘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맛도 훌륭했다.


엄마는 간식도 놓치지 않으셨다.
우리가 살던 작은 도시 경북 상주시에
피잣집이 단 하나밖에 없던 시절에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피자 만드는 법을 배워오셔서 집에서 피자를 구워주셨다.(노오븐 피자.)
그것 말고도 엄마의 도전과 정성을 계속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손이 덜 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생이 되었을 때,
작은 이모의 아들,
세 살짜리 이종사촌 동생이 우리 집에 맡겨졌다.
맞벌이로 이모부와 함께 사업을 하던 이모는
사촌동생을 맡길 곳이 없어 우리 집으로 데려오셨다.
사촌 동생은 우리 집의 막둥이로 일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혹은 일 년이 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 자매에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귀여운 남동생이 생겼다.


함께 살던 사촌동생은 다시 이모네로 돌아가고
그러부터 일 년 이 채 되지 않아
이모네의 둘째가 우리 집에 맡겨졌다.
둘째는 이제 갓 백일이 지난 우유냄새가 폴폴 나는 여동생이었다.
엄마는 또다시 육아를 시작했다.
뺀질거리는 두 딸을 키우며,
밤낮없이 돌보아야 하는 조카까지 맡아내셨다.
또 그렇게 우리 집에선 수개월 동안 갓난아기가 키워졌다.


그 이후에도 이모는
짤막하게 몇 개월씩 사촌동생 둘을 모두 맡기곤 했다.
우리는 형제가 둘이었다가 넷이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경기도 안양의 고모댁에 들어가 하숙 생활을 했다.
출세를 꿈꾸며(?) 일찌감치 수도권으로 생활 터전을 옮겨갔다.


언니는 대학 기숙사에
나는 고모댁에 떠나보낸 엄마는 이제 좀 자유를 누리며 살 법도 했지만, 이번에는 외삼촌의 딸이 맡겨졌다.
가끔 집에 오는 나에게는 너무나 귀여운 여동생이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떼를 쓰며 정서적 불안감을 표출해내는 다섯 살 난 여자 아이는 엄마에겐 실로 오래간만의 고된 육아를 경험하게 했다.


세월이 흘러 언니와 내가 일 년 간격으로 결혼을 하고 3개월 간격으로 언니가 먼저, 그리고 내가 다음으로 아이를 낳았다.
엄마의 육아는 다시 시작되었다.
맞벌이를 하는 언니네 식구와 부모님은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또다시 엄마에게 육아권이 온전히 넘어갔다.  


언니가 엄마 아빠의 지붕을 떠난 지 이제 막 한 달이 되었다.
조카는 여덟 살이 되었고 여전히 일주일에 3일은 할머니 댁에 맡겨진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엄마를 만난 30여 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엄마는 거의 쉼 없이 누군가를 걱정하고 돌보며 살아오셨다.
그것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는 동안 엄마의 몸은 병들어 갔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돌보느라,
미처 자기 자신은 돌볼 겨를도 없었던
지난 수십 년의 세월들.


엄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러나 엄마의 따뜻함 때문에
이리저리 남의 자식들까지도 길러내느라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인생의 긴 시간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바치며 살아내는
그런 삶,
그런 운명이라는 게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수십 년간 비슷한 모습으로 나누기만 하고 살아오신 걸까.
마음이 좁고 시야가 좁은 나에겐
엄마가 잃은 것들만 눈에 선하고,
엄마가 가진 인생의 깊이를 반푼 어치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은 엄마는 이제껏 나누며 사는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오신 것이었고, 엄마의 정성과 사랑으로 많은 이들을 바르게 세워내셨다.
엄마는
비록 흠없이 건강함은 남기지 못하셨지만,
사람을 남기셨고,
사랑을 남기셨다.


이러쿵저러쿵 운명을 운운하는 건
그저 속이 얕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나만의 셈법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지고 사신 것이 아니라,
엄마 만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신 것이었다.




* 나의 자랑스러운 엄마를 사랑합니다.
    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주시는 엄마
    고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일인칭 단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