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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Dec 12. 2020

꼬박꼬박 아침밥 챙겨 먹는 애.

매일 아침,
아이들 밥은 뭘 먹이면 좋을까 고민을 한다.
밥과 반찬을 제대로 차려 먹이려니
아침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빵에 잼을 발라주면 첫째가 시큰둥하고,
시리얼을 주면 적당히 잘 먹긴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주는 건 어렵고,
김에 밥을 싸주면 둘째가 새 모이만큼만 먹고,
국에 밥을 말아주면
둘째 아이가 쏟을 위험이 있어
곁에 붙어 앉아 먹는 내내 도와주어야 한다.


늘 아이들 아침밥 고민을 하지만,
결국은 냉장고 형편을 살펴
빵과, 김에 싼 밥과, 시리얼과 국밥을
번갈아가며 내놓는다.


집에서 나가는 시간을 고려해,
바쁘게 아침을 챙기는 일은 1년 365일 중
단 하루도 고민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이들 아침밥을 챙기고 고민하던 중
문득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고등학교 2학년.
부모님이 계시는 포항에서
고모님이 계시는 안양으로 전학을 했다.
아메리칸드림을 접고,
서울 및 수도권 드림을 안고 안양으로 향했다.


고 2 첫 등교일.
ㅇㅇ고등학교 2학년 9반의 마지막 번호인
52번을 받고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처음 배정된 반에는
이미 1학년 때 친해진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멀뚱 거리며 비빌 언덕을 찾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행히 다정한 여자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나의 사투리를 신비하게 바라보며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거의 유일한 강점인 빠른 적응력을 발휘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학급 반장에 당선되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비교적 매끄러웠다.
포항에 살 땐 신비롭게만 느껴지던
서울말을 자근자근 쓰는 그 아이들도
다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큰 고모 댁에서 하숙을 했다.
이제 막 환갑이 되신 고모와 그보다 열한 살이나 더 많으신 큰 고모부, 그리고 고모의 손녀딸 두 명이 살고 있는 집에 방을 한 칸 배정받았다.


나를 고모라고 부르는
고모의 손녀딸들은 꼬마숙녀들이었다.
첫째는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고,
둘째는 다섯 살쯤 되는 꼬꼬마였다.
첫째 조카와는 비교적 잘 지냈다.
내가 집에 있을 때면 “고모~고모~”하며 내 방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작은 조카는 그 나이답게
서랍을 열어 엉망으로 어질러 놓는다거나, 이것저것 쏟아대는 통에 내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는 없었다.


고모네 식구 중에 아침밥을 가장 일찍
그리고 꼬박꼬박 챙겨 먹는 사람은 나와 고모부뿐이었다.
그 당시 내 눈에도 이미 할아버지 같아 보이셨던 고모부는
오랜 건강 유지 비법이 끼니를 잘 챙겨 드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건강했던 여고생인 나도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보내며 거의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아침밥을 챙겨 먹었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아침밥을 잘 챙겨 주신 덕인지 사춘기가 되고 고민거리가 늘어도 밥맛이 없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침밥만큼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왔다.
고모댁에서도 등교 전에 바빠서 세수는 못해도
주시는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말수가 적으신 이북 출신의 고모부와 단둘이 원형식탁에 앉아 동이 트기 전에 아침을 나누었다.
고모는 국에 밥을 말아주시거나 밥을 김에 싸주시거나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침부터 3찬 이상의 반찬에 국이 빠지는 날이 없었고,
어떤 날은 급하게 볶은 김치볶음밥이 나오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아침부터 삼겹살을 구워주시기도 했으며,
가끔 고모부가 좋아하시는 타조알이 반찬으로 나오기도 했다. (나는 타조알 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고모는 2년 이상 조카의 아침밥을 차려 주셨다.
깨끗하게 다려진 교복과 아침밥까지 모두 환갑이 넘은 고모의 몫이었다.


철딱서니가 없었던 나는
시간이 되면 밥은 자동으로 나오고,
깨끗한 교복은 세탁기만 돌리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다림질도 내가 하고,
아침밥도 알아서 차려 먹을 텐데...
뒤늦게나마 고모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그 당시 아침밥을 차려주시고,
조카를 살뜰하게 챙기셨던 고모를 떠올리면
감사와 미안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아이들을 낳아 키워보고,
살림을 해 보고 나서야 그때의 고모의 마음을 좁쌀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지난 일들이지만,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우리 아이들의 아침밥을 챙기며-
문득문득 건강한 주름이 가득해진 고모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고모의 사랑과 관심이
사춘기의 나를 탈없이 키워내셨 던 것처럼,
솜털처럼 뽀얗고 순수한 나의 꼬마들에게도
사랑과 관심만큼은 아낌없이 나눠주리라고
다시금 마음먹어본다.


점심때가 지나기 전에
큰고모께 안부 전화를 드려봐야겠다.

아침밥 꼬박꼬박 먹던 애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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