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스텔이 슬픔을 덮었을까

Day 172, 173 - 폴란드 바르샤바(Warsaw)

by 바다의별

2017.07.23, 24


베를린 기차역으로 향하던 날 아침에도 전날과 같은 폭우가 쏟아졌다. 웬만해선 신세 지는 걸 싫어하지만, 결국 같은 날 떠나는 민박집 손님 중 한 분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덕분에 비를 거의 맞지 않고 안전하게 역에 갈 수 있었다. 대여섯 시간 뒤 도착한 바르샤바에도 비가 많이 내려 관광은 접어두고 저녁 식사 후 호텔에서 푹 쉬었다. 오랜만에 묵는 호텔이라 정말 제대로 된 휴식을 할 수 있었다.

눈에 띄는 화려한 계단식 건물은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으로, 소련이 지어준 것이어서 폴란드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며칠 사이 비도 맞고 기차도 오래 타서 피곤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묵어보는 호텔 방이 그토록 달콤했는지, 일어나 보니 오전이 다 지나 있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중심가에서 떨어진 바르샤바 민중봉기 박물관(Warsaw uprising museum)이었다.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바르샤바를 독립시키기 위해 폴란드 군인들이 일으킨 봉기여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떠올라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을 몰아내며 바르샤바 근처까지 다다랐고, 폴란드인들은 자주독립을 위해 소련군이 도착하기 전에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소련군은 봉기가 일어난 뒤 독일군의 바르샤바 공격 지켜보기만 했고, 다른 연합국들이 공중 폭격을 위해 주변 공항을 사용하는 것조차 방해했다. 결국 바르샤바는 소련이 손 놓은 동안 재정비할 수 있었던 독일에 의해 잔혹하게 탄압당했고 저항군들은 물론 민간인 20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소련군이 돕지 않은 이유 중 가장 유력한 것은 폴란드 봉기를 일으킨 저항군들이 반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이들이 독일군에 의해 격퇴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독일군이 퇴각한 뒤 바르샤바를 장악한 소련군은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저항군 지도부를 탄압했다. 그래서 폴란드 사람들은 독일보다 소련(러시아)을 더 싫어한다는 말도 있다. 여담이지만 실제로 폴란드는 100년 넘게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도 있다. 한때 유럽 지도에서 사라진 적도 있을 정도로 알면 알수록 굉장히 슬픈 역사를 걸어온 나라다.

박물관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알 수 있는 설명들, 잔혹한 사진들, 관련된 물건들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폭격 전후의 바르샤바의 모습을 담은 영상도 상영되고 있었다. 남의 역사 같지 않다 보니 집중해서 천천히 둘러보려고 했지만, 박물관 구조도 복잡하고 전시물도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냥 폴란드의 아픈 역사를 나 또한 기억하게 되었음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런 끔찍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트램을 타고 바르샤바 중심가로 돌아왔다. 점심 식사를 하고는 본격적으로 중심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 광장이 첫 시작이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가 폴란드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

성 십자가 성당(Church of the Holy Cross)

폴란드에는 위인이 굉장히 많은데, 쇼핑과 마리 퀴리 역시 폴란드인들이다. 바르샤바에는 쇼팽 박물관과 마리 퀴리 생가 및 박물관 또한 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이날은 월요일이었고 두 곳 모두 월요일에는 휴관이었다.

대신 쇼팽의 심장이 있는 성 십자가 성당에 들어갔다. 쇼팽의 육신은 파리에 있고, 그의 심장은 이곳 바르샤바에 있다. 그의 시신이 이렇게 분리된 것 역시 폴란드의 슬픈 역사와 관련이 있다. 폴란드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던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에 있었고, 국내에 독립운동이 일어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프랑스로 향하게 되었고 끝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육신이 파리를 떠나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에, 죽기 전 누이에게 부탁해 심장만큼은 바르샤바로 가져가 줄 것을 부탁했다.

그의 몸은 파리를 떠나지 못하더라도, 영혼만큼은 고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나 보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심장을 제외한 그의 나머지 시신이 모두 바르샤바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도 몸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니까.

바르샤바 대통령 궁은 조금 큰 시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통령 궁 치고는 소박한 편이었다. 바르샤바와 크라쿠프를 다니며 느낀 건, 전후에 다시 세워진 곳들이어서 그런지 도시들이 굉장히 소박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색감은 화사한 곳들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내가 바르샤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잠코비 광장(Plac Zamkowy) 역시 그랬다. 대부분 폴란드 여행을 할 때 크라쿠프는 많이 가지만 바르샤바는 건너뛰는 경우도 많다. 볼게 많지 않다는 주위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 몇 장에 이끌려 바르샤바에 갔고, 나는 바르샤바가 좋았다. 바르샤바는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고, 폴란드 위인들의 흔적도 느낄 수 있었고, 크라쿠프보다 관광객이 덜해서 여유로웠다.

게다가 전날 저녁 천둥 번개가 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이 맑아, 분홍빛의 바르샤바 구 왕궁과 어우러진 색채가 포근했다. 그 속의 풍선 파는 아저씨가 만들어낸 색까지도.

잠코비 광장을 지나면 구시가지로 들어갈 수 있다. 구시가지는 독일군 폭격의 피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모두 재건축된 곳들이지만, 건물 아랫부분을 보면 그 상처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슬픈 역사 위로는 예쁜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건물들이 세워졌다. 바르샤바인들의 염원이 칠해진 것이 아닐까.

구시가지 내 광장에는 유명한 인어상이 있다. 그 크기는 벨기에의 오줌싸개 소년 동상을 떠올리게 했지만, 창과 방패를 들고 바르샤바를 지키는 모습은 제법 비장했다.

광장 주위에는 카페들과 상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벤치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나는 이곳 대신 잠코비 광장으로 돌아가 시간을 조금 더 보내기로 했다.

잠코비 광장 한쪽에는 오래된 벽이 일부 남아있었다. 이것 역시 독일군의 흔적인 것 같다. 벽 자체가 흔적인지, 폭격에 남은 것이 흔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벽면에는 바르샤바 봉기를 기념하는 현판들이 붙어있었다.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색이 예뻐서, 이곳 근처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앉아있다 배가 고파질 때쯤 일어났다. 간단한 저녁 식사 후 호텔 방에서 마시는 폴란드 맥주는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바르샤바 일정을 더 길게 잡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 밤이었다.


# 사소한 메모 #

* 동유럽 국가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은은하게 알록달록한 폴란드가 반겨주어 기분이 좋다.

* 폴란드 여행에서 찍은 원본 사진들이 다 사라진 것을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야 알게 되었다. 약 1주일 간의 기록이 없어진 것이다. 그나마 휴대폰에 옮겨두었던,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들이라도 남아있음에 감사해야겠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떤 가해자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