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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지 않은 괴로움? 류블랴나에서 풀라까지

Day 192 -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국경 넘기

by 바다의별

2017.08.12


끔찍한 버스 이동은 아프리카가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차라리 아프리카가 나았다. 그 당시에는 12~13시간 버스를 탔지만 그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하고 탔고, 2시간에 한 번씩 정차해 화장실을 해결할 수 있었으며(물론 화장실이 아니고 풀숲이었다), 어쨌든 캠핑장 한가운데까지 데려다줬으니 텐트를 치는 건 귀찮아도 따로 걱정할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원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Ljubljana)에서 크로아티아 풀라(Pula)까지는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리는데(사실 자동차로는 2시간 반이면 되지만 버스 루트는 매우 많이 돌아간다), 이날은 토요일이라 조금 막히는 듯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는 것이 요일 불문하고 워낙 끔찍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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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전에 류블랴나 시내를 마지막으로 둘러본 후, 2시 50분 버스를 타기 위해 여유롭게 2시쯤 숙소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그런데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버스가 1시간 30분이 지연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나마 심 카드가 있어 이런 메시지를 받아 다행이었지만, 결국 기다려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햇빛이 뜨거웠지만 터미널 안에는 앉을 곳이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버스 터미널 앞 길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버스는 지연 메시지가 계속되더니, 결국 2시간 35분이 지연되었다. 결국 나는 환불 요청을 하고, 4시 10분에 출발하는 다른 버스표를 구입했다.


하지만 이 버스도 5시가 다 되어서 왔다. 결국 나는 숙소를 나선 지 3시간 만에 겨우 버스에 탑승한 것이었다. 두 버스 모두 크로아티아 자그레브(Zagreb)에서 출발해서 오는 것이어서 국경을 넘으며 이토록 지연이 된 것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탔으니 됐다고, 이제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래 한 가지 일이 안 풀리는 날엔 모든 일이 잘 안 풀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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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잠이 든 무렵 버스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에 멈추었다. 사실 나는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줄도 몰랐는데, 다 내려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고 하니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사람들은 사라진 버스 기사를 찾았고, 다른 사람들은 터미널 직원에게 물어보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버스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답을 기다렸다. 알고 보니 다른 목적지로 가는 일부 사람들만 내리면 되었고,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이 버스로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통에 나는 화장실에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버스는 곧이어 다시 출발했지만, 창문도 열 수 없고 버스 안 화장실도 고장이 나서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은 곳곳에서 울기 시작했고, 기분 탓인지 어디선가 냄새가 나기도 했다. 게다가 이 버스는 트리에스테를 마지막으로 단 한 번도 서지 않는 버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로는 어느 순간부터 1방향 1차선이었고 정말 꽉 막혀 대책 없이 서 있기 일쑤였다.


같은 유럽연합인데도 크로아티아는 여권 검사를 까다롭게 하는 편이라 워낙 오래 걸린다고 한다. 옆자리에 앉은 슬로베니아 여고생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원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치고 사이좋은 나라는 없는 것 같다고 답했다. 나는 일본과 중국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는데, 북한으로 알아들었던 것 같다. 북한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들에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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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라면 저녁 7시 반쯤 도착했어야 하지만, 밖이 깜깜해지도록 우리는 국경조차 넘지 못했다. 식사도 못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봐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래도 옆자리에 앉은 죠나와 함께 수다를 떨기 시작하니 조금 덜 지루했다. 나는 보조배터리로 휴대폰을 두 번이나 재충전했고, 죠나는 보조배터리도 다 써서 내 노트북을 빌려 겨우 충전했다. 아이스하키를 한다는 죠나는 하키를 하며 알게 된 친구가 크로아티아에 살아서 놀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화장실이 많이 급하지 않았는데, 죠나는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그리고 국경에서 다 내려 여권 검사를 했을 때, 어디론가 잠시 사라졌다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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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국경에서 이런 풍경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아주 잠시 내렸지만, 그리고 시간은 점점 늦어졌지만, 그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창문도 열리지 않는 버스에서 거의 6시간 만에 탈출한 것이었기에 바깥공기가 무척이나 소중했다.


죠나는 다른 도시에 먼저 내렸고, 나는 약 30분 후 버스 탑승 8시간 만인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풀라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어두웠고 시내까지는 20분가량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걸음을 서둘렀다. 혼자서 이 밤중에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은 무섭기도 했지만 일단은 무조건 빨리 들어가서 쉬자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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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을 따라 쭉 걸어내려 오니 풀라의 유명한 원형경기장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숙소까지는 멀지 않다고 들어서 나는 이 노란 고대 건축물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피곤한 와중에도 가방에서 자동으로 카메라를 꺼내게 되었다. 하루 종일 버스에 가둬져 지칠 대로 지치고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화장실에도 가고 싶었는데, 이 상태로도 카메라를 꺼내는 것을 보면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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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과 비슷한 원형경기장이 있는 프랑스 아를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숙소로 이동하는 길이 험난했고,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1시간 가까이 걸으며 친구와 함께 무척 초조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또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동고동락하던 친구들도 생각이 많이 났다.


언제나 그 순간의 힘든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 없이 겪었던 이날 하루, 그리고 홀로 걸었던 이날 밤은 유럽에서 겪은 날들 중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도 그에 못지않게 지쳤던 날이다.


# 사소한 메모 #

* '어떠한 기쁨도 미리 준비하지 마라.'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중에서
* 괴로움은 미리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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