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두 아들의 엄마가 된 나는 어릴 적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목욕탕 토크를 하곤 한다. 목욕탕 토크, 아줌마 토크 또는 주책바가지 토크라 할 수 있는 이 대화법이 나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주책바가지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자 그럼 목욕탕 토크란 무엇인가 하면 -
엄마들이 대중탕에서 처음 본 낯선 다른 엄마와 나란히 앉아 서로의 등과 초록색 이태리 타월을 맡기곤 한다. 그때 서로의 낯선 때를 마주하며 어색함을 깨기 위한 대화를 시작한다. 사실은 어색함을 깨기 위함 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자동발사 토크에 가깝다.
처음 본 사람이고 뭐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된다.
“어머 애기 엄마가 피부가 이렇게 좋아요? 타고났네 타고났어.”
“별말씀을요. 오래간만에 목욕탕에 왔더니… 때가 좀 많이 나오죠?”
부터 시작해서 온갖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급기야는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는 역할까지 척척 해내는 만병통치 대화법이다.
목욕탕이 아닌 일상의 곳곳에서도 목욕탕 토크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굳이 안 해도 되는 혼잣말이라던가, 궁금한 건 망설임 없이 물어본다던가 하는 낯선 이와의 대화를 두려움 없이 이어나가는 것이 목욕탕 토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무적의 목욕탕 토크가 이제는 아주미가 된 내 입에서도 툭툭 튀어나오곤 한다.
그날이 그랬다.
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를 가는데 아이들이 오래간만에 삼각김밥이 먹고 싶단다. 그래 그래, 그럼 엄마가 또 봉사해야지. 아빠와 아이들은 차에 남겨두고 편의점으로 내달렸다. 내달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항상 내달리고 싶어지는 것도 아주미라 그런 건가? 생각을 하며 은갈치 지갑을 들고 최선을 다해 내달렸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참치 삼각김밥이 딱 하나 남아있다. 아- 이봐 이봐 달려도 소용없네.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니….
허탈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보고를 한다. 여기서 참치 삼각김밥을 하나만 사고, 길 건너에 이마트 24로 옮겨가겠다며 동선 보고를 한다.
남편과 전화를 끊고 계산대 앞에 서니 싱긋싱긋 웃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먼저 묻는다.
“좀 전에 삼각김밥 들어온 게 있는데 여기서 하나 꺼내 드릴까요?”
와… 너무 친절하다. 상점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응대해 주시는 분을 뵈었던 때가 언제인지를 애써 기억하려 하며 짧은 순간 감격을 한다.
“네!! 그래 주시면 저는 정말 감사하죠.”
삼각김밥이 담긴 납품 바구니를 들여다보니,
띠롱!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매던 포켓몬 빵이 눈에 들어온다.
“저어… 혹시 포켓몬빵도 살 수 있나요?”
“아, 포켓몬빵은 예약하신 분이 네 분인데 오늘은 세 개 밖에 안 들어와서 힘드실 것 같아요.”
예약하신 분들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계산대 앞에 서니 귀여운 초등학생 네 명이 쪼르륵 서서 기다리고 있다.
상황이 귀엽고 흐뭇해져서 나도 모르게 목욕탕 토크를 시작한다.
“아 여기 계신 분들이군요! 포켓몬 빵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네요.”
“그렇죠 손님.”
“일요일에는 오후에 빵이 들어오나 봐요?”
“네네 맞아요. 일요일에 두시 반까지 오시면 두시 오십 분에 들어오는 빵을 사 가실 수 있어요.”
“아, 그래요? 그럼 다음 주에 꼭 도전해 볼게요. 고맙습니다.”
친절하고도 참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그녀에게 한번 더 반해서 계산을 막 끝냈는데 등 뒤에서 초등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희가 빵 하나 양보할게요. 저희는 같이 나눠 먹으면 돼요.”
이건 또 무슨 감동의 파노라마?!
세상에 포켓몬 빵을 양보하는 대인배 초등학생이 다 있다니. 이쯤 되면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로요? 진짜로 양보를 하는 거예요? 와 너무 착하다… 고마워요 학생들. 진짜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날 다른 일정이 없었다면 그 친구들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쫓아가서 고맙다는 말을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린이들의 양보를 덥석 받아들이고 순식간에 마지막 포켓몬빵 예약자가 된다.
빵 종류는 상관이 없다. 그저 포켓몬이라고 써진 빵을 들고 가면 우리 어린이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내온다. 그 눈빛이 좋아 엄마는 기회가 닿는 대로 포켓몬빵을 사수한다.
어린이들이 내 준 뜻밖의 양보에 감격을 맛보고 목욕탕 토크를 문득 떠올려 본다. 포켓몬 빵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라던가, 다음 주에는 포켓몬빵 구매에 꼭 도전하겠다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 주책스러운 목욕탕 토크가 착한 어린이들을 고민하게 한건 아닌지 조금 미안해진다. 동시에 한없이 가벼울 것만 같던 목욕탕 토크의 위력을 새삼 느껴본다.
목욕탕 토크는 꽤 쓸만한
나만의 제3의 언어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리고 이 세상은 여전히 온기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