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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Mar 18. 2021

내가 말하고 있잖아


내가 말하고 있잖아
정용준 ㅣ 민음사


말을 더듬는 사람은 생각까지 더듬는 걸까?
말수가 적다고 생각까지 못 하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이상하다. 말을 못하는 사람은 할 말도 없는 줄 안다. 표현을 안 하거나 어리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생각도 없고 아이큐도 낮다고 판단한다.......
- 중략 -...... 바보들아. 나는 기억의 천재다.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이 듣는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더러운 가로수처럼 너희들 곁에 서 있지만 너희들이 한 말을 다 기억하고 있단 말이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p.71-72]



정용준 작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와 다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마음속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분류하고,
그들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말을 더듬는 사람은 어쩐지 어눌해 보였고
그 어눌해 보이는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나이를 더디게 먹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몸집이 작고 깡마른 여자 친구였다.
그 아이는 늘 풀이 죽어 있었고, 조금만 큰 소리에도 몸을 움츠리곤 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하기엔 말수가 적어도 너무 적었다. 교실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땐 말을 하지 못하는 줄 알았으니까...
그 아이에게 말을 거는 아이도 잘 없었지만, 혹시라도 말을 걸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응, 아니 정도로만 대답을 했다.
그 당시 활발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그 친구가 왜 그렇게 말을 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3학년 1반의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 아이가 마치 말귀도 못 알아듣는 사람인양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우리와 대화하지 않았으니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왔지만, 아마 그녀는 우리들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한 조각 한 조각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냈을 것이다.
그 친구가 아이큐가 낮다거나 정신지체가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말이란 걸 거의 하지 않았기에 가끔 그 친구의 존재 자체가 잊히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잔인한 사고의 흐름이었지만,
그때의 덜 돼먹은 내 머릿속은
그런 식으로 사고를 해 나갔다.
그 친구는 그저 말하는 것이 조금 어려웠을 뿐
우리와 같은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었다.


이 책은 1급 말더듬증을 겪는 14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 다니며 언어적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소년은 자신을 눈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누구나 자기에게 마음을 주면 사랑에 빠져서 녹아내려버리는 눈사람 같은 사람이라고.


소년에게는
술에 절어 살아가지만, 아들을 홀로 키우며
그 아들의 말더듬증만큼은 고쳐주기 위해
애쓰는 엄마가 있다.
그런 엄마도 눈사람과 비슷한 부류라
쉽게 사랑에 빠지고 절망하고 들뜨는
불완전함의 상징과 같다.


소년을 둘러싼 가정도 불안정했고,
소년이 마음에 품고 있는 세계도 불안정했다.


하지만, 소년은 교정원에서 뜻밖의 안정을 찾는다.
불완전한 이들이 모여 각자의 불완전함이 때론 송곳니처럼 불쑥거리며 올라오지만, 그들만의 조화를 이뤄낸다.
때론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서로의 면모를 보기도 한다.


초반부엔 등장인물과 소년의 마음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느라 더디게 읽히던 글이
중후반부를 넘어서며 속도감 있게 읽히기 시작한다.


단숨에  책을 덮고 나니,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 든다.
진짜로 이 소설은 영화화 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소설이다.
파출소 장면은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해피엔딩을 작정하고 쓴 글이라면 이런 장면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 하며 귀엽게 읽어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초반부의 답답함을 이겨내고 읽었더니,
역시나 읽는 즐거움을 선물 받았다.


가볍게 읽힐지언정
생각할 거리는 무겁게 던져주는 작품이다.
소년이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과정도
전체적으로 깊은 의미를 내포하지만.
나에게는 말을 어려워하는 자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기회가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말더듬증을 품은 사내아이에게
한번쯤 눈길을 떨구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집어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마음이 쓰렸다
차가워졌다
따뜻해졌다를 반복하는
삶은 달걀을 얹은 비빔면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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