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90 - 슬로베니아 블레드(Bled)
2017.08.10
오랫동안 기대했던 곳인데 날이 흐려서 아쉬웠다. 하지만 내가 슬로베니아에 있는 동안 예보가 내내 흐림이어서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나마 비가 오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블레드 성에 도착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졌다.
맑고 푸른 호수와 그 속의 블레드 섬이 아름답게 빛나기로 유명한 곳인데, 먹구름 때문에 호수의 빛깔 역시 어두웠다.
호수를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비를 피하기 위해 성에 들어가야 했다. 성은 예상했던 대로 작았지만, 사람은 꽤 많았다. 나처럼 비를 피하기 위함인지 내부를 구경하기보다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흐린 날씨와 상관없이 내내 무더웠기에 이날도 가볍게 입고 갔는데, 예상치 못한 비 때문에 오전은 으슬으슬 추웠다.
비는 계속되었고 그쳤다가도 금방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어두운 호수의 모습만을 보고 가기엔 왠지 아쉬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블레드 크림 케이크(Bled cream cake)를 먹으며 날이 개기를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몇 차례 반복한 후, 마침내 구름 사이로 햇살이 몇 줄기 내려오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만큼의 밝은 풍경은 아니었지만, 비가 완전히 그친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해가 나옴과 동시에 더워졌다. 머리를 높이 묶기 위해 머리끈을 꼬고 있는데 탁 하고 끊어져버렸다. 결국 나는 폭우가 내릴 땐 우산이 없었고 햇빛이 내리쬘 땐 머리끈이 없었다.
성 아래 호숫가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 역시 수영복을 준비해왔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아쉬웠다.
호수는 아주 컸지만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었는데도 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30분쯤 걸으니 조금 전 있었던 블레드 성이 저 멀리 뒤로 보였다.
블레드 호수 안 유일한 섬인 블레드 섬에는 성모승천 교회(Assumption of Mary)가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섬이 매우 작게 느껴졌는데, 호수 주위를 걸으며 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섬에는 배를 타고 들어가 볼 수 있다. 선착장에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약 3대의 배에 나누어 올라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그것보다는 호수 주위에서 호수에 비친 섬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다.
블레드 성 쪽의 시내 근처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반대편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숨겨진 곳을 나 혼자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햇빛은 점차 강해졌고, 그에 따라 내 땀도 많아졌다. 더위를 식히려고 잠시 멈추어 서서 맑은 물을 들여다봤지만 수영복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이 다시 한번 후회되면서 왠지 더 더운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쉽게 지치지 않은 것은 나무 그늘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그늘이 되어주고, 운치 있는 터널이 되어주고, 블레드 섬과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는 창이 되어주었다.
어느새 블레드 성의 반대편에 다다르니, 전혀 다른 풍경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좌측의 블레드 성은 지금 보니 암벽 위에 수도원들이 위치한 그리스의 메테오라를 연상케 한다. 물론 당시에는 메테오라에 가기 전이었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날이 완벽하게 맑아져 야속했다. 얄밉지만 또 한 번 올 이유를 준 것 같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에는 별장 같은 호텔에 묵으며, 수영 후 배가 고프면 크림 케이크를 한 입 먹고, 자연 풍경이 심심해지면 류블랴나에 다녀오는 일정으로 머물기로 했다.
# 사소한 메모 #
* 류블랴나에서 블레드로 가는 버스 안, 앞뒤로 앉은 노부부가 있었다. 할머니는 뒤에서 졸고 있었고 앞에 앉은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가 귀엽다는 듯 자꾸 뒤돌아 보며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짓궂은 표정으로 할머니를 놀렸다. 할머니는 큰소리로 웃었다. 나도 그렇게 늙기로 했다.
* ♬ 이루마 - May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