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니엘라 Mar 15. 2021

육아맘, 그리고 집 밖의 공기가 궁금한 날들.


사직서 한 장으로
3년 간의 줄줄이 비엔나 야근 생활을 청산하고
예비맘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정주부'의 타이틀을 걸게 되었다.
거기에 임산부라는 타이틀도 함께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수년 만에 출근길 지옥이 없는 오전 나절을 맞았다.
실로 오래간만에, 아니 어쩌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을 맞이했다.


사직서 한 장만 제출했을 뿐인데,
나에게는 다양한 타이틀이 주어졌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펼쳐졌다.
한 달을 꼬박, 임산부형 낮잠을 즐겼고
밀린 약속들을 챙겨 나갔다.


회사를 그만둔 지 한 달여를 채워가던 어느 날
‘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나서 다시 일을 하려면,
이대로 멈춰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까운 미래의 취업준비를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회화반과 토익반을 동시에 수강했다.
토익반은 오래 지나지 않아 수강을 그만뒀고,
영어회화반은 출산이 임박한 시점까지 이어갔다.
뭐라도 하고 있음이 위로가 되었고,
영어공부라면 태교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지속했다.
나도 다른 워킹맘들처럼 출산 후 3개월이면
어디든 다시 출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영어실력을 키웠다.
영어회화반 같은 클래스의 살가웠던 언니들 덕분에
쫑파티까지 잘 마치고 학원을 떠났다.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며
아이의 존재를 실감해 오다가,
2013년 12월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내 아이를 만나게 된다.
남편은 첫 아이를 보며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비슷한 감정으로 아이를 맞이 했지만
아이를 만난 기쁨과 동시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거운 책임감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우선은,
온종일 나만 바라보며 울고 웃는 아이를 두고
출산 3개월 만에 일터에 나간다는 것이
쉽사리 상상되지 않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먹고 싸고 자는 일로도 하루가 부족한 신생아와
단둘이 집을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러다 영영 집에서 아이만 봐야 되는 건 아닐까?’
‘재취업의 꿈을 다시 펼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이는 예뻤고, 아이 곁에 있는 것이 좋았지만
동시에 내 일터와 인생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6개월 후에는
남편이 다니던 직장의 본사 이전으로
지방으로 옮겨갈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주 조금 더 현실적으로 계산을 착착 해 나갔다.
6개월 후 옮겨갈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안정된 곳이었으면 좋겠다 싶었고,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업무강도가
이전의 직장처럼 높아서는 안되었다.
막연히 공기업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부터 이미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던
만만찮은 공기업 취업준비를 신생아를 키우며 시작했다.
겁은 없었고 희망과 열정만 있었다.


아이가 낮잠 자는 조각난 시간마다 짬을 내어
한국사 공부를 시작했다.
작은 방 하나와 거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주방과 욕실이 전부인
17평짜리 신혼집에 책상을 따로 두는 것은 사치였다.


그리고 아이가 잠든 짧디 짧은 낮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선
작은 상을 펼칠 시간도 아까웠다.
거실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아기 기저귀를 담아두는 리빙박스 위에
책을 펼쳤고 강의를 듣고, 공부를 했다.
학창 시절에 멀리했던 한국사를
아이 키우는 엄마가 되어 다시 시작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공부를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아이를 안아주다가 허리를 크게 다치게 된다.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할 정도로
허리에 큰 통증이 찾아왔다.
3개월여를 재활하며 치료를 받는 동안
근처에 살고 계시던 시부모님께서
매일 같이 오셔서 아이와 나를 동시에 돌보셨다.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한국사 책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이기 시작했고,
아이를 키우며 건강한 몸을 가꾸어 가는 것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 있었다.
한동안 꿈이나 워킹맘과 같은 단어들과는
한 발짝 떨어져 지내며
아이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칙칙해진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며 사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운 지 2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이를 재우고 엉망이 된 거실을 정리하며
문득 내 이름 석자가 그리워졌다.
타인들이 나를 부르는 ㅇㅇ이 엄마라는 그 호칭에도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내 이름 석자가 더 그리워진 것이다.


세 살 난 아이는 통통거리며 잘 걸어 다녔고,
짤막한 의사표현도 가능해졌고,
무엇보다도 어린이집 등원을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공을 살려 스페인어 교육계에서 일을 하는 친구에게
추천받은 스페인어 강사 자리에 지원을 했다.
기업 출강 자리였다.
이력서를 제출했고,  
채용 업체에서 나의 강의 면접도 맘에 쏙 들어했다.
합격이었다.
오래간만에 듣는 합격 소식이었다.
합격을 기뻐하기도 전에
이 일이 성사될 수 없는 이유들이 수두룩하게 떠올랐다.


업무시간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강사 일은 아이가 귀가하는 시간을 훌쩍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직은 어린아이를 어린이집 연장반에 보내면서까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시 기회를 잡는가 했더니,
그 기회를 밀어낸 쪽은 내쪽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그 기회가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 모르겠다.


그 일이 있은 후 한참 동안
감사를 가장한 현실 안주에 만족하며 지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나를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현실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여전히 맹목적으로 안정적인 직장과
아이를 키우며 시간을 쓸 수 있는 직장을 찾았다.
(이러면서 늘 신의 직장만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웹 서핑 중 광고를 접하게 된다.
[1년 풀 패키지 등록 후 합격 시 수강료 전액 환불!]
온라인 공무원 강의 채널이었다.
합격 시 전액 환불이라면,
합격할 이유가 충분했다.
이만한 동기부여가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나의 간절한 마음과 이 정도의 강력한 동기부여라면
나를 움직이고, 지구도 들어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선택제 공무원을 꿈꾸며
아이 등원과 동시에 독서실로 출근을 했다.
집안일은 주로 ‘잠시 미룸’의 상태를 유지시켰다.
아이의 하원 시간 전까지 강의를 듣고 공부를 했다.
하원 하는 아이를 맞이하며 오후 집안일을 시작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또다시 독서실로 향하거나
작은 등을 켜고 식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방대한 공부량에 초반부터 기가 꺾였지만
요령 없이 무식한 수험생으로 한없이 돌진했다.


연습 삼아 첫 시험을 보고
국어 말고는 알고 푸는 문제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한번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씩 공부도 익숙해져 가던 시기에
덜컥! 은 아니고,
늘 계획 중이던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둘째 아이도 잘 보듬어야 했고,
공무원 공부도 해야 했고,
첫째 아이도 잘 돌봐야 하는 시기였다.
하고 싶은 일은 참 많은데,
선택과 집중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질척 질척 공부도 이어가며,
때가 되면 산부인과를 찾아 초음파로 아이를 만났다.
할 건 다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은 없었다.

그 사이 둘째 아이가 태어났고,
산후조리의 종료와 함께
공무원 공부는 다시 시작되었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를 재우며 공부했고,
새벽에 아이가 일어나면 곁에 눕혀 놓고 공부를 했다.
한 번의 시험을 더 응시하고는 스스로 나가떨어졌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외부요인이라기보다는
이번에도 스스로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졌다.
끝까지 거머쥘 생각보다는
‘적당히 해 봤는데 안되길래...’
하는 마음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워킹맘의 꿈을 얌전히 서랍 속에 넣어야 하는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뭐가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내 이름 석자로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두 아이 육아를 이어가며
좋아하는 책이나 읽자 싶었다.
아이를 등원시키는 아침이면
바쁘게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출근하는 워킹맘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냥 즐기며 살 수 있었는데, 자존감이 찰랑 거리며
바닥을 치고 있어서, 그땐 그저 부러웠다.)


그러던 중,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기 한두 달쯤 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 연락을 받게 된다.
사실은 일 년 반쯤 전부터
교회에서 행정 간사로 함께 일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오셨다.
웃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늘 마음속 깊은 곳에 고민으로만 남겨 두었다.
원래부터 뜻이 있는 일이 아니었고,
관심에도 없던 일이라 고민의 카테고리에만 넣어뒀지
깊이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연락을 주신 목사님께서는
시간선택제(파트타임)로 일할 수 있도록 제안을 하셨다.
교회를 돕고 성도들을 도울 수 있으며,
작은 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 감사했고,
아이들이 기관에 가 있는 시간 동안만 일을 할 수 있다니
얼마간 할 수 있는 일로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굵고 짧은 고민 끝에 지금의 직장인
교회 행정 간사의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건 바깥공기를 맡는 워킹맘이 되었다.
내가 꿈꾸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나만의 업무 데스크가 주어졌고,
교통비 조의 작은 주머니의 월급이지만,
오래오래 꿈꾸던 월급 생활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목마름이 채워졌다면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막을 내리겠지만,
아쉽게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일정한 시간에 출근과 퇴근을 되풀이하고
‘ㅇㅇ이 엄마’가 아닌 내 이름과 직책으로 불리고,
내 머리를 또르르 굴려가며 일을 한다.


어디든 출근만 하면 만족이 될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작업을 이제 시작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글을 쓰고 싶다면, 글감 낚시꾼이 되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