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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2

by 다니엘라


긴 복도가 늘어선 7층짜리 건물에 방마다 귀가하지 못한 슬픈 어깨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 임시적 코로나 난민들이다. ‘난민’ 이라니…. 그러나 또 난민 말고는 달리 어떤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출국 전 일주일 격리 병동인데, 이 병동을 채운 환자들(?)의 컨디션은 천차만별이다. 날짜별로 층을 나누고, 코로나 증상의 경중에 따라 또 한 번 구분을 해서 병실 배치를 한 모양이다. 나라마다 보건법이 달라서인지 뉴스에서 보던 코로나 격리병동과는 온도차가 확연하다. 음압 병동?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격리 병동이지만 같은 층 내에서는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 적어도 건물 내의 코로나 난민들은 각양각색의 코로나 균을 보유하고 있기에 건물 내에서 균을 주고받는 일까지는 제한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인력의 태부족으로 거기까지는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일지도.


우선 복도를 한 바퀴 돌았다.

복도의 한가운데 공중 전화기가 다섯 대 설치되어 있고, 각 격리자들은 하루에 한 번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벌써 비행기가 떴을 거라 생각하고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들과 남편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르자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속이 쓰렸다.


수화음이 두세 번쯤 울렸을까? 반가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라는 말과 동시에 울음이 터져버린다. 깜짝 놀란 남편은 눈물의 원인균을 찾으려 애쓰는 한편 아내를 토닥이는 일도 병행한다.

차분함을 되찾아 남편에게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고 귀국이 일주일 뒤로 미뤄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하는 짧은 탄식에 이어 “여보는 괜찮은 거예요? 여긴 걱정 말아요. 부모님께 한번 더 부탁드려 볼게요. 아이들에게도 내가 잘 말할게요.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요.”

남편 말처럼 지금은 더 이상 바다 건너 한국 땅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임시 난민으로서 일주일을 어떻게 버텨낼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다.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거두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방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격리 메이트가 배정된 모양이다. 긴 생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는 침대 한 칸에 자리를 잡고 멍하니 앉아있다. 서양인들로만 들끓을 줄 알았던 격리병동에 나 말고 또 다른 아시아인이 바로 건너편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 인가…?’ 나이키 운동화에 콜롬비아 국민 커피 브랜드인 후안 발데스 후드 점퍼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복장으로는 국적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곁눈으로 흘낏흘낏 뜯어본 얼굴에는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일단 인사를 해 보자. 일주일을 버티려면 누구에게든 호감을 먼저 사야 한다.

“안녕하세요!?”


남미에서 헬로(Hello)도 아니고 올라(Hola)도 아니고 당당하게 한국말로 인사를 먼저 건넸다. 같은 민족이기를 바라는 기대감 절반, 그리고 거리낄 것이 없는 아줌마 파워를 절반쯤 실어 인사를 건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본다. 한국인이 아닌 모양이다. (미안합니다….;)

머리칼에 감춰졌던 그녀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자세히 보니 한국인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미소를 장착하고 인사를 건넨다.

“올라!(Hola)!?”

“올라!(Hola).”

이번에는 제대로 된 인사가 돌아온다. 한국인이 아닌 게 확실해졌다.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일단은 비슷한 사정으로 이곳을 배정받았을 테니 코로나 인사말부터 건네보자.

“열이 나요? 어디 아픈데 있어요?”

“열은 조금 나는데, 아픈 데는 없어요.”

하더니 갑작스러운 뭉치 눈물을 뚝뚝 떨군다. 안면의 떨림이 뒤통수로 옮겨가고 뒤통수의 떨림은 어깨로, 그리고 전신을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낸다. “흐엉엉엉엉….”언어는 달라도 울음소리는 세계 공통어가 사용되나 보다. 일단 다독여 주어야 한다. 내가 조금 전까지 겪었던 마음의 풍랑을 지금 막 겪고 있는 그녀를 위로해줘야 한다. 우리는 일단 한배를 탔고. 남은 일주일을 잘 버티려면 멤버 모두가 최상의 멘탈을 유지하며 지내야 한다. 초면에 허그까지는 어렵겠고, 일단 어깨를 살살 두드려준다.

“Esta bien. Bien.(괜찮아요, 괜찮아.)”


한참을 울던 그녀는 서서히 눈물을 거두고는 현실 세계에서의 쑥스러움을 마주한다. 눈가가 붉게 부어오른 그녀가 대책 없이 울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건넨다. 이렇게 한참을 울고도 이목구비에 흐트러짐이 없다. 미인형이다. 보호자가 된 양, 연신 괜찮다며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준다.

대체 어떤 사연으로 왔길래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건지 궁금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진정한 소설쟁이는 상대가 마음을 열고 밑바닥의 이야기까지 끌어낼 수 있도록 이야기 판을 펼쳐줘야 한다. 틀에 박힌 인터뷰 형식으로는 글감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아, 이쯤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를 좀 해야 하나.

애 둘 딸린 낼모레 마흔인 나는 소설가다. 이름만 대면 아는 소설가는 아니다. 초록창에 내 이름을 올려 검색을 하면 나의 첫 소설이 도서 카테고리 및 쇼핑 카테고리에 소개가 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동명의 트로트 가수에 대한 정보가 그득하다. 나는 동명의 트로트 가수보다 무명인 그저 그런 소설가다. 그럼에도 일단 책을 한 권 냈고, 어설프지만 작가라고 불러주는 이들도 있으니 직업적 소설가라고 감히 말해 본다. 첫 소설을 내고 2년간 아무런 출판물도 세상에 내놓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본업은 소설가다. 똥글이든 황금 글이든 매일 키보드 앞에서 한 시간씩 처박혀 무언가를 써내고 있으니 나는 정말로 작가란 말이다.


유럽어를 전공하고 해외 취업도 잠시 해 보고, 무역업계에도 발을 담갔다가 끝도 없는 야근을 피할 방법을 떠올리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결혼을 하며 지방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무역업에서도 손을 털어야 했다. 심심했던 새댁답게 이사 온 지역 엄마들을 대상으로 스페인어 강좌를 열었지만, 수업은 결국 니집 내 집을 오가는 공동육아의 장으로 바뀌어 버렸고, 사업자를 내지 않고 시작한 게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으로 깔끔하게 수업을 접었다. 그리고 수년간 가장 피하고 싶었던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자고 싶을 때 아이의 등을 토닥여 잠이 들고, 아이가 깨면 그제야 아침을 여는 삶의 의욕도 재미도 없이 시간만 까먹는 애기 엄마가 되어 있었다. 깨어 있는 시간이면 나를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결혼이 족쇄가 되어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는 일방적인 불평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울의 골짝에서 나를 구출하려는 남편의 노력은 꾸욱 감긴 나의 눈길을 전혀 끌지 못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둘째 아이 수유를 막 마치고 세수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는데, 거울 앞에 선 사람은 난생처음 본 여자였다. 다크서클이 자리 잡다 못해 완전히 얼굴의 한 부분을 이루었고, 머리는 언제 손질을 한 건지 볼썽사나운 장발이 되어 있었으며, 삐쩍 바른 몸은 ‘사랑의 빵’ 저금통에 붙어 있는 굶주린 여인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꿈 많던 소녀 ‘서연이’는 어디로 간 걸까. 평생 커리어우먼을 꿈꾸던 활발했던 서연이는 어디로 간 걸까. 패기 넘치던 그 서연이는 온데간데없고, 몸과 마음을 바닥에 내동댕이 친 사연 가득한 ‘사연이’만 거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속 이대로 삶을 이어나가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나와 남편,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뽑아내고 있는 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걸치고 있던 우중충한 거적때기 같은 옷을 벗어던지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몸과 마음을 깨우는 작업이 필요했다. 몸을 깨끗하게 씻어 내고는 외출복과 실내복의 경계에 있는 단정한 옷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셨다면, 함께 읽으셔야 할 글이 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는 쓸 테니 독자님은 애정을 담아 읽어주세요.

좋아요, 댓글은 저와 뱃속의 아가를 함께 춤추게 합니다. ^^

https://brunch.co.kr/@felizdani4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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