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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사람들

아동병원 다인실 이야기

by 다니엘라


막내 아이의 입원.


“어머니, 지금 1인실이 없어서 6인실에서 우선 지내시다가 1인실 나는 대로 순차적으로 보내드릴게요. 일단 저희 간호사분 따라서 511호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511호의 병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른 병실과 달리 문이 활짝 열린 511호.

얼굴을 먼저 빼꼼 내밀어 본다. 이미 두 팀이나 먼저 자리를 잡고 평온하게 오수를 즐기는 중이다.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가장 안쪽의 창가 자리를 배정받는다. 기차를 탈 때도 비행기를 탈 때도, 심지어 카페에서도 창가 자리나 구석 자리를 욕심내 본 적이 없는데 막상 병실 창가 자리를 배정받고 보니 창가 자리의 무수한 장점들이 동동 떠오른다. 침대 한쪽은 난간이지만, 나머지 한쪽은 벽이니 낙상의 위험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창이 있어 원할 때면 환기를 시킬 수 있다. 비록 이비인후과 건물 뷰이지만 저 멀리 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도 보이니 아기가 너무 지루해하면 창밖을 같이 내다볼 수도 있다.


그렇게 511호의 명당자리를 허락받고 짐을 먼저 내려놓는다. 입원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몰라 일단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은 다 옮겨왔다. 나는 괜찮겠지만,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이 필요한 때에 없으면 곤란할 테니까. 묵직한 짐가방을 풀어 수납함에 착착 줄 세워 정리를 시작한다. 아기는 침대에 내려져 수줍은 얼굴로 주변을 살핀다. 열이 떨어지질 않아 아이 얼굴이 엉망이다. 누가 봐도 아픈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짐 정리가 끝나니 그제야 511호 식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 건너편 자리에는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샛노란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빠가 꼭 껴안고 자고 있다. 아이만큼이나 체구가 작은 아빠다. 그리고 우리의 창가 자리 건너편 자리에는 우리 아이보다 더 어린 아기와 서글서글해 보이는 엄마가 있다. 아기는 보디 필로우에 다리를 감고 곤히 잠들어 있고, 엄마는 아마도 놓친 점심밥을 커피와 빵으로 때우는 중인 것 같다.


살짝 쳐다보고 눈길을 돌려오려는데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럴 땐 웃는 게 상책이다. 방긋.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기 몇 개월이에요?"

자연스러운 엄마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엄마들에겐 ‘아이’라는 초강력 슈퍼 파워 이야기 소재가 있다. 어디서든 무얼 하든 엄마들의 첫 만남 소재는 1000퍼센트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 이야기만큼 가까워지고 공감을 일으킬만한 소재는 찾기 힘들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간 서로의 아이를 탐색하고 덕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에 시동을 건다. 부릉부릉. 우리 아이가 어쩌다가 입원을 하게 되었는지 눈물 없이는 못 듣는 드라마틱한 사연도 잊지 않고 주고받는다. 이야기 끝엔 상대의 아이를 짠하게 바라보는 것도 필수 코스!

건너편 해온이(가명) 엄마와는 금방 호의적인 관계를 다진다. 나도 나지만, 해온 이 엄마는 성격도 참 좋고 사교적이다. 낯선 병실에서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아 위로도 되고 의지가 된다.


짐을 푼 지 삼십 분쯤 지났을까?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총각과 할머니가 들어선다. 핏기 없는 얼굴에 깡마른 남자아이는 한눈에 봐도 아프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는 몸이 좋지 않으니 사사 건건 할머니께 투정과 짜증으로 대응한다. 아이는 극도로 예민하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저 받아주신다. 큰 감정의 소용돌이 없이 아이를 대하신다. 아이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잠시 후 열이 막 오르기 시작한 아이는 "추워! 추워!"를 연발하며 또 한 번 할머니를 곤란에 빠트리려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곤란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으시고 아이를 편하게 눕힌 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신다. 아이는 그제야 평온한 얼굴을 한다.



또 이삼십여 분이 지났을까?

해온이의 옆자리에 엄마에게 안겨 축 늘어진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들어선다. 간호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흘려들어보니 한 이틀을 못 먹고 장염 증세를 보였단다. 열이 올라도 끼니를 거르지 않은 아이들과 끼니를 챙길 주었던 아이들의 낯빛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식판이 배달되었지만 아이는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못한다. 뒤늦게 합류하신 외할머니께서 억지로 두 숟갈쯤을 입에 넣어 주지만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댄다. 안쓰러운 엄마는 빵이라도 먹이려고 걸어서, 아니 뛰어서 십 분쯤 거리에 있는 빵집으로 달려 나간다. 결국 아이는 밥상을 그대로 물리고 입에 맞는 주스 조금과 빵 두세 입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한다. 오후 내내 괜찮던 아이는 늦은 밤중 자다 말고 소변인지, 설사인지를 두 번쯤 실수하고는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511호의 마지막 멤버.

이틀 전 외래에서 수액을 맞을 때 같은 수액실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네 살쯤 되어 보이는데, 아빠도 딸바보지만 아이도 아빠를 대단히 좋아하고 따랐다. 그때도 아이가 많이 힘들어 보이더니 결국 입원실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다. 아동 병원을 다니다 보면 나 같은 평범한 엄마 눈에도 대충 견적이 나오고야 만다. 누구는 입원하겠네, 누구는 곧 회복되겠네 하는 그런 느낌들.

하여간 딱한 꼬꼬맹이는 결국 입원을 했고, 입원을 해서도 내내 축 늘어져 있었다.

수시로 아빠를 찾으며 울고, 엄마는 그저 곤란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구토 때문에 식사도 어려워하는 데다가 열이 올라 아이 얼굴이 반쪽이다. 한두 숟갈 먹는 밥마저도 곧장 토해낸다. 아이도 아이지만, 아이를 달래고 뒤처리를 해내는 엄마가 더 안쓰럽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까지 꼬마 환자를 케어하며 병실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는 이미 반쯤은 지쳐있다. 외래에서 애를 써봤지만 잘 해결이 되지 않아 병동까지 올라왔으니 이미 앞의 며칠간은 잠도 식사도, 그리고 씻고 닦는 일까지도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의 회복을 바라는 단 한 가지 마음은 누구 하나 다를 것이 없다. 1인실 병실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새우잠을 자고, 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 일도 해야 하지만 아이가 회복이 된다면 6인실의 불편함쯤은 문제없다. 아니, 설사 10인실 20인실 일지라도 보호자라면 버텨내고야 만다. 6인실이지만 누구 하나 모난 보호자는 없다. 서로의 필요를 챙기고 살갑게 말도 한마디씩 걸어주는 서글서글한 사람들의 모임처럼 보일 지경이다.

1인실이라는 궁궐 같은 병실로 옮겨지기 전 단 하룻밤이었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6인실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하마터면 "6인실 하루 더!"를 를 외칠 뻔했으니 말이다.


다음날 꼬마와 엄마는 1인실로 옮겨가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잤다고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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