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베란다의 스피드렉.
라면 바구니의 허물어진 공간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라면을 사다가 채워 넣는다.
좋아하는 라면을
착착 열 맞춰 채워 넣다가
문득, 라면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이지만,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을 때
쉽사리 ‘라면’이라고 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건강하고 떳떳한 음식은 아닌 게 맞다.
그럼에도 마음으로는
열렬히 애정 하는 음식을 꼽자 하면,
라면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
라면을 처음으로 맛본 것은
초등학생이던 어느 때였던 것 같다.
열라면인지
참깨라면인지,
혹은 삼양라면인지,
그것도 아니면 신라면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엄마, 언니와 나란히 앉아
함께 나눈 라면이 최초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처음 마주한 라면이라는 음식은
흡사 찌개와도 같았다.
김치, 양파, 계란, 대파까지
온갖 건강한 식재료들이 앞다퉈 등판해 있었다.
꼬불거리는 면은
잘 익은 것을 넘어서 살짝 불어 있었고,
국물 맛은 그저 건강한(혹은 건강하기 짝이 없는)
맛이었다.
친정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하는 분인데
이상하게도
라면만큼은 정말 맛없게 끓이셨다.
심지어 엄마가 끓인 라면 때문에
하마터면 라면을 싫어할 뻔했다. ㅎㅎㅎ
그 후 언니와 단 둘이 끓여 먹게 된 라면은
적당히 짭짤했고,
적당히 덜 익은 면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엄마의 통제하에 라면을 먹는 횟수는 정해져 있었지만,
나는 결국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춘기 즈음해서 라면을 좋아하기 시작했으니
수십 년째 라면은 내 곁을 지키는 중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라면은 소울푸드가 된다.
성인이 되고
라면 섭취 횟수의 자율권을 얻고 나서는
기쁠 때나 슬플 때,
그리고 친목을 다질 때에도 라면을 꺼냈다.
대학 기숙사 방에서 외로운 주말 저녁을 보낼 때도
라면은 내 곁에 있었고,
기숙사 친구들과의 친목을 도모할 때도
우린 머리를 맞대고
전기 전골 기를 꺼내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해에는
학자금 대출을 갚아내기 바빠
삶의 질 따위에는 마음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그저 최소한의 비용으로 살아내는 것이
유일한 과제였다.
그래서 지금도 신입으로 갓 채용된 친구들이
힐링여행을 떠나거나,
자취방을 위한 각종 잇템들을
쟁취하듯 사나르는 것을 보면,
그게 그들의 잠시간의 허영일지라도
부러운 동시에 응원을 넣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 해맑은 시기를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젊은 날의 뽀얀 축복이다.
학교 기숙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회사 앞 고시텔에 둥지를 텄다.
1인 1실인 데다 화장실도 딸린,
고시‘원’ 보다는 한층 괜찮다고 알려진
고시‘텔’이었다.
겁도 없고, 돈도 없던 시절이라
계산기를 몇 번 두드려보고는
남녀가 한층을 다 같이 사용하는
고시텔에 덜컥 들어갔다.
인턴 월급의 절반 이상을
학자금 대출 상환으로
꼬박꼬박 은행에 넣었다.
남은 돈으로 고시텔 방값과
생활비를 감당해내야 하던 시절이라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그런데 고맙게도
고시텔에서는 라면이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라면과 계란, 그리고 밥솥의 따뜻한 밥은
언제나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고시텔의 자랑스러운 보급품이었다.
따박따박 월급은 받았지만
통장을 스쳐 빠져나가기 바쁜 돈이었기에,
고시텔에서 제공받는 라면은
여유가 없던 나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라면과 공깃밥으로 밥심을 채웠고,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어렵고 답이 안 나오던 시기를 함께해서였을까
라면은 나에게 특별한 음식으로 남게 되었다.
라면 말고도 먹을 수 음식이 넘치는 우리 집이지만
라면은 언제나 떨어지지 않게 채워둔다.
라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리고 라면을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한참을 기다렸던 동지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
너무나 반갑다.
그리고 그 사람의 됨됨이마저 재평가해버린다.
“내가 면을 너무 좋아해서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 반가워 어깨동무 마저 하고 싶어 진다.
그만큼 라면은
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고
깊은 공감과 위로를 느끼게 하는 음식이다.
라면을 향한 나의 열렬한 마음도
면발의 쫄깃함이나
라면 국물 특유의
뼈를 때리는 감칠맛 때문만은 아니다.
라면에는 따뜻했던 추억이 있고,
지난날의 삶이 녹아 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날이 맑으면 날이 맑아서,
꿀꿀하면 꿀꿀해서
어느 핑계에도 찰떡궁합인 라면이 있어
내 삶은 오늘도 동글동글 위로받으며 잘 굴러간다.
소울푸드가 별건가.
추억이 있고
삶이 있으며,
맛이 있으면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