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가 싶더니
봄의 중턱에 내 생일도 함께 찾아왔다.
지난해까지는 단 세 명의 멤버와 생일잔치를 함께 했는데, 올해 생일잔치의 손님은 최소 네 명이다. 남편과 첫째 아이, 둘째 아이, 그리고 막내까지.
남편에게는 2주 전에 미리 생일 선물을 받았고,
지난 주말부터 생일 식사 비슷하게 매식을 여러 번 이어왔으니 생일이라고 딱히 따로 식당을 가거나 하지는 않기로 했다. 지난 결혼기념일에 가지 못했던 애슐리에 가볼까 했지만, 콧물을 대롱대롱 달고 있는 막내를 생각하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지금은 그저 집에서 편안하게 앉아 가족들과 마음껏 대화하고 아기 똥기저귀 갈아가며 먹는 밥이 최고다.
엄마 아빠를 포함한 가족들의 기념적인 날에는 늘 살뜰히 챙기는 걸 좋아하는 첫째 아이는 생일 이틀 전날 교보문고에 가서 엄마가 필요한 걸 골라 보란다. 애플워치 스트랩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진짜로 골랐다. 스트랩 + 워치 액정보호 커버까지. 한 달 용돈이 3만 원인 첫째는, 엄마 선물을 사는데 만 팔천 원을 시원하게 투척한다. 매주 일요일마다 2-3천 원씩 주일 헌금을 하고 엄마 선물을 샀으니 아이의 이번 달 용돈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이의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러워 온라인으로 장을 보며 아이들의 간식도 몇 가지 더 주문을 한다.
그리고 일곱 살 난 둘째는 엄마 생일 케이크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그리고 2주 전부터 사달라고 했던 공룡 팽이를 이제는 좀 주문해 달라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 대신 돌림노래처럼 부른다. 선물은 받았다 치고, 팽이 하나 사 줘야지 뭐.
생일날 아침은 세 남자가 번갈아가며 눈곱을 막 뗀 얼굴로 다가와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뽀뽀를 선물한다. 귀여운 모닝 구취는 덤이다. 이른 아침부터 내 마음은 이미 벚꽃 잎 색으로 물든다. 와글와글한 아침 축하를 받고 부자 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차차. 막내 예방 접종을 가야 하지.
막내를 카시트에 태워 예방접종을 다녀온다. 콧물이 있어 한 가지만 접종을 하고 나머지 두 가지는 다음번으로 미루고 병원을 나선다.
층간 소음 문제로 아랫집으로부터 완전히 신뢰를 잃은 지 오래지만, 막을 수 있는 건 조금 더 막아보자는 마음으로 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다자녀 가정에 지원하는 층간 소음 매트를 신청하러 간다. 평소와는 달리 아기가 카시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악을 쓰고 운다. 답답한 카시트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 그 사이에 또 컸다는 거겠지. 안쓰럽다가도 귀엽고 귀엽다가도 기특한 막내다.
집으로 돌아오니 점심때가 지나간다. 생일이고 하니 공식적으로 미역국 한 그릇 정도는 먹어줘야겠는데, 미역국을 같이 먹을 친구가 떠오르질 않는다. ‘생일날 미역국 한 그릇 나눌 친구가 없네.’하면서 잠시 자기 연민에 빠졌다가 금방 현실로 복귀한다.
생일 하루 전날 저녁부터 싱크대 배수관이 새고 있어서 싱크대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요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요리를 하지 않으려니 점심을 굶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래도 생일이니 굶는 건 하지 말자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렇게 떠올린 한 그릇 음식이 계란 간장 비빔밥이다. 생일이니 특별히 계란 프라이는 두 개 톡톡, 그리고 흰쌀밥에 간장과 참기름 똑똑 흘려서 쓱싹거리며 비벼 먹으니 밥이 밥도둑이고, 내 입이 밥도둑이다.
아이들은 아침에 엄마의 생축을 외친 이후로는 어제와 같은 날처럼 엄마를 대한다. 생일자는 좀 더 배려해 주고 후하게 대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자비 없는 아들들 같으니라고. 둘째는 하원과 동시에 놀이터 뺑뺑이를 돌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아파트 광장. 아기 띠를 두르고 작은 아이의 개미 사냥에 호응을 한다.
한참을 그렇게 노는데 첫째 아이의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이모 저 3단지에 놀러 가도 되나요?(이삭이네 놀러 가도 되나요?)” 오래간만에 훅 들어온 제안에 나도 모르게 “그럼 당연하지.”라고 말해 버린다.
광장 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셋이었던 아이들이 다섯으로 순식간에 불어났다. 과자 뭉치를 건네주고 아이들 저녁거리를 고민한다. 마침 우리 집에 놀러 온 이삭이 친구 남매의 엄마는 나와도 친구처럼 지내고 있고, 내 생일이라고 치킨 쿠폰도 보내주었던 터라 생일 저녁 메뉴는 고민 없이 치킨으로 낙점되었다.
아이들도 다섯이나 되고 치킨도 있겠다 이건 틀림없는 생일잔치다. 순식간에 피로가 싹 가시고 아이들에게도 지금 이 순간을 생일파티로 선포한다.
“내 친구 이삭아, 요한아, 하율아, 하랑아, 이든아..생일잔치에 와주어서 고맙다."라며 상황을 즐겁게 전환한다. 평균연령이 한참 내려간 멤버들 간의 생일잔치는 꽤나 즐겁다. 치킨을 뜯는 중에 배수관 수리 기사님이 오시고 그 사이에 또 남편이 미역국과 오징어무침을 사서 귀가한다. 순식간에 인구밀도가 올라간다. 수리가 끝난 여덟 시까지 우리 부부는 저녁밥 구경도 미뤄두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미역국 뚜껑을 열어본다.
미역국이다 미역국!!
든든하게 생일 만찬을 즐기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케이크까지 나누고 나니 그제야 생일이 마무리된다.
아쉬운 대로 아가들이랑 생일잔치도 하고 기성품이지만 미역국도 먹고, 랜선으로는 기프티콘 생일선물과 축하도 배부르게 받았으니 완벽에 가깝고, 송구스러운 생일이 그렇게 지나간다. 다음 해의 이날을 그리며 또 한 해 열심히 사랑하고 베풀고 살아보라고 이렇게 넉넉한 축하를 받는가 보다.
아이들도 왁자지껄하고, 배수관도 고장이 나고, 아기 예방접종도 다녀와야 했던 조연 같고 분주했던 생일을 ‘뭐 이런 생일이 다 있어!” 하며 불평으로 뒤덮을 수도 있었던 날이다.
하지만 불평보다는 ‘뭐 이런 생일도 다 있네!’ 하며 생일마저도 지금의 나다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기로 하며 2023년 불혹 생일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