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니엘라 Oct 24. 2020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의 시칠리아 책에 대한 이야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l 복복서가


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 ‘머무름’ 이야기 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2020년에 출판되었지만,
김영하 작가의 신작은 아니다.
2009년 이미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던
김영하의 여행 에세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절판)의
개정판이다.​


그 당시 김영하는
나이 마흔에 한국예술종합대학의 교수였고,
라디오 진행자였으며,
장편소설 네 권과 단편소설집 세 권을 낸 작가였다.
아내도 있었고,
그의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도 있는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가진, 혹은 그가 감당해내야 할 것들에 대한
건조한 무게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그가 누리던 것들,
혹은 그가 해야만 했던 것들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한다.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는 것을 시작으로
라디오 진행을 하차하고,
그의 일들을 서서히 가볍게 비워낸다.


그리고 밴쿠버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으로 이메일을 보내 그곳에서 소설을 쓰며 한국문학 세미나도 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초청장을 받게 된다.


한국에서의 무게감 있었던 삶의 잔가지들을 정리하고,
김영하는 밴쿠버로 떠나기 전 두 달여의 공백의 시간을 선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함께
고민 없이 ‘시칠리아’로 떠나기로 한다.


아이폰이 없던 시절,
똘똘한 내비게이션도 없이 종이지도를 들고
거리를 찾아 헤매야 했던
그 시절의 여행 이야기를 느릿느릿 담아낸 책이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다.


이탈리아에서
예약한 기차가 운행을 취소하는 일은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당연해져 있고,
그 누구도 놀라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기차 말고 버스를 타고 이동할 것을 권할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영하 부부는 첫 목적지인 리파리 제도의 땅을 밟게 된다.
(드디어!라는 감탄사와 함께 작가만큼이나 기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리파리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작가는 매일 신선한 생선으로 식탁을 장식해 주는 생선가게를, 그리고 알록달록 색감의 향연을 펼친 과일가게를 독자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긴다.

그리고 다음 챕터에는 마치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가 수줍게 꺼내듯이 ‘지중해식 생존 요리법’을 소개한다.
그가 풀어놓은 글로 수놓아진 레시피는
읽는 사람의 감각을 자극해
밥때가 아닌데도 뱃속이 꼬르륵거리는 경험을 하게 한다.


리파리를 지나 드디어 시칠리아의 첫 도시
타오르미나에 도착한다.
그리스식 극장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리스의 진한 향기를 품은 그곳에서 시칠리아섬의 여행이 시작된다.

시칠리아섬.그리고 시칠리아섬 우측 상단의 콩알만한 점 중 하나가 리파리섬. 출처:구글지도



작가는 시칠리아를 천천히 둘러보며 장엄한 유적을 마주하고 과거의 이탈리아를 그려본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보통의 여행 에세이만큼이나 혹은 조금 더 감성적이고
똑똑한 기운이 감도는 책이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으며-
하루를 꽉 채워 살아가는 것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고 할 일이 많다고 느끼는
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한 작업이었다.


누구 하나 나에게 강요한 적은 없다.
바쁘게 살아가라고,
그리고 더 많이 가지라고...


나 스스로가 더 바쁜 삶으로 몰아가고 있었으며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탓할 사람도 없었고,
더 깊은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오늘도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다시 한번 한 장씩 넘겨가며 ‘천천히’를 마음에 되뇐다.

“Signora, Prego. E caldo.”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 오래 준비해온 대답 p.284-285

작가의 이전글 미니멀. 받는 기쁨과 나눔의 환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