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닿으면 육아서를 들춰보는 편이다.
아이의 수가 적고 어릴 때는 육아서를 독파하곤 했지만 지금은 발췌독 수준으로 읽다가 아주 가끔 완독을 하곤 한다.
최근 기억에 남는 완독서가 있었으니…육아서도 아닌 것이 에세이는 에세이인데 육아 지침서 같기도 해서 육아서와 일반 에세이 그 사이의 어디쯤이라고 해 보자.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저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에는 화내지 않고도 충분히 훌륭한 사람을 키워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글들이 모여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저자의 대학시절 실험실 선배로부터 야단을 맞는 장면인데, 정황상 큰소리가 오가더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배는 차분하게 해야 할 말을 이어가며 확실한 한마디를 남긴다.
“너 지금 나한테 야단맞는 거야.”
선배가 후배에게 야단치는 어조를 쏙 뺀 채로 건넨 말이다. 우아하게, 감정의 흔들림 없이 전할 말을 모두 전하고 권위도 지키는 멋진 장면이다.
책을 읽고 나서 여러번 물음표를 던져 본다.
과연 내 육아에도 이런 우아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이가 아직 둘일 때는 가능할 수도 있었다.
라는 대답이 지금으로썬 가장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화내지 않는(불필요한 상황에 화내지 않는) 육아를 오랜 시간 꿈꿔왔기에 이제는 좀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아이 셋 중 나와 가장 많은 갈등을 겪는 아이는 첫째 아이다. 물론 셋 중 우리 사이가 가장 애틋하기도 하다. 우리 사이에 왜 그렇게 많은 갈등의 장면들이 연출될 수밖에 없는지 그 원인을 적어도 내 쪽에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와 나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
나에게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미리 계획되고, 그 계획대로 실행되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아이의 일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경우가 변수이고 나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흐를 때가 많다. 느긋한 아이와 바쁘고 욕심 많은 엄마가 만났으니 우린, 하염없이 삐그덕댄다.
“빨리, 빨리, 빨리.”와
“할 거예요, 이제 할 거예요.”의 환상적인 불협화음이란.
수년간 아이를 훈련 대상으로 삼고 빨리빨리의 채찍질을 가했지만, 아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잦은 채찍질이 가해질수록 아이는 눈물만 많아졌고, 나는 나날이 인상만 더욱 진하게 구겼으며 아이와 나 중 한 명이라도 달라지는 사람은 없었다. 질책과 억울함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평행선을 달려왔다.
아이와의 다른 속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 기준으로 아이와의 관계를 이어나간다면 우리 사이에서 ‘화’를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역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가 이제는 서로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도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못 견디게 화가 나고 답답한 날들이 종종 찾아오지만, 우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잠시 접어두고 기다리고 응원하는 육아, 아니 양육을 살살해 보기로 마음을 정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