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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Sep 13. 2020

육아. 아이들과 추억을 나누는 일

아이들과 찹쌀떡 장수를 만난 이야기.


어제저녁, 주방 파업을 선언하고
햄버거를 사다가
네 식구가 둘러앉아 맛있게 나누는 중이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세~~~ 탁!” 에서
“찹쌀~~ 떠~억~~!”으로 바뀌었다.


분명 “세~~~ 탁!”으로 들었는데,
남편은 찹쌀떡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다음의 외침을 듣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였다.


“찹쌀~~ 떠~~ 억!”
이번에는 선명하게 찹쌀떡으로 들렸다.


1,2,3!
나갑시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사장님, 금방 나갈게요!! 가지 마세요!”


팬티 차림의 꼬마들도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아빠를 따라나섰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 그 일에 제대로 동참하기로 한 모양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내려간 사이
찹쌀떡 아저씨를 찾는 팀들이 세 팀이나 더 있었다.
찹쌀떡보다는
추억이 고픈 이들이 모여드는 재미난 상점이었다.

찹쌀떡 장수


남편과 아이들이 몰려가
2팩에 만 원짜리 찹쌀떡을 골라왔다.


한팩에 열개나 들어있고,
그게 두팩이니, 찹쌀떡 하나는 오백 원 꼴.
추억도 건지고 찹쌀떡도 건진 것 치고는 저렴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손 씻기가 바쁘게 모두들 찹쌀떡을 먼저 집어 들었다.


멀리서 내려다보았을 땐
라탄으로 된 가방 같았는데,
남편이 찍어온 사진을 보니
아이스박스를 개조해서 만든 가방이었다.
덕분에 찹쌀떡은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아이들도 뽀얀 찹쌀떡을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다.


우리 부부는 찹쌀떡을 먹으며
어릴 적 추억을 하나씩 끄집어내 아이들에게 나누었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출출한 저녁 무렵
자주 마주칠 수 있는 아저씨들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우리가 울산에 온 지 벌써 6년이나 되었는데,
찹쌀떡 아저씨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니...
언제 또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께
화상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찹쌀~떡~” 흉내를 한 번씩 냈다.


어른들은 자연스레 추억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셨다.
“할아버지가 어릴 적에 말이야~~~”
화상통화라는 집중력 떨어지는 환경 때문에
할아버지는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절반도 하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으셔야 했지만,
아이들은 분명 느꼈을 것이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찹쌀떡 앞에서는
비슷하게 기분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들 추억을 한 보따리씩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
내가 지금의 우리 아이들보다 조금 더 컸을 때,
까만 밤, 골목에서 찹쌀떡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은 떨림이 있는 그 우렁찬 목소리가 나에겐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는 러닝 차림을 하고서라도 달려 나가 찹쌀떡을 사서 들어오셨다.
그때의 찹쌀떡은 기름종이 같은 재질의 포장지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단정하게 접힌 채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찹쌀떡의 맛이나
엄마 아빠의 “라떼는 말이야...”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우렁찼던 찹쌀떡 장수의 목소리와, 슬리퍼를 끌고 급하게 나가셨던 아빠의 모습만 남아 있다.


찹쌀떡 두팩으로
나의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과 그 추억을 나누었으며,  
우리의 새로운 추억도 한 페이지 채워냈다.


아이들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줄,
찹쌀떡과
우리의 추억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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