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8 - 프랑스 보르도(Bordeaux)
2017.07.09
툴루즈에서 스펙터클한 오전을 보내고, 기차에 올라 보르도로 향했다. 어쩌면 내가 더 그리워했던 곳은 파리보다 보르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2009년 봄학기에 날씨가 변화무쌍한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에 있었고, 가을학기에는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프랑스 남부의 보르도에 있었다. 첫 학기를 보낸 동네는 굉장히 작아서, 버스도 하루에 3번 정도 지났고 심지어 중국집 하나 없는 곳이었다. 당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없어 교환학생도 나 혼자였던지라 나는 어딜 가나 신기한 이방인으로 우대를 받을 정도였다.
반면에 두 번째 학기를 보냈던 보르도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프랑스 내에서 꽤 큰 도시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교통이며 물건을 사는 것이며 모든 것이 대체로 편리했다.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았기 때문에 교환학생도 수십 명이었다. 예닐곱 명의 한국인들을 포함해 동양인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만큼 프랑스어 실력은 퇴보했지만 마음도 더 편했고 하루하루의 생활도 더 재미있었다.
부푼 기대로 다시 찾은 보르도의 시내는 크게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한 가지 놀랐던 부분이 있다면, 기차역에서 내려 트램 티켓을 사려는데 봉사자로 보이는 여자가 영어로 내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은 것이다. 8년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번에 파리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웨이터가 내게 영어 메뉴가 필요한지 물어보았을 때도 상당히 놀랐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대형 카페나 레스토랑이 아니고서야 영어 메뉴는커녕 영어로 주문하기조차 어려웠던 프랑스가 이제는 변화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나를 도와주던 프랑스인 친구들이 이제는 사회인이 되었을 테니 당연한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친구가 영어로 길을 물어봤다가 프랑스어로 답변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를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된 것 같았다.
트램을 타고 호스텔에 가 짐을 풀었다. 호스텔은 이층 침대가 아닌 단층 침대여서 좋았지만, 매트리스 한 귀퉁이에 걸터앉아 있으면 대각선 반대편 이 약 30센티 이상 들어 올려지는, 과하게 유연한 매트리스가 놓여 있어서 좀 불편했다. 같은 방을 쓰는 독일인 친구 니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가론 강가로 나왔다.
오래전 가을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엄마와 함께 갈대가 가득한 가론 강가를 걸었고 그 이후 나는 종종 혼자 또는 친구와 함께 이곳을 산책하곤 했다.
내가 가론 강가를 좋아하는 건 예쁜 공원처럼 꾸며진 강가 자체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르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Miroir d'eau인데 직역하면 물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뒤에 있는 상공회의소 건물과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곳의 물에 거울처럼 반사가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여름에는 시원하라고 시간마다 시원한 수증기가 올라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나게 이곳을 맨발로 뛰어다닌다.
하지만 설렘을 가득 안고 갔을 때,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너무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내 기억 속 이곳은 물이 늘 자작하게 깔려 있었다. 그래서 낮에도 꽤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고 밤에는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전부 놓지는 않고, 강가에 앉아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건물들에 불이 켜지기를, 그리고 물의 거울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시야를 더 이상 가리지 않기를.
완전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거리를 걸어보았다. 야경이 멋진 곳은 가론강만이 아니기에, 옛 기억을 떠올려보며 지도도 보지 않고 천천히 밤공기를 느껴보았다.
종종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걸터앉아 있던 분수대가 보였다. 당시엔 가게 이름도 모르고 사 먹었던 아이스크림이라 오래전 그 가게가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인지 가게가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있으니 다시 이곳의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걷다 보니 보르도 대극장(그랑 떼아뜨르, Grand Théâtre)이 보였다. 보르도에서 지내는 동안 이곳에서 공연 한번 보고 싶었는데, 언젠간 기회가 있을 거라며 미루다 결국 끝끝내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내가 보르도에서 자주 사서 마시던 화이트 와인 이름이 그랑 떼아뜨르였는데 한 병에 6유로(약 7~8천 원)였다. 노랗게 불이 밝혀있는 것을 보니 문득 밤중에 친구들과 거리에서 와인을 마시던 것이 떠올랐다.
다시 물의 거울로 되돌아가는 길. 상공회의소 건물 앞 분수대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이 완전히 켜진 뒤에도 완벽한 반사는 보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전처럼 물이 가득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쪽 가장자리에는 물이 꽤 차 있어서, 그 각도로 보면 예전의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기대한 풍경은 끊김 없이 완벽한 반사였지만, 그래도 다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 좋았던 밤이다.
# 사소한 메모 #
* 그리웠던 장소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달라져 있으면 그게 좋게 변한 것이든 나쁘게 변한 것이든 상관없이 섭섭하다. 그 장소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그리워했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