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93 - 크로아티아 로빈 / 로비니 (Rovinj)
2017.08.13
힘겹게 도착한 풀라(Pula). 3박 4일의 일정으로 갔지만 새벽 1시에 도착했으니 3박 3일이려나. 내게 풀라를 추천해준 사람은 하루 정도 머물면 좋다고 했지만 내가 넉넉한 일정으로 방문하게 된 것은 근처 소도시 로빈(로비니, Rovinj)에 다녀올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풀라도 소도시이기는 하지만, 로빈은 더 작았기 때문에 베이스는 풀라로 잡는 것이 더 편해 보여 풀라에서 머물렀다.
풀라에서 로빈은 약 30분 정도 걸린다. 두 곳 모두에서 숙박을 하고 싶었지만 짐을 이고 다니는 것이 힘들다 보니 결국 둘 중 한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후 교통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풀라를 선택했지만, 도시 자체는 로빈이 더 예쁘다.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바다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의 모습이 반가웠다. 이스트라 반도의 아드리아 해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바다를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로빈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붉은 지붕들이 덮고 있는 마을 전체가 섬처럼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곳은 18세기 후반까지 섬이었다고 한다. 이후 육지와 섬 사이에 땅을 메워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색색의 마을을 더 빛나게 해준 건 이날의 화사한 날씨였다. 하늘의 구름과 바다의 배들이 대비되어 더욱 멋졌다.
아기자기한 마을에는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관광객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전날 8시간 동안 버스를 탄 탓에 저녁 식사도 하지 못하고 이날 아침도 대충 때우게 되어 본격적인 구경 전에 점심 식사를 든든히 하기로 했다. 로빈은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기도 했었고 여전히 지리적으로 이탈리아 근처여서 그런지 이탈리안 비스트로가 많았다.
평범한 맛의 얇은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고, 마을 꼭대기에 보이는 성 유페미아 성당(Church of St. Euphemia) 탑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꼭대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붉고 노란 골목들을 돌고 돌아 올라가야 했다. 수제로 보이는 각종 간판들과 집 앞에 예쁘게 걸어놓은 꽃들이 눈에 띄었다. 프랑스의 프로방스와 코트다쥐르 지방에서 들렀던 여러 소도시들이 떠올랐다.
이곳만의 매력이 있다면, 바로 가끔 고개를 돌리면 이렇게 골목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차 한 잔으로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위에 가까워질수록 한편에 모여있던 구름들도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높게 우뚝 선 성당의 종탑 주변에는 파란 하늘과 초록빛 나무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60m인 종탑이 어찌나 높은지, 앞의 성당은 나무에 가려져도 탑은 그 어디에서도 가려지지 않았다.
종탑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탑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물론 그곳의 탑과 성당이 훨씬 더 크고 화려하지만, 이곳 역시 마을의 랜드마크로서 마을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하얀 건물은 색색의 집들 가운데에서 의외로 무겁게 중심을 잡아주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먼 바다의 색도 우아했다. 깊은 파란색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니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속 배우 이민정의 대사가 떠올랐다. "속초 바다가 코랄 블루라면 강릉 바다는 코발트 블루 같아." 로빈 앞 아드리아 해의 색은 코발트 블루에 가까웠다.
나의 긴치마가 나풀거릴 정도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충분히 맞고, 돌길을 따라 다시 내려갔다.
저 위의 성 유페미아 성당과 아래의 아치를 이어주는 하얀 돌길은 그리시아(Grisia) 거리이다. 예술가들의 그림과 기념품들을 판매하여 로빈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따라 걷는다.
돌담길에는 로빈과 크로아티아의 모습을 담은 크고 작은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길 사이로는 종탑이 빼꼼히 보였다.
유독 분홍색, 주황색, 노란색 등 따뜻한 계열의 색들이 많은 동네였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 가을방학의 노래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처럼, 제목 그대로의 공간을 내가 걷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종종 마주치는 푸른빛은 더욱 예쁘게 빛났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듯한 집들 뒤에는 이렇게 사람 냄새나는 뒷길도 있다. 로빈의 매력은 이렇게 그 속을 걷고 또 걸으며 가끔 방향을 잃기도 하면서 흠뻑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따스한 햇살과 더 따스한 빛깔들 속에서는 바다도 자갈길도 결코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 사소한 메모 #
* 크로아티아는 세계적인 라벤더 생산지라고 한다. 아프리카 캠핑 중 만났던 캐롤 할머니가 숙면을 위해 베갯잇에 라벤더 오일을 살짝 바른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고단할 때 한 번씩 향을 맡으며 심신 안정을 취하기 위해 작은 병에 담긴 라벤더 오일을 샀다.
* ♬ 가을방학 -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