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62 - 아일랜드 모허 절벽(Cliffs of Moher)
2017.07.13
8년 전 가을, 내가 처음으로 아일랜드에 갔던 것은 특별히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웨스트라이프(Westlife)의 엄청난 팬이었고, 거기다가 영화 <원스(Once)>로 인해 아일랜드에 가보고 싶은 막연한 마음이 굉장히 커졌던 것이다. 나는 무작정 더블린으로 향했고, 영화 <원스(Once)>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한 언덕에 갔으며, 매 끼니마다 기네스 맥주를 마시다가 마침 발매되었던 웨스트라이프의 새 앨범을 사들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더블린은 아기자기했고 더블린 근교의 자연풍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바닷가 근처라 흐려서인지 황량함이 느껴져 사진으로 찍으면 그리 멋지게 보이지도 않는데, 그 속에 서 있으면 왠지 모르게 뭉클해졌다. 의도했든 안 했든 수도 없이 사진으로, 영상으로 봐왔던 풍경들이라 의외로 익숙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아일랜드 서부에는 가지 못했지만, 당시 민박집 아주머니가 아일랜드에 한번 왔던 사람들은 반드시 또 한 번 오게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가겠지, 했던 것이 8년 뒤가 되었다. 보르도에서 더블린으로, 더블린에서 서부의 골웨이(Galway)로, 그리고 골웨이에서 모허 절벽(Cliffs of Moher)으로. 이번 아일랜드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였다. 자연 풍경이 멋지기로 유명한 아일랜드 서부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모허 절벽은 내게는 웨스트라이프의 대표곡 <My Love>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
아일랜드 서부는 모허 절벽 말고도 갈 곳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골웨이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은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모허 절벽이었으니, 골웨이를 거점으로 삼아 모허 절벽과 다른 곳들에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다음 날 앓아눕는 바람에 다른 곳은 보지 못했지만.
모허 절벽으로 가는 길에는 외롭게 서 있는 던귀에어 성(Dunguaire Castle)도 들르고, 풀나브론 고인돌(Poulnabrone Dolmen)에도 들렀다. 이 지역의 이름은 뷰렌(Burren)으로, 석회암이 가득해 지형이 독특하다.
고고학적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우리나라에 있는 고인돌과의 차이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땅의 형세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날은 아일랜드답게 하루 종일 비와 바람의 연속이었다. 전에 왔을 때에도 딱 한 번 무지개를 본 것을 제외하고는 4박 5일 내내 비가 내렸던 것 같다. 영국도 아일랜드도 아이슬란드도, 북반구의 섬나라들은 날이 흐린 경우가 대부분인가 보다. 유쾌했던 우리의 가이드는 'Liquid sunshine'(직역하자면 액체 햇빛?)이라며 긍정의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둘린(Doolin)이라는 작은 마을의 한 펍에서 식사를 한 후, 바로 옆에 위치한 초콜릿 가게에서 초콜릿을 두 개 샀다. 맛도 모양도 색도 너무나 다양해 선택하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결국 내가 평소 좋아하는 맛으로 골랐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모허 절벽 도착! 일일투어가 다 그렇듯, 이곳을 둘러볼 시간은 1시간 반이 주어졌다. 구경하기에 부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에트르타처럼 자유여행으로 갔더라면 더 멀리 걸어가 볼 수 있었겠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튜브라는 것이 존재하기도 훨씬 전부터, 내가 수도 없이 돌려보았던 <My Love> 뮤직비디오 속 배경, 모허 절벽이다. 날씨는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아일랜드에 왔을 때부터 맑은 날씨는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비가 그쳐서 우산을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는 우선 오른쪽 산책로부터 걸어보기로 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오브라이언 타워(O'Brien's Tower)는 19세기에 지어진 이후로 관광객을 위한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타워 근처로 걸어가니 멋진 해안선이 보였다. 앞에는 노란 꽃들도 강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을 웅장하게 만드는 건 날씨도 한몫한 것 같았다.
정말이지 마성의 산책로였다. 이미 아까 그 타워는 콩알만 해졌는데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반대편 산책로를 제대로 걷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되돌아가려는 찰나,
보기만 해도 무서운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완전히 끄트머리에 서서 혹은 엎드려 누워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다.
나는 겁이 많지만, 그래도 흔치 않은 기회이니 최대한 용기를 내어보았다. 발은 이보다 한참 안쪽에 두고 팔만 앞으로 뻗어 사진을 찍어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덜덜 떨렸다.
그리고는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왼쪽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쪽은 산책로 옆에 돌로 꽤 높은 난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난간은 절벽 끝을 기준으로 꽤 안쪽에 만들어져 있어 이를 무시하고 그냥 바깥으로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너무 안쪽이다 보니 해안선을 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겁이 많은 나는 늘 안전에 있어서는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 가끔 난간이 부서져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난간 안쪽으로만 걸어 다녔다. 이런 곳들은 추락 사고가 쉽게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모허 절벽에서도 매년 사망 사고가 일어난다.
난간 안쪽에서 보는 풍경도 충분히 멋졌다. 그 어떤 풍경도 목숨을 담보로 볼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어졌던 1시간 반이 거의 다 되어 아쉽지만 버스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해주듯, 갑자기 하늘이 맑아졌다.
흔치 않은 맑은 하늘이라 조금 뛰어 아까 그 타워도 다시 사진 속에 담아보고,
먹구름 뒤에 숨은 밝은 푸른색이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절벽 위 하늘도 담아보았다.
아일랜드는 이런 초록색 풀밭과 어두운 색의 돌들이 함께 만드는 풍경이 쓸쓸한 우아함을 전해준다. 거기다 가끔 보이는 하늘색까지 더해지면 기대한 것 이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풍요로워 보이면서도 동시에 황량한 느낌이 드는 건 아일랜드만의 매력이 아닐까.
다시 골웨이로 되돌아가기 전에 버스는 바닷가에 잠시 들렀다. 이곳도 모두 석회암이라고 했다.
도시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맞는 시원한 바닷바람이었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부추김으로 끄트머리에 서서 조심스레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다.
웨스트라이프의 뮤직비디오를 포함해 내가 좋아하는 여러 영화들 속에서 등장하는 아일랜드 특유의 풍경은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겨지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황량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나에게는 수많은 추억들이 떠오르는 색깔이며 바람이다. 18여 년 전 <My Love>를 수도 없이 듣던 어린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 사소한 메모 #
* 해외에서 한식당이 없을 때 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면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어 전생에 이탈리아 사람이었나 보다고 종종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진짜 전생이 있다면 나는 아일랜드와 깊은 인연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 ♬ Westlife - My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