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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되었으니 가계부를 써야 합니까?

by 다니엘라


백수가 되었습니다.

백수가 된지는 벌써 2주 하고도 절반쯤 지난 시간이 흘렀네요.

백수라 하니 정말 뭔가 하얀색 동물이 된 것만 같고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야 할 것만 같고 그래서,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고 말해야 할까 봐요.


다시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 첫 2주는 아팠고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러느라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까진 시간이 좀 걸렸어요. 병원에서 누워 지내라 하셨으니 누워 있었을 뿐이었고, 휴가를 가지 않는 게 좋겠다 하니 가지 않았을 뿐이고….

그렇게 멍하니 지내다가 광복절 연휴를 넘기고 나서야 책상에 앉아 지금 나의 위치와 현실을 그려볼 기회가 생깁니다.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으니 적게나마 공급되던 꾸준한 수입이 끊기게 됩니다. 아이들은 자라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답니다. 그리고 10월이면 태어날 아기를 맞을 준비도 살금살금 시작해 봅니다. 둘째가 벌써 여섯 살이니 5-6년 전의 육아 용품이나 아기 옷가지 등은 집에 남아 있을 리가 없고요. 모든 걸 새롭게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기 용품을 준비하는 것도, 그리고 큰 어린이들을 케어하는 것도 돈과는 뚝 떼어내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제는 진짜 주부답게 가계부를 쓰기 시작해야 하는 걸까요?

허리를 억지로 졸라매는 것까지는 해내지 못하더라도 착실하게 가계부는 좀 써나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 더 건강하게 가정경제를 세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고, 가정 경제도 적자만큼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드는 거 있죠.

그래서 저도 이제 가계부를 좀 써야겠습니다.



오래전부터 해왔어야 하는 일들인데 그간에 여러 번 시도와 실패를 거듭했던 가계부 쓰기라서 이번에는 실패 없이 소비기록이라도 써 내려가기 시작해야겠어요.

하다 보면 가계부의 모습을 갖추어 가겠지요?



어릴 적 엄마가 뭔가 꼼꼼하게 적어두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긴 한 것 같은데 그게 가계부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어릴 적 엄마의 가계부 쓰기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아 가계부 쓰기의 달인이 되기도 했다던데, 일단 저는 그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엄마도 아마 지금의 저처럼 쓰다 말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를 반복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

엄마가 가계부 쓰기 숙련자가 아니었던 덕에 저는 또 삶의 한 가지 기능을 스스로 개척해내는 기회를 얻습니다.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는 가계부는 아니었지만 티브이나 책에서 들여다본 특별한 메뉴들의 레시피 노트는 가지고 계셨어요. 글씨가 큼지막했던 엄마는 메뉴 한 가지에 관한 레시피를 쓰는데도 연습장을 몇 장씩 꽉꽉 채워쓰곤 하셨죠. 심지어 어떤 건 아무 데나 (신문이나 우편봉투 같은) 써서 레시피 노트에 아무렇게나 끼워넣기도 하셨죠.

그런 걸 보면 꼼꼼하고 딱 떨어지게 깔끔한 분은 아니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레시피 노트에 기록해둔 메뉴들은 꼭 한 번씩 만들어 주곤 하셨어요. 어느 더운 여름날 고추 잡채를 만든다거나(그런 걸 만드는 날은 집이 더 푹푹 쪘죠.;;;) 최신 재료를 구해다가(미제집에서 산 허쉬 쵸코렛 쵸코 시럽도 있었음) 팥빙수를 만들어 주시기도 했고요. 하여간 무언가는 꾸준히 기록을 하셨고, 그 꾸준한 기록의 덕을 본 건 언니와 저였답니다. (엄마 고마워요!)



가계부는 아니었지만 식탁에 앉아 레시피 노트를 꾸준히 써 오셨던 엄마의 펜 놀림을 기억하며 식탁 위 가계부를 이제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쑥스러워서 블로그에 공개할 자신은 없어요.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으니 자꾸만 할 일들을 만들어내야죠. 지금도 이미 바쁘고 있습니다만…. 가계부를 쓰며 공개할만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생긴다면 글로도 나누어 볼게요.



이제 진짜 다시 돌아온 전업주부가 되었네요.

한없는 여유가 흩뿌려질 줄 알았던 8월이었는데, 생각보다 바쁩니다. 그럼에도 가계부는 써보겠습니다.

오늘 이곳은 비도 좀 뿌려지고 촉촉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요. 실외 온도도 확실히 떨어졌네요.

시원한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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