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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Oct 06. 2020

미니멀. 팔색조 우리 집 거실


우리 집 거실에는 소파가 없다.


거실 한 면은 벽걸이형 티브이와 스탠드형 에어컨이 자리하고 있고, 나머지 한 면은 공백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부터 우리 집에 소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혼살림으로 3인용 패브릭 소파를 장만했었다.
(사실은 2인용 같은 3인용 소파였다.)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북유럽 풍(?)의 깔끔한 소파였지만,
견고함은 북유럽의 그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아이가 둘이 되기 전,
별난 첫째 아들이 뛰고, 기고, 쉴 새 없이 오르내린 덕에
소파 다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중 잠시 걸터앉았는데,
소파 다리가 우지끈! 하고 꺾이고 말았다.
 (난 원래 마른형 체형이지만, 사실 사건 당시는 둘째 임신중이어서 평소보다는 중력을 더 받고 있던 시즌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 집 소파는
집에서 퇴출되었다.


이미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기 시작하던 터라,
그렇게 힘없이 떠나는 소파가
한편으로는 ‘솔직히’ 고맙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집 거실은 공백을 찾나 싶더니,
금세 그 자리는 아이들의 책장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이들과 가까운 곳에 책이 꽂혀 있으니
확실히 아이들은 책을 더 자주 찾았다.


그러나 책장이 거실에 있을 때는,
조금만 어질러도 집이 훨씬 더 많이 지저분해 보였다.
현관에서 중문을 지나 집으로 들어서면,
늘 너저분한 느낌의 책장과 그의 주변이 눈에 걸려들었다.


책장을 수시로 착착착 정리해 주지 않으면
금방 지저분해지기 일쑤였다.
확실히 정리에 손이 많이 가던 시절이었다.


나의 핵심 정리 구간인 거실에서
정리해야 할 것들을 줄이고 싶었다.


게다가 아이 방에 책과 공부의 기능을
몰아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래서 집 구조를 바꾸며
겸사겸사 거실 책장을 아이 방으로 넣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 집 거실은 ‘공백’을 되찾았다.
정리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확 줄었다.


책장 꼭대기 선반은 우리 집 고유의 ‘자가증식존’이 되어
언제나 너저분한 물건들이 올라앉아 있었다.
면봉, 자동차 키, 지갑, 사원증, 로션, 손톱깎이 등등.


책장을 옮기고 나니,
자가증식존이 자동으로 없어졌고,
정리에 소요되는 시간도
잔소리할 일들도 확실히 줄어들었다.



이런 황량한 우리 집 거실의 ‘공백’을 접하는 지인들은
가끔 ‘병원 같다’ 거나
‘낼모레 이사 가는 집 같다’는 등의 평을 하기도 한다.
그건 아마도 우리 집 고유의 분위기라는 것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그저 ‘공백’만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당분간은 이 ‘공백’이 컨셉이라,
병원 같다는 말을 들어도,
이사 갈 집 같다는 말을 들어도,
기분이 전혀 상하지 않을 것 같다.


공백의 거실을 즐기는 요즘,
거실에 재미를 더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수영장을 가기도 쉽지 않고,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도 어려운 때라
날이 좋은 때에 나들이를 갈 요량으로
이번 여름의 끝자락에 캠핑의자를 마련했다.
(미니멀리스트인데 뭘 자꾸 사들인다..ㅋㅋ)


그런데 나들이를 마음먹은 날에는 비가 오고
나들이를 떠날 마음을 먹으면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자꾸만 생겨났다.


그래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으며,
집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 중 하나가
캠핑의자를 거실에 배치하고
가족들의 설렘 지수를 높이는 것이었다.



소파가 없는 우리 집 거실에
아이들의 캠핑의자는
즐거운 티브이 시청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독서 의자가 되어 주었으며,
아이들의 앉은뱅이책상을 더해
귀여운 취미활동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기분을 내서 밥을 차려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되기까지 했다.



엎드려서 책을 보고,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이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시간에는
나만의 캠핑 도서관을 만들어
기분 좋은 독서를 즐기기도 한다.
월요일 단 하루뿐이긴 하지만,
꽤나 기분 좋은 시간이다. ^^


물론, 아이들의 귀가와 동시에 엄마 아빠 의자는
다시 얌전히 접어 넣어야 하지만,
순식간에 거실의 분위기를 바꾸어 낼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장난 세포가 팔딱거리는 날에는
거실에 텐트를 쳐서
그 속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걸 다 해보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하기도 한다.
확실히 분위기 전환이 된다.



‘공백’ 덕분에
우리 집 거실은 오늘도 변신을 시도한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새로움을 선물 받을 수 있고,
즐거움은 자연스레 뒤따라 온다.


공백이 있고,
변화가 있는,
우리 집의 팔색조 거실이 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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