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의 마중과 동행
끝나면 전화해.
엄마를 마중 나갔다. 나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집 앞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내가 전에 부모님을 마중 나갔던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직 가을이 완연한 오후 1시의 오솔길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채 낙엽이 많이 쌓여있었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나를 마중 나오셨다. 중학생 때는 매일 아침에는 아빠 차를, 오후에는 엄마 차를 타고 다녔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봉고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리면 엄마는 편안한 차림으로 나를 마중 나와주셨다. 스무 살 이후로는 쭉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가끔 한 두 달에 한 번씩 부모님 댁에 찾아갈 때면 부모님께서 마중을 나오셨지,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특별한 날이었다. 내가 엄마를 마중 간 곳은 엄마가 중국어를 배우는 동네 자치 센터이다. 우리 엄마는 내가 아는 아줌마들 중에 가장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린 내 손을 잡고 함께 도서관에 다니시던 것은 일상이었고 내가 대학에 간 뒤부터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셨다. 엄마의 공부는 우리 가족이 일본으로 여행 갔을 때 빛을 발하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국어 교육 학사 학위를 따겠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엄마의 역할이 클지도 모른다. 독서란 일상이며 공부란 그리 거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 엄마는 늘 몸소 보여주셨으니까.
엄마는 결혼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셨다. 아빠와 엄마는 같은 학교 같은 전공에 대학원까지 졸업하셨지만, 아빠가 결혼 후 미국 유학을 결정하시면서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때 미국에서 같이 공부하지 않으셨냐고 했지만, 그때 내가 생겼고 돌도 안 지난 아기를 타지에서 모르는 사람 손에 키우고 싶지 않으셨다고 했다. 외국에서, 검증되지 않은 베이비시터 손에서 눈치를 보며 자라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당신 아이는 당신 손으로 직접 키워 자신감 넘치는 아이로 만들고 싶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하지만 여전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국에 오셔서라도 일을 새로이 시작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어릴 적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고 잔병치레도 참 잦았다. 그런 아이를 두고 나가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하고 싶은 일들도 꿈들도 많았을 엄마는 나 때문에 포기한 일들이 많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열심히 살고 계신다.
엄마, 같이 가자.
엄마와 둘이서만 해외여행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것은 7년 전, 그러니까 내가 스물두 살 때였고, 내가 처음으로 어른으로서 엄마를 이끌어드릴 수 있었던 기회였다. 나는 그때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있었는데, 새로운 학교에서의 학기가 시작되기 전 엄마와 프랑스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약 열흘 정도의 일정으로 우리는 파리도 구경하고 몽생미셸에도 다녀왔으며, 내가 그 학기 교환학생으로 있게 되었던 보르도에도 갔다.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프랑스에서 나는 초중급 수준의 프랑스어로 엄마를 잘 챙기며 다녀야 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실 엄마는 기본적인 영어도 잘 하시고 내가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훌륭한 동행이었지만 나는 나 혼자 강박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터져버리고 만 순간이 있었다. 여전히 서툴었던 내 프랑스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다가오는 개강일에 대한 스트레스 같은 것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스물두 살, 타지에서 혼자 살며 혼자 여행하는 동안 나는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스스로조차 감당이 어려웠던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이후 엄마는 며칠 더 보르도에 머무르시다, 혼자 파리로 가셔서 여행하다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여전히 학기 시작 전이었지만 예상보다 교환학생들을 위한 학기 전 행사들이 있어 나는 많이 바빠졌다. 엄마는 내가 불편해할 것이라 생각하시고 일찍 보르도를 떠나신 것이리라. 떠나시기 전까지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나와 함께 보르도 가론느 강가를 거닐며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의 사진들을 찾아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작은 구멍이 생기는 것 같다.
세계일주를 준비하며, 나는 부모님께서 조금이나마 동행하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는 일을 하시니 일주일 이상은 쉽지 않겠지만, 엄마는 장기간 함께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아빠 역시 엄마가 조금이라도 나와 함께 여행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엄마는 자꾸 아빠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같이 가면 당신은 나에게 짐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게 7년 전의 여행 때문인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나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너무나도 절실하다.
엄마, 끝나면 전화해.
10년 만에 다시 엄마 아빠와 부대끼며 사는 요즘 나는 정말 행복하다.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엄마와 함께 빨래를 널고, 아빠와 함께 술도 마시고, 셋이서 근교로 놀러 다니기도 하고. 어렸을 때 사춘기의 반항심과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알지 못했던 더 중요한 것들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가령 '어서 와서 저녁 먹어.'라는 말의 힘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기도 한다. 엄마는 언제쯤 은퇴할 수 있을까?
앞으로는 엄마가 엄마를 위해 하는 일들을 내가 기다리고 싶다. 아빠를 위한, 나를 위한 일들이 아니라 오로지 엄마를 위한 일들이 늘어났으면, 그 시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엄마를 기다리는 일이 많아지기를, 엄마의 공부 또는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바깥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늘 당신보다 가족들을 우선에 두며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엄마. 엄마의 이름보다 '엄마', '누구 엄마'의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진 엄마. 엄마가 약 30년 동안 나를 키워주신 시간과 노력을 모두 갚지는 못 하겠지만, 단 30일 만이라도 엄마께 휴식과 일탈을 선물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라도 엄마가 오직 엄마만을 위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엄마, 꼭 같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