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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너희에게라면 내 시간을 기꺼이 나눌게.

by 다니엘라


‘시간깍쟁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시간깍쟁이란, 서울깍쟁이라는 말에서 얻어온 말로
시간을 두고 까다롭고 인색하게 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찰떡같이 들어맞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나는 30여 년을 시간깍쟁이로 살아왔다.
내가 가진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 채우고 싶었다.
친구도 좋았지만, 때론 친구와의 만남보다 내가 가진 시간에 내가 계획한 일들을 해내기 위해 만남을 자제하기도 할 정도였다.
내키는 일에 대해서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썼지만,
때론 내 시간을 조금도 나누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겼다.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던 시간이
차츰 남편과 아이들에게로 옮겨 갔다.
그나마 남편은 성인이니 본인의 앞가림만큼은 철저하게 해냈다.
하지만 아이들이란, 24시간을 함께 한다면
엄마의 24시간을 통째로 필요로 할 때가 많았다.


글로 다시 쓰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첫째 아이의 신생아 젖먹이 시절.
안아주면 눈을 스르르 감았고 침대에 내려놓으면
알람이라도 켜지듯 눈을 번쩍 뜨고 울어댔다.
아이가 낮시간 내내 캥거루 케어를 받으며 쪽잠으로 하루를 보내다 보니 그나마 밤잠은 곤히 자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기저귀를 갈아주고 뒤돌아서면
수유시간이 다가왔고,
수유를 마치면 트림을 시키고,
또 뒤돌아서면 기저귀를 갈고 수유를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엄마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내야 하는 일들을
내 몸으로 하나하나 겪어내며,
땀 바가지를 흘려가며 알게 되었다.
육아 선배들은 다들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한 거야.”라는 말은 남발하면서도 왜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미리 해주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내가 어떤 것부터 희생하고,
어떤 것부터 나누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 채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아이를 만나서 얻는 행복감만큼 나의 금쪽같은 시간도 아이를 향해 솔솔 빠져나갔다.
첫 출산 후에는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내 시간이라는 것은 없는 건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육아의 온갖 거추장스러운 일들과
빈틈없이 신경 써야 할 그 어떤 어려운 일들보다
내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되는 일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인생사 대부분의 일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했던가?
육아도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아이가 조금씩 자라 가며 낮잠 시간도 길어지고, 밤에도 사람답게 잘 수 있는 날들의 횟수가 점차 늘어갔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와 내가 시간을 나누어 쓰는 일에 점차 적응이 되어 갔다.


첫 아이 때의 힘들었던 일들이 벌써 잊힌 건지,
그게 아니면,
4인 가족이 되어야 가족의 완성형이라는 생각이
너무나 투철했던 것인지, 첫 아이 출산 4년 만에 둘째 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 땅의 많은 둘째들이 그렇듯 우리 꼬마도 순둥이였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손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셋이서 나눠 쓰던 시간을 이제는 더 아끼고 아껴 넷이서 더욱 사이좋게 시간을 나눠 써야 했다.
첫째 아이와 비슷한 육아의 시기를 반복하고
이젠 첫째 아이가 아홉 살,
둘째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아이들이 좀 자라고 보니, 기저귀 갈고 젖먹이던 엄마의 손은 이제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차원으로 엄마의 손이 오가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들 등교 등원 준비를 돕고
아침밥을 먹여 학교로 보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자리를 대충이라도 정리를 하고 출근을 했다가 퇴근을 하며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귀가 후에는 아이가 원하는 동화책을 읽어주고 색칠공부를 하고, 간식도 꺼내 주며 집안일에도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곧 큰아이도 집안으로 들어서고 그때부터 엄마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쪼개고 쪼갠다.


최근에 인생 첫 축구화를 사게 된 첫째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축구를 하러 나가자고 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이 오고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면
매일같이 축구를 하러 나가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국가대표급으로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이고,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엉덩이파’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의 요구를 열 번이면 열 번 모두 거절하고 싶어 진다.
그럼에도 엄마 라이프 만 6년 차를 넘어선 나는 서서히 아이들에게 시간을 양보하는 법을 배워간다.


엄마에게 함께하는 시간을 요구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빛보다도 더 반짝이는 법이다.
긴 변명도 필요 없이 ‘간절함’ 그대로를 담은 눈빛이다.


지금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아이들이 다시는 같은 눈빛을 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더 자라서
엄마보다는 친구들과의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엄마와의 비밀 이야기보다는
친구들과의 시시콜콜한 농담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시기가 분명 오고 말 것이다.


아이들의 동글동글한 두 얼굴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이 작은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시간이 점점 아깝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진짜 엄마가 되어가나 보다.


아이들 덕분에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는 기쁨을 얻었고,
아이들의 작은 요구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 소중한 귀가 열렸다.


이젠 더 이상 시간 깍쟁이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이들 덕분에,
나의 소중했던 시간도 넉넉히 나누어 가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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