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아이들은 재우고 타닥거리며 글을 써 내려갔다. 길게는 아니고 적당히 서론 정도는 마무리가 되고 있었는데 글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분명 글감이 떠올랐고, 아이들을 재우면서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 있었는데 막상 키보드를 펼치고 보니 생각대로 글이 흘러가질 않는다. 그저 머릿속에서 뱅글거리며 떠돌 뿐 줄글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아이디어까지는 떠올랐지만 아마도 진짜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글로 살려보고자 하는 마음을 과감히 접고, 한참이나 붙잡고 앉아 쓰던 글을 갈아엎는다. 백지에 깨알 같은 글씨가 채워져 있을 때는 그렇게 붙잡고 싶더니 막상 지워버리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옛 글은 지나가고 새 글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미련 없이 덜어낸 글 덕분에 새로운 주제가 떠오르고 다시금 쓸 의지로 가득 찬다. 글을 새로 쓰기 시작할 때의 어렴풋한 희망과 설렘은 느껴보지 않고는 감히 표현할 길이 없기에 더욱 소중하다. 이러한 감정 덕에 이전의 글보다 더 풍부한 감성이 뒤섞인 새 글이 완성되고야 만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쓰다 말고 털어버린 글은 언젠간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지금은 과감하게 삭제 버튼을 누르지만, 지워진 글감은 내 마음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숨어 들어가 뜻하지 않은 어느 날 히든카드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비교적 높은 확률로 지워진 글감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알기에, 글을 갈아엎는 일은 언제나 과감히 처리한다.
오늘도 반쯤은 졸며 꾸역꾸역 써 내려가던 글을 깔끔하게 갈아엎고 새 글을 시작해 본다. 아쉬움이 가득했던 마음을 지나 새 마음으로 새 글을 시작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역시 글이란 건 한 번씩 갈아엎어줘야 제맛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