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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엄마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그 말.

by 다니엘라


“엄마가 대신 아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딸아....”
그땐,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약 30년 전,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내가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픈 적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 겉면에 종기가 생겼다.
지금 같으면 곧바로 약을 먹거나 연고를 발라서 간단히 치료할 수 있을 상처였는데, 어쩌다가 상처를 그렇게 크게 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크고 무시무시한 종기가 생겨버렸다.
오른쪽 허벅지 바깥쪽으로는 벌겋게 부어올라 만질 수도 없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생겼고, 허벅지와 함께 온몸으로 열이 올랐다.
허벅지가 너무 아파 정말로 잘 걷지를 못했다.
어쩌면 영영 걷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벅지에는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더 큰 쵸코 캐러멜 모양의 ‘고약’을 붙였다. 지금도 ‘고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신묘한 기능을 가진 고마운 약이었다.
곪은 부위에 ‘고약’을 붙이면 땡땡하게 부어있던 곯은 부위가 조금 더 유들유들 해지며 염증을 짜내기가 수월해진다.


언제나 두 딸들의 일이라면 씩씩하게 거침없이 나섰던 엄마는 내 허벅지의 종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다리를 부여잡고 울며 끙끙 앓는 나를 보며 엄마는
“엄마가 대신 아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딸아.” 하셨다.
상처는 감히 만지지조차 못하시는 엄마는 그저 나보다 더 아파하셨다.
고름을 짜내고 소독하는 일은 아빠의 몫으로 남겨졌다.
한참의 치료 끝에 상처는 깨끗하게 나았지만 세월이 흘러 새끼손톱만 한 유니크한 상처가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남겨졌다.


그때는 내 아픔이 커질수록 작아지는 엄마의 모습이 이상하고 싫었다.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앞뒤가 안 맞는 그 말은 나에게는 위로도 치료도 되지 않았다.
의술의 도움과 면역의 힘으로 내가 아픔에서 벗어날 때쯤 엄마도 다시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대신 아프고 싶다.”던 엄마의 말 때문에 정말로 내가 나은 건지 때가 되어 회복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엄마의 약해진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내 아픔에만 관심이 쏠려있던 나에게도,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토실토실한 아들이 둘이나 생겼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 말이 시시때때로 내 입에서 주문처럼 흘러나왔다.
“요한아, 엄마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어. 아가, 울지 마.”


얼마 전 다섯 살 난 작은 아이의 첫 충치 치료가 있는 날이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마취주사 바늘이 잇몸을 사정없이 찌르는데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아이가, 본격 치료가 시작되자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곁을 맴돌며 “괜찮아, 괜찮아.”하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대기실에서 기다려 줄 것을 요청하셨다.
사실 그렇게 하는 편이 나에게도 나을지 몰랐다.
작은 아이가 고통으로 몸을 비틀며 악을 쓰고 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대기실에 앉아 가만히 두 손을 모았다.


순한 기질의 첫째 아이는 몇 번의 충치 치료를 하면서도 매번 치료를 시작할 때만 조금 울다가 금방 진정하며 상황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그러나 작은 아이는 달랐다.
치료를 하는 20분 내내 악을 쓰며 울었다.
성대 결절이라도 생길 것 같은 날카로운 울음소리였다.


멀리서 두 손을 모은 채 아이의 울음소리만 듣고 있어야 하는 내 마음은 금세 산산조각이 났다.
“엄마가 정말로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아가.”
삼십여 년 전 엄마가 수없이 되내던 앞뒤가 안 맞아 싫어했던 그 말이 내 입에서 주문처럼 흘러나왔다.
그 당시 엄마는 엄마 당신을 위해서가 아닌,
정말로 나를 위해서 그 말을 수도 없이 했던 것이다.
아이의 충치 치료 현장에서 몇십 년 만에 진짜 엄마의 마음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의 젊었던 엄마는 두려움에 휩싸여 아무 소리 나 내질렀던 게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나를 대신해서 아플 수 있다면, 아파주고 싶었을 거고, 진심으로 목숨을 대신할 수 있다면 나를 위해 그것마저도 할 수 있었을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아이가 치료받는 20분 남짓한 시간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이를 대신해 아파주지 못해 미안했고,
아이를 대신해 울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아이의 울음 한토막 한토막에 살을 에는 아픔이 밀려왔다.


내 아이들과 부대껴 살아내며
수십 년 전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어진다.
그리고 엄마의 그 마음을 점점 닮아간다.
내 작고 소중한 아이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보다 더 크게 공감되며
그 아픔을 대신 겪어주지 못함에
눈물 나도록 미안해진다.


‘나’ 하나만 돌보는 것도 바빴던 나에게
소중한 아이들이 생기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챙기게 되었다.
아이들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이
나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고,
아이들의 아픔은
내 아픔보다 더 깊은 아픔이 되었다.


대신 아파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내 아이들 덕분에
나 아닌 다른 이를 넉넉히 이해할 수 있는
귀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파하며, 배워가며
조금씩 엄마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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