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00, 201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Mostar)
내게 여행지를 고르는 방법은 오로지 사진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가게 된 것도 모스타르의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올드 브리지) 사진 때문이었다. 여전히 보스니아라고 하면 전쟁이 먼저 떠올라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안전을 걱정했지만, 전쟁은 20여 년 전인 1995년에 종식되었고 지금 치안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사라예보에는 가보지 않아서 몰라도 적어도 모스타르는 안전하게 느껴졌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듯한 도시의 모습만큼이나 아직 치유되지 못한 보스니아인들의 아픔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크로아티아는 영토가 독특하게 나뉘어있다.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 사이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영토가 끼어있다. 그래서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사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중간에 간단히 여권 검사를 해야 한다. 그때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모스타르에 잠시 들러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모스타르에서 묵은 숙소는 호텔 예약사이트에서 무려 10점 만점에 9.9점을 받는 곳이었다. 후기에는 칭찬만 가득하고 단점이 하나도 없어 그게 오히려 나를 살짝 걱정시킬 정도였으나, 곧 나 역시 그와 같은 칭찬 일색의 후기를 남기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주인 넬리는 왜 터미널에서 픽업 요청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로 나를 반겨주고(도보 15분 남짓) 방을 안내해준 뒤 웰컴 간식을 주었다. 혼자 묵은 방은 생각보다 굉장히 넓었고 화장실에 샴푸와 비누, 수건 등이 넉넉히 구비되어있었으며 헤어드라이어에 슬리퍼까지 있었다. 아침식사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푸짐하게 차려주었고 주인 가족은 마주칠 때마다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보스니아가 워낙 물가가 저렴하기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이 하룻밤에 고작 22유로였다.
숙소가 쾌적하고 친절하니 첫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이미 모스타르는 도착 전부터 왠지 느낌이 좋아서 3박을 예약해둔 상태였다. 1시간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굉장히 작은 동네이지만, 나는 머무는 동안 수시로 스타리 모스트를 구경하였고 결코 질리지 않았다.
모스타르를 대표하는 것은 단연 스타리 모스트('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16세기에 처음 지어진 다리는 1993년 전쟁 중에 파괴된 후 재건되었다. 투박하지만 주변 건물들과 잘 어울렸다. 화려한 건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보스니아는 유럽 내에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로 꼽히는데, 사실 이슬람교도는 51%, 기독교인은 46%(대부분 세르비아 정교회)로서, 내전 이후 두 종교가 긴장감 속에 공존하고 있다. 붉은 지붕들이 지겨워지던 나로서는 모스크 등이 보이는 이곳의 풍경이 반가웠다.
다리 위에는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스타리 모스트 근방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지만, 아주 약간만 벗어나면 관광객이 급격히 줄어든다.
다리를 건너 내려가니 더 한적해졌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네레트바(Neretva) 강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를 가로지르는 강으로, 이곳에서 보트 투어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첫날은 이쯤 해두고,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른쪽은 체바피(cevapi)라는 보스니아 전통 음식으로, 소시지와 양파 등을 구워 빵 안에 넣어먹는다. 크로아티아에서 만났던 보스니아 사람이 추천해주어 1순위로 주문했다. 왼쪽은 보스니아식 수프라는데 밥 위에 올려놔서 덮밥 같았다. 맛있지만 조금 느끼한 체바피와 매콤한 수프를 번갈아 먹으니 환상의 조합이었다.
다음날은 숙소에서 차려준 푸짐한 아침식사로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사촌동생과 헤어진 후 조식이 제공되는 숙소에 있던 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든든한 아침식사만으로도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가장 먼저 여행사에 들러 다음날 근교 투어를 예약하고, 여유롭게 모스타르의 아침을 즐겼다. 스타리 모스트 외에 다른 다리들도 건너면서 조금 바깥쪽도 구경해보았다. 옥색의 강물이 참 예뻤다. 전날은 좀 늦은 시간에 와서인지 이날이 날씨도 더 맑고 환했다.
전날 갔던 다리 아래쪽에 다시 한번 갔는데 이번에는 사람이 꽤 몰려 있었다. 누군가가 다리 난간 위에 서서 다이빙을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오래전 이 동네 아이들만의 놀이였던 다이빙은, 이제는 다리에 서 있는 관광객들에게 잔돈을 받아 일정 금액이 모아지면 하는 일종의 퍼포먼스가 되었다.
내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내려가고, 다른 사람이 와서 떨어졌다. 바람잡이와 진짜 선수는 따로 있나 보다. 높이가 결코 낮은 것이 아니라서 꽤 아찔했다.
골목 가게들에서 엽서와 우표를 몇 장 사고, 해가 지기 전에 모스타르에서 가장 멋진 곳으로 향했다. 또 다른 다리인 이곳에 서면 스타리 모스트와 모스크, 그리고 마을 집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해가 질 무렵이라 따스한 빛이 도착했다.
이곳은 멋진 전망에 비해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 말고는 어떤 부부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배경이 잘 나오게 해주고 싶으셨는지 내 얼굴이 사진의 반을 차지했다.
해가 점점 지면서 어두운 건 더 어둡게, 밝은 건 더 밝게 강조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스타리 모스트의 모든 시간을 볼 수 있었고 그건 모두 아름다웠지만, 이른 저녁에 한적한 다리 위에서 본 이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다시 스타리 모스트로 향하는 길에 본 골목들도 기억에 남는다. 아름다운 곳을 보고 있으면 잠시 잊었다가도, 다른 골목에 들어가면 이곳에 남아있는 상처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각종 상점들과 그 북적거림이 그런 상처를 가려주지만, 그 공간을 조금만 벗어나면 금세 쓸쓸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1992년 보스니아 내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계가 주도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인구의 나머지 1/3을 차지하던 세르비아계가 반발하면서 폭격을 자행했고, 그것이 내전의 시작이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잔인한 인종청소 등, 보스니아는 유럽의 '킬링필드'라 불릴 정도로 처참한 폐허가 되었다. 1995년 12월 겨우 맺어진 평화협정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협상으로 남아있다.
전쟁은 20여 년 전에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지금도 여전하다. 종교 간, 민족 간 갈등이 아직도 남아있고, 사람들의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다음날 만난 가이드는 어릴 적 누나가 눈앞에서 강간당할뻔한 일도, 아버지와 집 앞에 나왔다가 폭격을 목격한 일도, 모두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오래전 일인 것 같아도 최소 30대 이상의 인구는 이 끔찍한 전쟁을 모조리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 이 전쟁은 아직 과거가 되지 않았고 여전히 현재의 일이다.
강가 돌바닥에 앉아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면서, 20년 후의 모스타르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모든 것을 빼앗겼던 그때에서 다시 예쁜 마을이 형성된 지금, 또다시 20년이 흐르고 나면 그때는 어떤 모습일까. 이곳의 밝고 친절한 사람들의 깊숙한 상처는 그때는 조금 더 치유되어 있을까.
Don't forget, but do forgive forever
'잊지는 말되, 영원히 용서하라' 스타리 모스트 옆에 큼직하게 쓰여 있던 글씨가 기억에 남는다. 완전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이기에 잊지 않는 것이고,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용서하는 것일 테다.
나의 여행 200일째를 기념하며, 모스타르의 20년 후를 상상하며, 두 번째 방문을 고대하며, 모스타르 안녕.
# 사소한 메모 #
* 여행 200일째, 나는 가장 완벽한 곳에 있었다. 마음에 쏙 든 단순한 풍경, 최고의 숙소, 밝고 상냥한 사람들, 입에 잘 맞는 음식, 그리고 적당한 날씨까지.
* 크라쿠프에서 만났던 타미에게 답장을 보냈다. 모스타르에 꼭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아쉽다고, 그곳에서 엽서를 보내달라 부탁했던 걸 잊지 않았다. 대만 주소를 한자로 알려줘서 삐뚤빼뚤 한자로 적어 보냈다. 타미는 초등학생 글씨 같다며 놀렸다.
* ♬ 이루마 - River Flows in You