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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Feb 26. 2021

나의 오랜 장래희망은 '전업주부만 빼고'였다.

1화) 난 대체 언제부터 워킹맘의 꿈을 꾸게 된 걸까?



초등학교 4학년 여름,
하굣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들어서는데
온 집안이 고요했다.
‘엄마가 또 주무시고 계신 걸까?’ 하며
안방 문을 열었지만 엄마는 없었다.
주방으로 돌아와 보니 식탁 위에 메모와 함께
작은 접시 가득 상투과자가 놓여 있었다.

‘딸, 냉장고에서 수박 꺼내 먹고,
식탁에 있는 간식 먹고 있어.
엄마 교회 모임 다녀올게.’

그 당시 내 로망은
방과 후에 빈 집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다른 일하는 엄마들처럼 우리 엄마도 바쁘게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이면 천 원짜리 한 장을 척척 쥐어주며 ‘오후 간식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지령을 받고 싶었다.
방과 후에는 우리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아 티브이도 마음껏 보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온 동네를 쏘다니고 싶기도 했다.
현관 열쇠를 신발끈에 달아 목걸이로 메고 다니는 것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 무더웠던 날 오후,
나의 로망은 짤막하게나마 이루어졌다.
엄마가 없는 빈 집에 들어섰고, 혼자서 간식을 꺼내 먹었다. 엄마 허락 없이 티브이도 잠깐 틀어보는 호사를 누렸다.


전업 주부였던 우리 엄마는
하교하는 언니와 나를 항상 같은 모습으로 맞이 했다.
어떤 날은 빨래를 널고 있었고, 또 다른 날은 낮잠에 취해 축 쳐진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 했다.


늘 비슷한 모습으로 집 주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며 삶을 엮어내는 엄마에게 무슨 재미가 있었을까 늘 궁금했다.
게다가 엄마의 삶에는 마치 지독한 운명처럼
늘 ‘주렁주렁’ 딸린 식구들이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후,
엄마는 줄곧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해왔다.
언니와 내가 어릴 적엔
우리들을 흠없이 키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우리 엄마의 자녀로 사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것을 핸드메이드로 누리는 인생이었다.
특히 음식에 있어서는 더욱 유별났다.
워낙에 손맛이 좋았던 엄마는
매 끼니를 정갈하게 차려냈다.
음식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엄마가 만든 음식은 늘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맛도 훌륭했다.


엄마는 간식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살던 작은 도시 경북 상주시에
피잣집이 단 하나밖에 없던 시절,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피자 만드는 법을 배워와서는
집에서 피자를 구워냈다. 그것도 노 오븐으로...
그것 말고도 엄마의 도전과 정성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둘째인 내가 손이 덜 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2-3학년쯤 되었을 때,
작은 이모의 아들인 세 살짜리 이종사촌 동생이
우리 집에 맡겨졌다.
맞벌이로 이모부와 함께 사업을 하던 이모는
사촌동생을 맡길 곳이 없어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사촌 동생은 우리 집의 막둥이로 일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았다. 아니, 어쩌면 일 년이 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 자매에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귀여운 남동생이 생겼다.


함께 살던 사촌동생은 다시 이모네로 돌아가고
그로부터 일 년 이 채 되지 않아
이모네의 둘째가 우리 집에 맡겨졌다.
둘째는 이제 갓 백일이 지난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여동생이었다.
엄마는 또다시 육아를 시작했다.
뺀질거리는 두 딸을 키우며,
밤낮없이 돌보아야 하는 조카까지 철인처럼 맡아냈다.
또 그렇게 우리 집에선 수개월 동안 갓난아기가 키워졌다.


그 이후에도 이모는
짤막하게 몇 개월씩 사촌동생 둘을 모두 맡기곤 했다.
우리는 형제가 둘이었다가 넷이었다가를 반복했다.


늘 누군가를 돌보거나 집안을 쓸고 닦는 일로 분주했던 엄마는 가끔 알 수 없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엄마는 2-3주에 한 번쯤은 지독한 몸살로 앓아눕기도 했고, 때론 잔뜩 예민해진 모습으로 온 식구를 집안 대청소에 동참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 우리 자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줄 때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너희들은 꼭 직장을 가진 여성이 되어야 해.”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
주문처럼 외우던 엄마의 그 말은
나에겐 희망이 되기도 했고,
때론 엄마의 행복의 무게를 감히 가늠해볼 수 있는
슬픈 척도가 되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에너지가 넘치는 엄마였고, 햇살처럼 밝은 이미지였기에 엄마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엄마를 좋아했다.
하지만 집에서의 엄마는,
무리할 정도로 집안을 돌보고 자녀들을 돌보느라
본인을 지켜낼 여유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엄마의 행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화목했지만,
집안에 갇혀 ‘엄마’의 역할만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우리 엄마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실제로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바라보는 행복과는 거리가 있었다.
‘최ㅇㅇ’라는 엄마의 이름 석자는
‘엄마이자 아내’라는 이름에 덮여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의 행복을 저울질하던 그때,
나의 마음 가운데 ‘전업주부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일 년에 한두 번씩 장래희망을 적어낼 기회가 생기면 늘 ‘선생님’이라는 세 글자를 또박또박 적어냈다.
당연히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그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두 아이를 키우며 ‘파트타임 계약직’으로
꾸역거리며 살아내는 지금이 되어서야
꿈을 이루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전업주부가 되지 않겠다던 그 꿈은 오래 앓아온 치통처럼
잊힐만하면 찌릿한 아쉬움이 되어 불쑥불쑥 올라온다.
그리고 문득,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찌릿한 아쉬움을
천천히 다듬어 가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아이들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리고 알 수 없는 다양한 이유들로 미뤄왔던
진짜 나를 찾는 작업의 시작점에 서 있다.


이제
전업주부만 아니라면,
뭐든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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