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다른 날과 같이 편안하게
집에서 가져온 부드러운 아사 면 이불을
몸에 돌돌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퉁퉁퉁, 퉁퉁퉁'
'퉁퉁퉁'
"불이예요!! 나오세요!"
"불이예요!! 어서 나오세요!"
꿈에서 누가 문을 두드린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너무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다.
실제 상황일 리 없다며 꿈속을 헤매는데
곧이어 똑같은,
그리고 더 선명한 소리가 들려온다.
'퉁퉁퉁, 퉁퉁 퉁퉁!'
"불이예요!! 어서 나오세요!"
아차.
이건 꿈이 아니구나.
이불을 걷어차고 방에 불을 켠다.
탁한 공기가 감지된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정말로
화재가 발생했다.
급하게 수건을 챙겨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수건을 물에 적시는 건 잊었다.;;;)
빨리 대피해야겠다며 방문을 열었다가
다시 들어온다.
가방이랑 지갑은 챙겨야지,
아 그리고 삼보 에버라텍 노트북도 챙겨야지..
하며 급하게 '귀중품'을 챙겨 들고
소방대원분들의 지시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간다.
어디에서 불이 난 건지 건물 아래쪽에서는
연기가 올라오고 같은 고시텔 입주민들은
옥상에 흩어져 각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잠시 후 소방대원 한 분의 안내가 이어진다.
고시텔 건물 지하에 있는 이발소(불법 유흥업소)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화재 진화 작업 중이니
옥상에서 조금만 대기를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아- 다행이다.
우리의 보금자리만큼은 안전하다.
우선은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새벽 두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고,
이 시간에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면
큰 걱정을 끼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알려야 했다.
내가 이 화마에서 살아났음을,
생명 연장의 기쁨을
지체 없이 알려야 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여보세요?" (잠에 취한 목소리)
"아빠!"
"어 그래, 무슨 일이야. 몇 시야 지금?"
"아빠 여기 고시텔 건물 지하에서 불이 났는데, 저는 괜찮아요. 아무도 안 다쳤어요. 모두 무사하고 여긴 괜찮아요......"(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궁금하지도 않을 이야기들까지..)
"아이고야! 진짜 괜찮은 거야? 고시텔은 괜찮아?
아이고 감사해라.. 딸아.."
"응 괜찮아요. 얼른 다시 주무세요.
살아있다는 소식 알리려고 전화했어요 아빠."
"그래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아침에 다시 통화하자."
아빠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니
살아 있음이 새로운 감격이 되었다.
그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잠옷 차림으로 무작정 뛰쳐나왔지만,
각자가 무사함을 누구에게라도 알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한 시간쯤 있었을까.
삼사십 분쯤 있었을까.
이제 옥상에서 모두 내려와도 좋다는
소방 대원 분의 말을 듣고,
고시텔 총무님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에도 하얗고 핏기 없던 총무님의 얼굴이
그날따라 더 말갛게 질려있었다.
딱해라...
다시 돌아온 방은
화근 내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지만
공기는 한결 맑아져 있었다.
한두 시간 전의 그 부드러웠던 이불을
다시 감싸 안고 잠을 청했다.
일곱 시쯤 되었을까?
총무님방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불이 난 건 아닌 것 같아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출근길에 나서는데 총무님이 안부 인사를 한다.
"어휴 놀라셨죠?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 네에 저는 괜찮죠."
목이 좀 따끔거린다는 말은
목구멍에서 딱 멈춰서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오늘 하루 조심해서 잘 보내세요."
지난밤의 기억이 꿈속에서의 일처럼
흐릿해진 가운데 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여느 때처럼 이른 출근을 했고,
그날 하루는 대화의 물꼬가 트일 때마다
아껴뒀던 영웅담처럼
간밤의 화재 이야기를 줄줄 풀어헤쳤다.
퇴근길이었다.
고시텔 총무님이 접수처에 앉아 나를 불러 세운다.
"저어 회원님, 여기 이거요.
놀라셨고 불편하셨을 텐데,
사우나라도 다녀오시라고요."
새하얀 봉투를 내민다.
"아..? 아. 네에 감사합니다."
하얀 봉투를 받아 들고
1.5평 남짓 되는 나만의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초록빛 지폐 두 장이다.
지난밤에 겪은 화재에 대한 위로금이다.
고시텔에서 발생한 화재도 아니었고,
고시텔의 부주의랑은 상관없는 화재였을 테지만,
1.5평의 작은 방에 칸칸이 들어차
살아가고 있는 힘겨운 인생들에게 건네는
고시원 측의 위로금이었다.
화재 후 2만 원이라는 위로금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돈만 바라보았다.
밥 한 끼도 아껴 먹던 때라
초록 지폐 두장 만으로도 감사하며 받아야 할지,
아니면 2만 원으로 뭘 하란 말이냐며
총무님 방으로 쫓아가
병원비라도 물어내라고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투명한 물에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작은 물감 한 방울처럼,
생활비에 자연스레 섞여서
언제 어떻게 쓰인지도 모른 채
써서 없앴다.
신입사원 시절,
수개월 간 고시텔 생활을 하던 시기의 일이다.
신도림 역 근처의 작은 고시텔이었다.
월세 보증금을 마련할 여유는 없었고,
공동욕실을 쓰는 고시원에
들어갈 용기도 나지 않던 때에
보증금 없이
고시원보다 10만 원만 더 지불하면
깨끗하고 개인 욕실도 딸린
고시텔이라는 곳에서 살 수 있었다.
그렇게 고민 없이 선택한
최선이자 유일한 나의 보금자리였다.
지금은 희미하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다.
손에 쥔 것은 더 적었지만
감사가 더 많았던 시절이다.
1.5평 남짓한 작은 방 한 칸에
작은 책상 하나,
작은 침대 하나,
작은 화장실 하나,
그리고 공짜 라면과 계란으로
감사한 하루를 꾸렸던
그때 그 시절 덕분에
지금의 따스한 집과
다정한 가족이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그날 일이 떠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